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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여든 살에 배운 한글

기자명 조정육

읽고 들으며 사람 도리 배우는 노년의 행복

▲ 이명기, ‘송하독서도’, 조선 말기, 103.8x49.5cm, 종이에 연한 색, 삼성리움미술관 : 노년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아야 노년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건강한 몸, 풍족한 돈, 멋진 사람들과의 만남 등등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위대한 분의 가르침을 읽고 배우고 따라해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솔바람 부는 서재에 앉아 경전을 펼친 후 ‘나는 이와 같이 듣습니다’로 시작하는 아침.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전주시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어 내려갔다. 장소는 전주시 평생학습관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세 차례 강의를 하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강의를 하던 날이었다. 관장님과 함께 사무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는데 탁자 옆에 세워 둔 액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글씨가 삐뚤빼뚤하는 것으로 봐서 초등학생 시화전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시 제목 아래 적은 글 쓴 사람의 이름 곁에 숫자가 특이했다. 학년과 반을 뜻하는 2-3이나 5-2가 아니라 73 또는 82와 같은 숫자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느낌이 있어 관장님한테 액자에 대해 물었다. 짐작대로였다. 그 숫자는 글을 쓴 사람의 나이였다. 한글반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이 쓴 시로 시화전을 열고 난 액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2014년에 발간한 책을 한 권 준다. 전주시에 있는 19개 복지관과 평생학습센터에서 한글을 배운 분들의 글을 엮은 책이었다. 글은 편집자가 교정을 보지 않고 처음에 쓴 글 그대로 복사해서 실었기 때문에 글 쓴 사람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육필원고였다.

처음 한글 깨우친 어르신들의 글
사람 사는 향기 담고 있기에 뭉클
문자 해독 잔잔한 기쁨도 느껴져
노년의 아름다움은 배움에 있어

그분들이 쓴 글을 읽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했다. 더러는 받침이 틀리고 사투리가 심해 해독이 어려운 문장도 있었지만 글 곳곳에는 생애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 ‘까막눈’으로만 살던 서러움을 떨쳐버리고 ‘문명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자부심이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전북노인복지관에서 출품한 한외순 할머니의 ‘옛날생각’이란 시는 단 여섯 줄이었지만 그 어떤 유명한 시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서른세 살에 혼자되었어요 /눈이 오고 비가 오면/ 먹을 것이 없어 울었어요/ 옛날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요” 서른세 살에 혼자된 여인이 자식을 데리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삶의 풍파가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금암노인복지관의 이화자 할머니의 글 또한 문장이 아주 짧다. 문체도 ‘~입니다’에서 갑자기 ‘~이다’로 바뀌는 등 통일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표현 속에 핵심은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는 파주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식구는 칠남매입니다. 저는 69살입니다. 저는 공부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못 갔다. 저는 21살에 진주로(에서) 결혼을 했다. 남편하고 농사를 지었다.”

몇 줄 되지도 않는 문장에서 ‘~입니다’가 ‘~이다’로 바뀌었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글을 구상하고 구상한 글을 다듬고 오자가 나지 않게 머릿속에서 짜 맞춘 다음 손으로 쓰기까지 글 쓴 사람이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오로지 글자를 틀리지 않게 쓰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문체까지 신경 쓸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화자 할머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분들의 글에서 문체가 혼합되어 있었다.

서원노인복지관의 이옥순 할머니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글은 제법 길다. “어린 시절은 시운을 잘못 타서 고생이 많은 삶이었다. 삼례에서 태어났고 12살에 해방이 되어 태극기 들고 만세도 불렀다. 그리고 16살에 육이오가 발생, 미국 사람이 무서워 며느리와 딸을 보호하기 위해 모악산 밑으로 이사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고 19살 섣달에 중매로 얼굴도 안보고 시집을 갔다. 8남매 낳고 먹이고 이피고(입히고) 가르치고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잘 살고 팔순이 되어 자식들 성화에 잔치도 하고 일이 없으면 노인이라 지금은 복지관에 가서 점심도 먹고 한글 배우는 재미에 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시가 생각납니다.” 나 또한 8남매 막내로 자란 탓인지 이옥순 할머니의 글이 마치 나의 어머니의 글 같다. 마지막에 인용한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는 내가 어렸을 때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애송했다. 글자를 읽지 못했던 이옥순 할머니도 그 시는 외우고 있으셨나보다.

어떤 분은 한글을 단순히 읽고 쓰는 수준에서 벗어나 검정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한 분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무슨 이유로 칠순이 넘고 팔순이 되어서도 한글공부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서원노인복지관의 박옥자 할머니의 글에서처럼 “공부에 열을 내면 늘근(늙은) 친구들이 이제 배워 뭣할려고?”라고 하면서 비웃음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글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를 안골노인복지관의 신영옥 할머니의 글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가나(난)해서 짚으로 사내키(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짰습니다. 나무도 하였습니다. 밥도 하고 아기도 보고 보리도 갈았습니다. 머스마(사내)들이 하는 일도 가리지 않고 하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사(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열여덟사(살)에는 공장에 다녔습니다. 꿈 많고 아름다운 열여덟살 때 나는 공장을 다녔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던 때보다는 편했지만 공장에서는 글을 모르니 답답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때 글을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집에 있는데 어머니들이 복지관에 가면 한글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글을 몰라 답답한 마음을 이제는 풀 수 있을까 싶어 결석도 하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글도 잘 읽고 이렇게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행복합니다.”

문자해독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글이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선너머복지관의 김금순 할머니처럼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한 공부를 너무 늦은 나이에 배우려고 하니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라고 한탄을 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혼자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글을 썼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기 그지없다’고 뿌듯해하신다.

할머니들이 쓰신 글을 읽고 있자니 내가 맨 처음 일본어를 공부하던 때의 경이로움이 되살아났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깨우치고 나자 그때까지는 순전히 그림으로만 보이던 글자에 뜻이 보였다. 불어도 중국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경이로움 역시 지금은 그림으로만 보이는 산스크리트어나 아랍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글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도 듣고 공자님 말씀도 들으며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즐거움. 앞으로 내가 누리고 싶은 노년의 행복이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진짜 행복한 노년의 모습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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