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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채문기의 길따라 절에 들다
62. 영동 백화산 반야사-문수전-임천석대-저승골한여름에 핀 붉은 꽃 안고 9월의 숲으로 들어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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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1  13: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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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 반야사에서 시작하는 길과 상주 보현사를 기점으로 시작하는 길을 이은 약 5Km 구간의 둘레길이 석천계곡을 따라 조성돼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은 헛말이 아니다. 바위에 스민 물도 제 스스로 얼고 녹음을 반복하며 집채만 한 바위라도 끝내 쪼개지 않는가. 그렇게 부수어진 돌조각들이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퇴적된 특정지역을 너덜지대라고 한다. ‘너덜’은 돌들이 깔려 있는 산비탈을 이르는 순 우리말 ‘너덜겅’을 줄인 말이다. ‘지대’라는 단어가 굳이 필요 없음에도 지질학 관점에서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

500년 배롱나무 꽃향기
초가을 천년고찰에 가득

벼랑 끝 문수전서 조망한
백화산·석천계곡 풍광 ‘절경’

성주산문 세운 무염국사
창건설 신빙성 높아 주목

몽골 5000군사 패퇴시킨
홍지 스님 역사 조명 미흡

밀양 만어산(萬魚山) 만어사(萬魚寺) 앞에는 길이만도 400m에 이르는 너덜겅이 펼쳐져 있다. 신기하게도 물고기 모양의 돌덩어리들이 많고, 두드리면 맑은 소리로 화답한다. 충북 영동 백화산에도 신기한 너덜겅이 펼쳐져 있다. 돌들은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부여잡고, 포개고는 마침내 호랑이를 그려냈다. 하늘을 향해 꼬리를 힘차게 쳐든 맹호(猛虎)다. 그 아래 지혜의 절 ‘반야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문수전으로 향한다.

   
▲ 100m 벼랑 끝에 선 문수전.

신라 성덕왕 27년(728) 원효대사의 제자 상원 스님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학조대사가 중창한 절로 알려져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건 무염(無染) 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묘사에 주석하고 있던 무염 스님이 사미승 순인을 보내, 못에 살고 있던 익룡(翼龍)을 쫓아내고는 그 못을 메워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지금의 반야사라는 것이다.

9세 때부터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던 무염 스님은 부석사(浮石寺) 석징(釋澄) 스님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한 후 당나라로 유학(821)을 떠나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에 머물렀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가 세계 최고 공과대학으로 손꼽히듯 당나라 때의 화엄학은 지상사가 휘어잡고 있었다. 의상 스님 역시 그 절에서 화엄을 공부했다. 그러나 무염 스님이 중국에 머물고 있던 당시에는 교학보다 선종이 흥행하고 있던 때였다. 점차 선에 매력을 느낀 무염 스님은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 선사를 찾아가 선의 진수를 맛본 후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 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신라로 돌아 온(845) 무염 스님은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중심으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열고는 40여년 동안 법을 펼쳤다.

   
▲ ‘호랑이 너덜겅’을 안은 반야사 전경.

한때 충남 보령을 떠나 경북 상주에 머문 적이 있다. 무염 스님의 법력이 세상에 회자된 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법을 구하기에 그들을 잠시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구법을 향한 열정을 피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법체가 원만해야 법도 제대로 펼 수 있는 법. 연이은 법석에 서며 다소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고자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을 터다. 보령을 떠난 발길이 닿은 곳은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

현재 심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월류봉 아래에 자리했던 사찰로 추론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청도 황간현 불우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심묘사 절에 팔경이 있으니 사군봉, 월유봉, 산양벽, 용연동, 냉천정, 호현악, 청학굴, 법존암이다.’

   
▲ 철제 다리를 건너면 문수전에 닿는다.

산과 물이 빚어낸 경관이 수려해 ‘달도 머무른다’는 ‘월류봉(月留峰)’ 아래 일대의 산수를 가리켜 한천팔경이라 한다. 그 팔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우암 송시열이 머물렀다는 지금의 한천정사다. 한천정사가 심묘사의 옛 절터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천정사 부근에 심묘사가 자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분명한 건 심묘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심묘사에 무염 스님이 주석했다는 것 또한 사실인 만큼 무염 스님에 의해 반야사가 세워졌다는 설은 의미 깊다. 이 설을 따른다면 반야사 창건은 적어도 무염 스님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 온 845년 이후이니 상원 스님 창건설에 비해 절이 처음 선 연대는 100여년 뒤로 미뤄진다.

정말이지 문수전은 벼랑 끝에 간신히 서 있었다. 전각 하나에 사람 한 명 걸어 다닐 만한 폭만 확보돼 있는 좁은 공간이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풍광은 절경이다.

백화산(933m)이 반야사를 향해 풀어 낸 산자락은 승천하는 봉황의 날개처럼 품이 넓으면서도 힘차고, 그 산자락 사이의 석천계곡은 충청도의 풍류를 일필휘지로 그려내 보려는 듯 멋들어지게 굽이쳐 흐르고 있다. 눈을 감고 서 있노라면 계곡 물소리 점차 우렁차게 들려오니 자연이 선사하는 교향곡이요, 그 선율에 짊어지고 온 번뇌조차 시나브로 가라앉으니 문수보살이 전하는 법설이다. 저 아래 절에서 20분의 수고만 더하면 마주할 수 있는 풍광이니 마음씨 넉넉한 문수보살이다.

백화산(白華山)은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경계 에 자리하고 있다. 영동 반야사에서 시작하는 길과 상주 보현사를 기점으로 시작하는 길을 이은 약 5km 구간의 둘레길(호국의 길)이 석천계곡을 따라 조성돼 있다. 문수전에서는 그 구간 일부를 확연하게 조망해볼 수 있다.

문수전 바로 아래의 망경대 영천(석천계곡 구간)이 세조가 목욕했다는 곳이다.

   
▲ 문수전에서 바라 본 백화산 둘레길과 석천계곡.

조선시대의 반야사 중창을 주도한 인물은 신묘대사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글창제를 주도하고 반포한 장본인이고, 한글을 직접 연구하고 만든 인물은 따로 있는데 법주사 복천암에 주석했던 신미 스님이 그 주인공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야사 중창 회향 날 세조가 행차했다. 이때 세조 앞에 문수동자가 나타나 따라오라 해서 가 보니 지금의 반야사 옆 영천이었다. 이곳에서 목욕한 후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계곡 따라 백화산을 향해 좀 더 걸어가면 반야사 옛터가 나올 것이다. 원래의 반야사는 석천계곡 너머, 행정구역상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 경계에 서 있었다. 그곳을 지나면 임천석대다.

고려 악사 임천석(林千石)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직감하고는 거문고 하나 들고 이 계곡으로 들어와 토굴 짓고는 그 앞 큰 바위에서 달을 벗 삼아 거문고를 켜며 시름을 달랬다. 고려가 망한 직후 이성계가 그의 거문고 연주 솜씨를 인정해 궁으로 들어오라 했으나 거절하고는 바위에서 투신해 세연을 끊었다. 그가 거문고를 켜고, 몸을 던졌던 큰 바위를 일러 ‘임천석대’라 한다.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죽음으로 증명한 곳이다.

저쯤 어딘가에 2500명의 몽고군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저승골이 있을 터다. ‘고려사 절요’에 이런 대목이 있다.

‘10월 무자(戊子), 몽고장수 차라대(車蘿大)가 상주산성을 공격했으나 황령사 홍지(洪之) 스님이 제4관인을 사살했다. 사졸(士卒)만도 반이 넘게 죽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삼층석탑(보물 1371호, 고려시대)을 품고 있다.

몽고 6차 침입 당시(1254) 차라대(자랄타이)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상주까지 침략한 적이 있는데 ‘고려사 절요’는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상주의 관·민·병이 백화산 아래의 계곡으로 몽골군을 유인해 한 달여의 전투 끝에 승리했다.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군관민을 통솔한 사람은 홍지 스님이다. 칠봉산 아래 서 있는 황령사는 지금도 맥을 이어가고 있다. 5000 군사 중 2500명을 사살하고 패퇴시켰으니 ‘홍지 스님의 상주대첩’이라 명명해 길이 남길 법도 한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 그리 많지 않다.

반야사로 다시 내려 와 극락전 앞 수령 500년의 배롱나무 앞에 선다. 8월의 뜨거움으로 피워낸 붉은 꽃은 9월에 접어들어서도 향기를 뿜고 있다. 그윽한 그 향기 품고 ‘내를 건너 숲’으로 들어갈 참이다. ‘누군가 마음 씻고 비워’내며 낸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 볼 심산이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청량하다. 9월의 숲이 길 떠난 이들에게 안겨주는 선물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백화산 주차장(반야사 입구). 석천계곡을 따라 400m 걸어가면 반야사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오른쪽으로 난 ‘문수전 가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산을 오르면 문수전(3분 거리)으로 오르는 길과 조선의 세조가 목욕했다는 천(川)으로 내려가는 길(5분)로 나눠지는 갈림길에 닿는다. 문수전 참배 후 반야사 원점회귀한 뒤 석천계곡 건너는 돌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백화산 둘레길이다. 반야사-문수전-저승골 입구-난가벽-출렁다리-반야사 원점회귀에 소요되는 시간은 2시간 30분.

 

이것만은 꼭!

   
 
저승골:
상주의 황령사에 주석하고 있던 홍지 스님이 몽골의 차라대가 이끄는 군을 유인해 격퇴한 곳이다.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고 해서 ‘저승골’로 불려왔다. 차라대가 홍지 스님에게 대패해 성을 넘지 못하고 한탄한 데서 한성봉(恨城峰)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한성봉(漢城峰)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천석대:
고려의 거문고 악사 임천석이 고려가 멸망하자 투신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태조가 그의 재주에 감탄해 한양으로 불렀으나 상응하지 않고 이곳에서 투신해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냈다고 한다.

 

 

 


   
 
세조가 목욕하던 영천:
조선의 세조는 반야사 옆, 문수전 바로 아래의 영천(석천계곡)에서 목욕을 한 후 앓고 있던 피부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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