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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처님을 등에 업고

“아미타불 본원이 모든 중생과 나 자신의 원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저는 제18원의 이름을 권진염불원(勸進念佛願)이라 부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아미타불을 마주보고 서는 것(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 옆에 서서 혹은 부처님을 등에 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미타불 등에 업고 선다는
권진염불원으로 해석한 것은
의상 스님 ‘발원문’에서 착안

48대원을 내 것으로 삼으면
극락 존재여부 문제 안 되고
자력·타력 문제도 절로 해소

이러한 저의 입장은 정토사상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새로운 입장입니다. 새로울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정토문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이설(異說)이라 규정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정토의 어떤 종문에 소속된 몸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모과나무)의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이른바 ‘종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된 몸이지만, ‘조계종학’ 안에는 정토에 대한 입장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므로 저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해석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의 수용 여부는 여러분들에게 맡깁니다만, 그러한 의견의 제시는 저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편지에서는 그 점을 다시 좀 더 부연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제게 그러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구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상(義相) 스님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의상 스님은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개창하신 분이십니다. 그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이 부석사입니다. 부석사의 법당은 무량수전입니다. 바로 무량수여래, 즉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법당의 문을 열게 되면 문 열고 들어가는 사람의 정면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좌향좌 해야 부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남향하고 있습니다만, 부처님은 동향하고 계십니다. 바로 서쪽에 계시는 아미타불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의상 스님은 평생 서쪽을 향해서 앉으셨다고 합니다. 서방으로 가시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정토행자들입니다. 부석사는 ‘관무량수경’의 구품왕생(九品往生)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으로 올라가는 축대와 계단을 조형해 놓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의상 스님께서 남겨놓으신 정토사상에 대한 글은 없습니다. ‘아미타경’에 대한 주석서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백화도량발원문’이라는 문헌이 남아있습니다.(이 문헌의 저자문제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의상 스님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발원문은 관세음보살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백화도량발원문’으로부터 아미타불과 중생, 아미타불과 나의 관계에 대한 입장에도 적용 가능한 논점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 앞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머리 숙여 귀의하옵고/ 저희 스승 관세음보살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우러르며/ 제자의 성정본각(性靜本覺)을 관찰하옵니다./ 한가지로 근본이 같으므로 청정하며 밝아서/ 시방세계에 두루하오나 확연히 텅 비었으니/ 중생이라 부처라 할 모습이 따로 없고,/ 귀의의 주체니 대상이니 부를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밝고 깨끗하지만 비춤에 어긋남이 없으니,/ 삼라만상 가운데 몰록 나타나십니다. ( 중략 ) 모두 같은 대원경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거울 속 제자의 몸으로/ 제자의 거울 속에 계신 관세음보살님께 귀명정례(歸命頂禮)하여/ 진실한 발원의 말씀을 사뢰오니 가피를 바랍니다.”

이 글에서 세 번 나오는 ‘관세음보살’을 모두 ‘아미타불’이라고 바꾸어서 읽어보시지요. 그러면 우리의 주제에 대한 한 해답을 제시하는 말씀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관세음보살과 중생이 서로 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밝히고 있는 부분이 압권(壓卷)으로 생각됩니다.(이 발원문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졸저, ‘천수경과 관음신앙’ 제3부 참조)

그러한 논리를 그대로 아미타불에게도 적용해 보면, 아미타불과 중생, 아미타불과 나는 결코 공통의 근본, 즉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떠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미타불은 중생 속의 아미타불이고, 중생은 아미타불 속의 중생입니다. 서로 중간에 흐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서서 서로 마주보는 그러한 이원대립(二元對立)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의상 스님에게서 그러한 논리가 나타나는 것은 화엄의 입장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은 중생이 곧 부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지금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정토신앙에 대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미타불이 법장보살이었을 때 세우신 본원(本願, 옛날에 세운 원)이 아미타불만의 원이 아니게 됩니다. 바로 모든 중생의 원이 될 수 있고,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의 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바로 아미타불을 등에 업는 순간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해소됩니다. 하나는 극락의 존재 여부입니다. 아미타불의 입장이 되어서 48가지 서원을 나 자신의 원으로 삼게 되는 순간, 극락의 존재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사 극락이 없더라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없는 극락을 이제 만들어가려는 서원 48가지를 바로 나 자신의 서원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력과 타력의 문제가 해소됩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은 타력인데, 아미타불을 등에 업는 것은 자력입니다. 타력과 자력이 구분되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타력의 끝에서 자력으로 전화(轉化)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튼 자력과 타력을 문제 삼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에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대한 믿음으로 극락왕생을 확신한 염불행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묘호인(妙好人)’이라고 부릅니다.(당나라 선도대사의 ‘관무량수경소’에서는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중에 묘호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묘호인을 재조명한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야나기입니다.) 그 묘호인 중에 쇼마(庄松)라는 분의 말씀을, 야나기는 제16장 ‘자력과 타력’을 논하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모두 타력 타력이라며 기뻐하지만/ 나는 아미타부처님의 자력이 고맙다네.”

이분 역시 아미타불 곁에 나란히 서시거나, 아미타불을 업고 있습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이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하여 5겁이나 되는 긴 시간을 투자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대승불교에서 공통적으로 설하는 보살행, 보현행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자비, 그러한 보살행의 구현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정토불교입니다. 나무아미타불(더 자세히는 ‘보조사상’ 48집에 게재한 졸고 ‘극락의 존재여부와 염불의 가능성’을 참조바랍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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