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코끼리와 불교적 비판 방법
자신을 해치려는 사냥꾼에
흰 코끼리 모든 것 보시
삿대질 문화론 모두 불행
현대사회에서 논리적 사고는 으뜸의 가치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이성과 논리가 늘 효용성이 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합리적 사고의 결정체인 학술서보다 허구임을 뻔히 알면서도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합리적이라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신화의 언어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비현실적인 언어가 실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장엄론경’과 ‘육도집경’ 등에 나오는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 이야기도 그렇다.
인도의 비데하국 왕비가 어느 날 상아가 여섯인 흰 코끼리 꿈을 꾸었다. 그 상아가 너무 갖고 싶었던 왕비는 왕을 보채 나라 곳곳에 흰 코끼리를 발견하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는 방을 붙이도록 했다.
그런데 정말 히말라야 산 깊은 곳에는 여섯 개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살고 있었다. 성불하는 게 꿈이었던 흰 코끼리는 예전에 사냥꾼을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 사냥꾼은 흰 코끼리의 상아를 가져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냥꾼은 흰 코끼리가 수행자들을 지극히 공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가사를 걸치고 품에 독화살을 감춘 그는 산으로 들어가 흰 코끼리에게 접근했다. 흰 코끼리는 그가 자신을 죽이러 온 사냥꾼임을 알았지만 가사를 걸치고 있었기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사냥꾼은 그때를 놓칠세라 독화살을 쏘았다.
독화살에 맞은 흰 코끼리는 곧 자기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이때 가사를 걸친 인간이 수행자가 아니라 사냥꾼임을 알아차린 다른 코끼리들이 달려들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흰 코끼리는 사냥꾼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데려간 후 그가 상아를 탐내고 있음을 알고 스스로 상아를 큰 나무에 부딪혀 부러뜨린 후 건네주면서 말했다.
“내가 부처가 되면 제일 먼저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화살을 빼주겠노라.” 이 말과 함께 흰 코끼리는 스스로의 머리를 세게 부딪쳐 죽었다. 상아를 일부러 준 것처럼 자신이 독이 퍼져 죽으면 사냥꾼에게 살생의 업이 더 보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설화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사냥꾼은 살생과 거짓과 남의 것을 훔치려는 사악한 인물의 표본이다. 그럼에도 흰 코끼리는 피하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가사는 공덕을 쌓는 공덕의(功德衣)이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解脫衣)이며, 세속을 벗어나는 출세복(出世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냥꾼이 가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적인 비판은 고성과 삿대질에 있지 않다. 흰 코끼리가 그리했듯 사람이 아닌 가사와 승단을 봐야 한다. 존중의 비판문화로 바뀌어야 교단도 불자도 당당해질 수 있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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