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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법을 구하러 서쪽으로 가다

기자명 정진희

‘서유기’ 내용 도해로 흥미·포교 함께 추구

▲ 현장병성건대회도, 통도사 용화전 벽화.

‘서유기’와 관련된 예능프로를 보다 문득 통도사 용화전의 벽화가 생각났다. 통도사 용화전의 내부를 장엄한 벽화 가운데는 흥미롭게 손오공과 저팔계가 나오는 ‘서유기’ 장면이 있다. ‘서유기’ 장면은 법당의 동측 면에 3점, 서측 면에 4점이 있는데 사찰벽화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그림들은 막연히 불교 인연설화를 소재로 하여 그린 것 인줄 알고 있었다. 사진으로 소개한 현장병성건대회도(玄藏秉誠建大會圖)는 현장법사가 당 태종의 명을 따라 수륙재를 여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화면 하단 용을 밟고 향 공양을 하는 인물은 수륙재를 발원한 당 태종이고 두광이 그려진 승려가 현장법사이다. 사찰 벽화에 고사 인물이나 ‘삼국지연의’에서 소재를 택하여 작품을 완성한 예는 흔히 있으나 ‘서유기’가 그려진 예는 처음이었기에 2008년 당시 이 사실이 알려 졌을 때 통도사 용화전 ‘서유기도’는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통도사 ‘현장병성건대회도’는
현장법사가 수륙재 여는 장면
경천사지석탑도 ‘서유기’ 부조
자기극복의 수행자 마음 은유

‘서유기’는 당나라 태종 때(629년)의 승려 현장이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 각지를 순회하며 경전과 불상 및 불사리를 모아 645년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던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것이다. 현장법사는 경율론 삼장에 모두 밝았기에 흔히 삼장법사라고도 하는데 그의 업적과 명성은 구전되면서 점차 신비화되었고 그의 여행기는 전설적인 모험담이 되어 사찰의 벽화나 석탑에 조형되게 되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 법을 구하러 가는 설화를 그린 작품들을 ‘현장취경도’라고 하며 10세기 중반부터 독립적인 소재로 그려졌다는 기록은 있지만 남겨진 작품이 없기에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가 없다.

어느 해 인가 필자가 찾았던 유림굴의 벽면에는 흰 코끼리를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보현보살과 권속의 무리를 향해 벼랑의 끝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올리는 현장법사, 털북숭이 행자로 묘사된 손오공이 그려져 있었다. 백마의 등에 올려 진 연화대좌 위에 보자기로 싸서 고이고이 모신 짐 보따리가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어렵게 불경을 구해서 돌아가는 길에 보현보살일행을 만났었나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이 나오는 ‘서유기’는 16세기 후반에 명나라 시절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소설이 나오기 300여년 전 서하시대(1032~1277) 불교벽화에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아마 작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현장법사와 관련된 불교설화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100회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하였던 것 같다.

▲ 현장취경도, 서하, 안서 유림굴 제3굴 서벽 남측 ‘보현보살도’ 부분.

명나라 시대 ‘서유기’가 만들어지기 이전 현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법을 구하러 간 서사적인 이야기는 1348년 고려시대 후기에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에도 보인다. 석탑을 자세히 보면 ‘서유기’에 나오는 장면들을 부조로 새겨 놓았는데 탑에 ‘서유기’ 내용을 도해한 까닭은 등장인물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중대석 남동측면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홍해아(紅孩兒)’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구름과 같이 보이는 파도를 타고 중앙에 서 있는 인물은 관음보살이고 그 뒤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행자는 아마도 현장법사의 제자들일 것이다. 관음보살의 맞은편 석장을 쥐고 있는 인물은 현장법사인데 관음보살이 홍해아의 불 공격을 막기 위해 정병에 든 감로수로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에 술수를 쓸 수 없는 그는 제자 등에 업혀 있는 것이다. 물바다 세상에서 저렇게 현장을 업어 살리는 인물은 십중팔구 손오공이지 싶은데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 위해 떠난 십만팔천리 긴 여정의 굽이굽이마다 손오공이 보여주는 스승을 봉양하는 과정이 참으로 힘들어 보여 어릴 때 ‘서유기’를 읽으면서 괜스레 애가 쓰였다.

그들 사이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는 홍해아를 나타낸 것 이다.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들은 모두 불로장생을 위해 삼장법사를 잡아먹고자 변장하여 술수를 쓰는데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삼장법사는 계속 그들을 도와주라고 손오공을 닦달만 한다. 화운동 동굴에 사는 우마왕과 나찰녀의 아들 홍해아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홍해아는 아버지와 손오공이 의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협하였고 비록 모습은 어린아이였지만 강력한 그의 무력을 손오공 일행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때 관음보살이 기지를 발휘하여 홍해아를 유인해 연화대에 앉혀 붙잡았고 이후 홍해아는 관음보살의 제자가 돼 선재동자가 되었다 하니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엮어 흥미진진한 줄거리를 만든 작가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 홍해아 이야기, 1348년. 경천사지 10층 석탑 기단 중대석 부분.

몰상식한 한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되어 일본까지 갔다가 부처님의 가호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힘든 과거를 지닌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부조는 파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지만 1465년 이를 그대로 본떠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서유기’ 부도는 그보다는 보존 상태가 좋다. 탑에는 모두 8장면의 ‘서유기’ 내용을 도해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사진으로 소개한 장면은 당태종설대회이다. 전각 속에 황제로 보이는 한 인물이 앉아 있고 그 옆 승려가 있는 이 장면은 삼장이 기우제를 지내자 큰 비가 3일간 내렸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천자는 현장에게 금란가사와 아홉 고리가 달린 석장을 주고 삼장법사로 봉해 나라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서천에서 경전을 구해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도해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현장법사는 나라의 출국금지를 어기고 몰래 당나라를 벗어나 인도로 향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현장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출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당태종설대회, 1465년, 원각사지 십층석탑 중대면석 동측 동면.

흥미로운 모험담이 가득한 ‘서유기’에서 요괴들을 물리치는 장면들은 번뇌를 물리쳐 자기 극복과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구법적인 성격도 강하다. 현명하신 우리의 선조들은 불사리를 품고 있는 석탑의 수호자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현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을 선택하여 대중의 관심과 불법을 포교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근두운을 불러 타고 가면 찰나에 도착할 거리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1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한 걸음씩 걸어간 손오공이 보여준 구도의 길은 어쩌면 LTE 세상에서 빠름만을 찾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법을 구하는 마음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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