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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우팔리와 계율-하

기자명 이제열

일체 만물 공함 깨닫는 것이 최상의 지계

“‘우팔리님, 망상은 더러움이고 망상 없음은 깨끗한 것입니다. 전도와 자아에 대한 집착은 더러움이고, 전도와 자아에 대한 집착 없음은 깨끗함입니다. 모든 법은 생기고 멸하여 잠깐도 머물지 못하는데 망령된 견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물속의 달, 꿈, 아지랑이, 거울 속의 영상과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모든 법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을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이라 합니다.’ 유마거사가 이렇게 말하자 두 비구는 ‘훌륭하십니다. 지혜로운 이여!’라며 유마거사를 칭찬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므로 그에게 병문안을 갈 수 없습니다.”

죄업으로 괴로워하는 승찬에게
혜가가 죄의 공함 일깨워줬듯
공성 깨달으면 죄에서 벗어나
윤리·도덕까지 부정한 건 아냐

유마거사는 우팔리존자에게 죄의 본성은 공이기 때문에 안과 밖과 중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죄는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에 머물러 죄라는 가책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를 기억하고 있는 마음은 실체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는 마음 자체도 역시 죄의 성품처럼 공이기 때문에 역시 찾을 수 없다.

이 같은 죄에 대한 입장은 중국선종사에도 그대로 반영돼 죄지은 사람이 지나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친다. 중국 선종의 3대 조사인 승찬 스님은 어려서부터 문둥병을 앓았다. 승찬 스님은 혜가 선사를 만나 자신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게 된 것은 전생의 죄업 때문이니 부디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권청하였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혜가 선사는 그대의 죄를 가져 온다면 사해주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승찬 스님은 자신의 죄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승찬 스님은 혜가 선사에게 죄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얻을 수가 없었다고 답하였다. 혜가 선사는 그렇다면 이제 그대의 모든 죄는 참회하여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승찬 스님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죄가 본래 공하여 있지 않음을 깨닫고 혜가 선사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다.

대승에서는 세상의 더러움과 깨끗함이 모두 중생의 마음에 의해 나타난다고 설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이 더럽다는 것은 비단 마음이 욕망에 물들여져 있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좀 더 깊게 말해서 마음이 망상과 전도와 자아에 대한 집착에 물들여져 있는 상태를 뜻한다. 만약 중생의 마음에 망상과 전도와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세상은 깨끗하게 나타난다.

‘유마경’을 읽다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환과 같고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는 구절이다. 일체만법은 인연을 빌려 나타난 거짓 모습이라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거울속의 영상이 스스로 생기지 못하고 산골짜기의 메아리가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만법이 인연을 빌려 나타난 도리를 공(空)이라 표현한다. 공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지금 다루고 있는 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죄 역시 인연으로 나타난 공성이라 환이며 꿈이며 아지랑이 같아서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가 죄를 죄로만 본다면 그는 망상에 빠져 있는 자이며 전도된 자이며 자아에 집착하는 자이다. 아무리 우팔리존자처럼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해도 일체 만법의 공성을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을 완성했다고 볼 수 없다. 법의 공성을 깨닫는 일이야 말로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며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유마거사가 공성을 설하고 중생에게 죄가 본래 없음을 밝혔다고 하여 그가 인과를 무시하고 윤리와 도덕을 부정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인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른다면 유마거사는 죄의 공성을 함부로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의 공성은 인과를 믿고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에 대해 괴로워할 때에 설해지는 법문이다. 부처님 당시에 선성(善性)이라는 비구가 음행을 하면서 이대로가 공하므로 난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큰소리 쳤다가 지옥에 떨어졌다. 이는 죄가 공하다하여 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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