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용과 무명사

2004-08-10     법보신문
우연히 동승한 차가 안내

절입구 길 양쪽에 토란잎들

푸른 빛과 낯선 꿈 그리고 작은 절


기억속의 절에는 토란이 피어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저녁 어스름도 이제 막 사라져 갈 때. 조수석에 태운 낯선 여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정말이지 제 삶이란 무슨 감옥 같아요!"

방금 전에 길가에서 손을 들어 내 차를 멈춰 세웠던 이 여자가 지금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밑도 끝도 소리에 다소 당황했지만 나는 운전만 했다. 무모한 선언과도 같은 이 여자의 발언은 어쩌면 음탕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반응이 없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다. 하지만 지금 흐르는 이 침묵은 아무래도 내게만 당혹스러운 듯싶다.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다. 그녀 쪽을 쳐다보며 나는 혼잣말로 이제야 대꾸한다.

'그래요?... 꿈이었나요? 저는 지구가 감옥 같답니다.'

차창 밖으로 가로수들이 막 지나간다. 그저 걷다가 이 세상에서 문득 사라지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걷고 걸었었다.

십년 전쯤 울진 불영사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가 내 곁을 지나다 차를 세웠다.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나는 따로이 갈 곳이 없었으므로 그 차에 동승했다. 그는 제천 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잠들어 버렸나보다. 깨어보니, 차 안에는 나만 남겨져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지만 푸른 빛이 아직 하늘에 남아있었다. 고요하고 고요하여 세상 밖 풍경인 듯 주변이 온통 그 우주 빛 속에 잠겨 있었다.

차 안에서 잠든 동안 나는 낯선 꿈을 꾸었었다. 꿈속에서는 하얗고 작은 코끼리 한 마리가, 내 곁에 누워 곤히 잠을 잤다. 천하의 거지처럼 돌아다니던 나도 그 짧은 꿈속에서 아주 평화롭고 긴 잠을 잤다.

푸른빛과 꿈속에서 내가 갓 정신을 차릴 때쯤, 바람 따라 저만치서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오솔길 너머 작은 양철지붕 집이 보였다. 그 길 양쪽으로 곱게 자라난 토란잎들이 바람에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누가 말을 건넨다.

"놀라셨군요? 잠시 이 절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너무 곤히 주무시기에 안 깨웠습니다.."

이곳까지 나를 실어다 놓은 사내였다. 담배를 한 대씩 폈을까. 차는 바로 다시 출발했다. 큰 길에 나와서 한 굽이를 돌았을까. 밤하늘에 이미 떠오른 별들은 그 절이 있는 쪽으로 무슨 우주의 점자(點字)들처럼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암호 같은 그 점자들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로 다시는 그 절을 찾을 수도 없었다.

커다란 배낭을 껴안은 채, 지금 내 차에서 시달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는 이 여자,

어쩌면 이 여자가 그리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유성용(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