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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달 좀 해주실래요?

“권진하실 수 없으면, 이 편지를 이웃에 꼭 전해주세요”

저는 지금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만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모르는 분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주변에 염불 권하는 게 ‘권진’
아미타불 마음에 감읍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염불 권유
이 글 읽어줄 수 있는 이에게
중계해주는 것도 권진 방법

이 편지를 받으시면, 제가 모르는 그분께 이 편지 배달 좀 해주실래요? 배달해 주실 때는 또 부탁드려 주실래요? “배달을 부탁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이 편지가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로 하여금 이 편지를 쓰게 하신 분이 따로 있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이런 맹서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령 내가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온 누리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이 발원을) 믿고 좋아하여 나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해서 십념 정도를 한다고 하자, (그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 다만, 오역죄를 저지른 자와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세운 분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부처가 되기 전에 48가지 서원을 세우셨다 합니다만, 그중에 제18원이 바로 지금 말씀드린 이것입니다.

48가지 서원에는 다 이름(願名)이 있습니다만, 이 제18원에도 많은 분이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저 자신도 제18원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권진염불원(勸進念佛願)이라 불러봅니다. 기존의 염불왕생원, 십념왕생원, 지심신요원, 범부성불원은 모두 중생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마주 서서 하는 원입니다. 염불왕생원과 십념왕생원은 마주한 둘 중에서 이쪽, 즉 중생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역전한 것이 지심신요원입니다. 둘 중에서 저쪽, 즉 아미타불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권진염불원이라 부를 때는 그렇게 마주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미타불 곁에 서서 하는 말입니다. 혹은 아미타불을 업고서 하는 말입니다. 곁에 설 때나 업게 되면, 아미타불과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됩니다. “참된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한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미타불의 곁에서, 혹은 아미타불을 등에 업게 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저 18원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이 발원을) 믿고 좋아하여 나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해서 십념 정도를 하라”고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 열 번 정도를 해달라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 불러달라고, 이렇게 정진(精進)해 달라고 권하는 것, 그것을 권진이라 말합니다. 제18원은 아미타불께서 중생들에게 염불을 하라고 권진하는 것이었다고 저는 이해한 것입니다.

권진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잘 안 씁니다. 모릅니다. 그 이유는 권진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관무량수경’을 잘 안 읽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관무량수경’에는 ‘권진행자(勸進行者)’라는 말도 나오고, ‘권진기심(勸進其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렇게 중생들을 권진하는 아미타불의 마음을 느낄 때, 그 마음에 감읍(感泣)할 때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신심이 생기게 될 때 어떻게 할까요? 스스로 염불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염불하라고 권진하게 됩니다. 스스로 믿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믿으라고 권진하게 됩니다.

모든 염불행자들이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만, 특별히 원효 스님이나 잇펜(一遍) 스님 같은 분은 길로 나섰습니다. 자리에 편히 앉은 일이 없습니다. 이른바 서있는 스님이 되셨습니다. 서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지요.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염불하라고 말입니다.

잇펜 스님은 16년이나 일본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권진하였습니다. 그때 “믿든 믿지 않든,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든” 권진한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권진의 철학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편지를 배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편지를 배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정토법문을 믿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편지를 배달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편지를 읽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있고, 우선 불교를 믿는 분들 중에도 정작으로 정토법문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면 아직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권진해야 하는가?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권진해 주셔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권진합니까? 나는 못합니다. 권진을 할 수 있을 만큼 불교를 알지도 못하고, 정토법문을 믿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권진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시다면, 그렇게 독자적으로 권진을 하실 수 없으시다면, 이 편지를 다른 이웃들에게 배달해 주시는 것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가족이나 친구나 친지나 누구에게라도, “아, 저 사람이라면 이 정도 글은 한번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분에게 중계해 주실 수는 있지 않을까요?

저처럼 직접 편지를 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중계를 해주시는 것만 해도 바로 권진입니다. 이렇게 받은 사람이 읽고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배달해 주고 하여 편지가 돌고 돌 수만 있다면, 이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메일이든, SNS든, 아니면 블로그든 카페든, 종이로 인쇄해서 나누어주시든, 그것을 게시해 주시든지, 이 편지 배달 좀 해주십시오. 그렇게 이 편지에 실려 있는 말씀을 좀 공유해 주십시오. 회향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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