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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소나무에 앉은 학의 발밑이 한바탕 망신이지-하

유위마저 감싸안는 것이 진정한 무위

▲ ‘묘봉정(妙峰頂), 계도 없고 부처도 없고’ 고윤숙 화가

굳이 유위적 세계를 파괴한다고 하지 않아도, 유위와 무위를 동렬에서 놓고 대비하게 되면 무위는 유위와 구별되는 반대개념이 되고, 유위를 배제한 별개의 영역이 되며, 그 결과 무위는 유위의 인위적 배제를 뜻하는 또 하나의 유위가 되고 만다. 손 대신 약을 쓰는 제초제로 인한 많은 위해를 야기하니 하지 않을 이유가 있지만, 기계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경운기를 두고 굳이 소로 쟁기질을 하는 것은 ‘애써 하는 무위’로 보인다. 컴퓨터가 옆에 있는데 굳이 손으로 계산하는 것도 그렇다.

동물이 사냥하는 것이 본성이라면
인간이 문명 이루는 것도 또한 자연
도는 어디나 내재해 위치 따로 없다

무위란 말을 오해하기 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따로 말하는 순간 무위 아닌 또 하나의 유위가 되는 난점. ‘자연’이나 ‘자연주의’라는 개념 또한 그렇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손대지 않은 것(‘무위’다!)을 뜻한다. 하여 문명이나 기술 같은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서양에서 이런 자연 개념을 강하게 주장한 이는 루소였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물이 먹고 살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 ‘타고난 본성’이고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인간이 살기 위해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것 또한, 비록 자연에 ‘손을 댄’ 것이지만 ‘타고난 본성’에 따라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노동 또한 자연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그 노동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것 또한 자연에 속한다 해야 한다. 그 도구가 호미나 괭이면 자연이고 경운기나 이앙기면 자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기계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것 모두가 자연에 속한다. 자연이란 대지에서 스스로 솟아난 것이든 누군가에 의해 변형되고 만들어진 것이든, ‘탄생’한 이상 ‘스스로 그렇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한다. 손 댄 것도 손대지 않은 것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연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이라고 말할 때 자연이란 바로 이런 의미였다.

무위가 유위와 동렬에서 대립하면, 그것은 어느새 ‘애써 하는 무위’가 된다. 유위의 일종이 된다. 자연이 진정 자연이 되려면 문명이나 기계마저 싸안아야 하듯, 무위가 진정 무위가 되려면 유위마저 싸안아야 한다. 무위가 유위와 진정 다른 것은 양자를 대비하는 경계선을 지워버릴 수 있는가 여부에 있다. 유위적인 것마저 무위의 작용 안에 담아내는 것, 유위적인 것 안에서마저 무위의 ‘힘’을 작용케 하는 것.

사실 ‘장자’에서 자연에 대한 루소적인 공상이나 ‘애써 하는 무위’ 개념을 볼 수 있지만 ‘장자’ 전체의 뜻이 그렇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앞서 인용한 것보다 장자의 무위 개념을 더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라 하겠다.

“보잘 것 없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게 물건이고, 낮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백성들이다. 번거롭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일이고, 거칠지만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법이다…그렇기에…덕을 이루기는 하지만 인위에 얽매이지 않으며, 행동이 도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계획하지는 않으며, 행동이 인에 부합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며 의에 다가가면서도 그걸 쌓지 않으며 예를 지키면서도 금기에 얽매이지 않는다.”(‘장자 2’, 135)

도구, 지금이라면 기계까지도 포함하게 될 물건에 대해서도 이리 말한다. “물건을 용도에 따라 쓰기는 하지만 버리지 않는다. 물건이란 추구할만한 가치는 없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위란 좀 더 편하고 쉽게 해주는 것, 좀 더 좋은 것을 굳이 얻으려 애쓰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미 있는 것을 쓰지 않거나 버리는 것도 아니다.

지식 또한 그렇다. 도는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많은 경우 지식 때문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식 모두 거부해선 도를 이룰 수 없다. 지식에 기대고 지식을 늘려 도를 얻으려는 것이 ‘유위’라면 지식을 피하고 거부하여 도를 얻으려는 것도 ‘억지로 하는 무위’다.

요컨대 무위란 애써 하고자 하지 않음이지만 굳이 안하고자 함도 아니다. 편리와 불편, 새것과 낡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미리 호오의 분별을 하지 않고, 그 모두가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위는 ‘제물(齊物)’이라는 장자의 유명한 개념과 그대로 이어진다. 모든 것들이 나름의 가치로 평등한 세계, 그게 제물론의 세계니까. 그래도 그것을 ‘무위’라고 명명한 것은 나름의 가치를 찾아가는 방향을 그 말이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위의 개념이 선사들이 말하는 도나 무위법과 매우 가깝다는 것은 분명하다. 승속과 범성의 선이 그어지고 부처와 중생, 승가와 시장의 구별에 따라 사유와 행동이 움직이게 될 때, 우리는 어느새 불법과 비불법의 구별이 생겨나는 것을 본다. 계도 받지 않은 행자에게 의발을 준 것은 그렇게 계도 없고 부처도 없는 곳에서 불법을 닦고 전하라는 말일 게다. 조주가 남전 회하에서 깨우침을 얻고 나서 80세가 되도록 세간을 행각하고 다닌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오래 수행하시던 한 스님 말씀이, 어쩌다 버마에 갔더니 흔히들 ‘소승’이라고 비판하는 남방의 스님들이 ‘대승’을 자처하는 한국의 스님들 이상으로 못사는 이들의 생활을 도와주고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를 만들고 하는 걸 보고 ‘소승’ ‘대승’이란 말이 얼마나 허망한 말인가 싶어 내버렸다고 한다. 스님들이 산속을 찾고 고립된 공간을 찾는 것은 어쩌면 승려를 천민화하고 도성 출입을 못하게 막았던 500년 조선의 역사에 연(緣)하여 만들어진 습속은 아닌가 모르겠다.

궁극의 도 또한 무위와 같아서, 그걸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야 하지만 따로 별도의 영역이 있는 게 되면 방향을 오도하게 된다. 궁극의 도는 저기 높은 어디에 초월적인 자리를 갖는 게 아니라 어디에나 내재하기에 따로 장소를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궁극의 도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란 말이다. 다음의 공안은 이런 난점에 대한 것이다.

보복(保福)이 장경(長慶)과 산에서 노닐 때, 보복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묘봉정(妙峰頂)일세.”

장경이 이에 답했다.

“옳기는 옳지만 애석하군.”

경청(鏡淸)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손공(장경) 스님이 아니었다면, 온 들녘에 해골이 가득 널려 있었을 것이다.”

산 속에서 노닐지만 산꼭대기, 궁극의 지점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지 모를 것이고 도를 향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묘봉의 정상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장경은 그것을 두고 ‘옳다’고 하지만 동시에 ‘애석하다’ 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묘봉정이 저기 어디 따로 있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사구가 되어 후학들을 현혹한다. 그래서 경청은 말한다. 그걸 경고하는 장경의 말이 없었다면 사구에 속아 죽은 이들의 해골이 온 들판에 가득 했을 거라고.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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