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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과 별업의 무게

기자명 심원 스님

긴 여름의 끝자락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가을이 성큼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으로 헐떡이던 마음 잠시 내려놓는다. 우란분재 백중법회에 귀에 익은 염불이 낭랑하게 들려온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어디서 태어나 왔으며 죽어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이 멋진 시구는 나옹 스님의 누님이 동생인 나옹 스님에게 염불을 배우고 깨달은 바 있어 읊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함허득통 스님이 원경왕태후의 천도를 위해 설한 법어라고 하기도 하며, 서산대사의 임종게라고도 한다. 여하튼 이분들의 본래 글에 첨삭이 있고 변형은 있지만 잘 다듬어져 현재는 ‘석문의범’에 영가법문으로 수록되어 있다.

불교의 기본토대가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인간도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중연생기(衆緣生起)에 의한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로 인연에 따라 오고 간다. 위의 게송은 이러한 불교의 생사관을 구름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반면 서양문화에서의 죽음은 비장하고 결연하다.

죽음과 관련된 가장 널리 알려진 명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일 것이다. 이 라틴어는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로마 공화정시절, 승리한 개선장군이 시민들 사이에 행진할 때, 역설적이게도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메멘토 모리’라고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경고였다. 이 명구는 중세에도 위력을 발하여 수도승들이 아침에 만나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인사말로 신을 향한 신앙심이 퇴보하지 않도록 서로를 경책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어디선가 모차르트의 레퀴엠 D단조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고, 해골이 등장하는 17세기 네덜란드풍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가 배경으로 펼쳐지면 ‘죽음’이라는 사건에 부여한 서양문화의 비장함은 절정에 달한다.

다시 ‘뜬구름’의 영가법문으로 돌아오면 죽음에 대한 태도가 이토록 담박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죽음의 순간, 인연 따라 모였던 지수화풍 사대(四大)와 심식(心識)이 제각기 흩어지더라도 일생동안 ‘그가’ 지은 업은 남겨진다. 스스로 지은 별업(別業)이나 더불어 지은 공업(共業)이 또 다른 인연을 만나 그렇게 다시 ‘한 조각 뜬 구름[一片浮雲]’을 만들 것이다. 뜬 구름에 비유했다 해서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메멘토 모리’를 외치면서 끊임없이 죽음에 대하여 경각심을 일깨운 것은 죽음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삶이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 억만겁의 과보이자 새로운 미래 억만겁의 시작이다.

작금에 종단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서 내가 이미 지은 공업과 별업을 생각한다. 그리고 멀지 않은 백년 뒤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 승가 개개 구성원이 짓고 있는 공업과 별업이 천금의 무게로 다가온다.

옛 어른들이 그리하셨듯 삭발한 머리 가만히 만져보며 출가사문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보자고 간곡히 청을 드리고 싶다. 한조각 구름이 흩어질 때 우리 모두 너무 부끄럽지 않도록.

심원 스님 중앙승가대 강사 chsimwon@daum.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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