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면 좋은 일만 생길까?
어떤 사람이 욕을 했다고 해 보자. 이 세상 그 수많은 인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욕한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괴로운 상황이거나 어떤 특수상황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상황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관점이 있으니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욕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이 한 욕을 받고는 화를 내고, 열 받아 하고, 크게 심각하게 여기고, 휘둘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사실 나에게 욕한 사람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욕설을 듣고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면서 실체화하고, 그 욕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수행은 마음공부일 뿐
외부경계 바꾸지 못해
다만 수행을 하게되면
경계에 흔들리지 않아
사실 누가 욕을 했지만, 그 사람이 아무에게나 욕하는 정신이상자라면 그 욕을 듣고도 그러려니 하며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욕하는 장면이 나와도 괴로워하지 않고, 타인들끼리 욕하는 것을 볼 때도 우리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욕설에 아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힘을 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이라는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괴로운 경계인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한다면, 그 사람 입으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 주어보라. 내가 그 사람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마음에 안 든다고 일일이 싸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을 허용해 주자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을 하면 갑자기 나를 욕하던 사람이 더 이상 욕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수행을 하든 안 하든, 심지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욕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욕을 할 것이다. 다만 수행을 하면 이제부터 더 이상 그 상대방의 욕이 나를 타격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계속 욕을 하겠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욕이 아니다. 그 말 뜻에 휘둘려 그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소리 에너지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도록 허용해주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말 뜻과 의미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의미 너머의 본바탕에 계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텅 빈 배경에 주목하는 것이다.
수행은 마음공부라고 하듯, 전적으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공부이지, 내 외부경계를 바꾸는 공부는 아닌 것이다. 마음공부가 되어갈수록 외부의 경계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 좋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바깥 경계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외부경계의 실체성이 사라지고, 심각해하지 않게 되며, 그것은 마치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들일 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일어나지만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외부가 곧 내부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되기에, 나를 괴롭힐 그 무엇도 없음을 안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