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욕망의 불꽃이 실타래처럼 얽힌 한 참된 자유란 불가능

2011-02-22     법보신문

“삶은 삶에 맡기고 죽음은 죽음에 맡겨라(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벽암록)


선 수행자의 사물에 대한 판단은 깊고 짧다. 일단 판단이 끝나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돌격한다. 이 판단과 행동력은 능률적이며 매사에 쉽게 몰입할 수가 있다.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쉽게 몰입할 수가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히 하고 또 놀 때는 철저히 노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상 철저히 살고 또 죽어야 할 때는 자취마저 없이 죽어버린다. 죽은 듯한 삶, 사는 듯 마는 듯한 죽음의 불철저는 선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금물이다.


선 수행자는 무(無)로서 비워진 상태다. 그러므로 선 수행자는 자유인이다. 그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해탈인이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이 세상을 일러 ‘불타는 집(火宅)’이라 한다. 이 갖가지 욕망의 불꽃과 그에 따른 갖가지의 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여기 속박되어 있는 한, 참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왜냐. 그것은 자유를 빙자하여 명예욕, 물욕, 정권욕, 그 밖의 자질구레한 욕망에 묶여 있는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이름도 모른다, 돈도 필요 없다, 내 목숨도 가져가라는 식의 초연함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세상에 이런 머저리가 다 있나 싶게 화가 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욕망에 찌든 이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머저리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저 무한창공의 그 비상력과 자유를 얻은 자가 가는 기쁨에의 길인 것이다. 현실 사회와는 동떨어졌다느니 그렇게 되면 살 수가 없다느니 이런 잠꼬대를 집어치울진저. 필요 없다고 모두 버리면 그때야말로 돈도 오고 명예도 오고 사랑도 온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것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천지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석지현 스님
들끓는 욕망, 그 번뇌의 근원을 잘라버린 자가 아니면 참된 자유인은 될 수 없으며, 또 사실 자유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망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