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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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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
등록일
2020-03-01 16:59:32
조회수
484
-석종사(釋宗寺) 기행-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석종사에 가면 놀랄 게 너무 많다. 금봉산(金鳳山)아래 10만 평의 드넓은 터에 들어선 웅장한 도량의 크기에 놀라고, 화엄경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의상 스님 법성게(法性偈) 30구 210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으로 돌에 새겨 조성한 ‘화엄(華嚴)공원’의 보이지 않는 법력(法力)에 놀라고, 하늘 향해 날아갈 듯 솟아있는 천척루(千尺樓의) 날렵한 자태에 놀라고,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의 대웅전의 아름다운 건축미에 놀라고, 그 안에 조성된 불상의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에 놀라고, 단청의 화려한 색채미에 놀라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인 동강 조수호 선생의 빼어난 필체로 한층 돋보이는 주련(柱聯)에 놀라고. 하지만 여기까지의 놀라움은 다분히 물질적이고 형태적 미감이 주는 놀라움일뿐. 그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정신적 놀라움은 따로 있었으니. 이제 대학을 갓 졸업했을까? 스물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콧날은 우뚝하고 촛불에 반사되어 빛나는 눈망울이 더없이 선해 보이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큰아들 같은 인상의 젊고 앳된 행자 스님 한 분. 세속의 모든 욕망 헌신짝처럼 버리고 구도의 높은 뜻 가슴에 품고 출가했겠지만 참된 진리 찾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 아직 수계도 받지 않고, 일정 기간 빨래 청소 밥 짓기 물긷기 등 절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속인의 눈에 비친 행동거지와 말투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고 지극하기 이를 데 없다. 큰 스님들 저녁예불 준비를 하고 있던 그 행자스님은 낯선 방문객이 들어선 줄도 모른채, 대웅전 불단의 촛불을 환히 밝힌 후에, 겨울이라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여러 개의 방석을 깔아놓고 있었는데, 나 같았으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툭툭 던져놓고 말았을 법도 하건만, 어찌나 반듯하고 조심스럽게 상하좌우 줄을 맞추어가며 가지런히 놓던지 마치 석수장이가 한 장 한 장 돌을 놓듯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 방석 위에서 기도를 하다보면 본래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 바다를 어지럽히는 삿된 번뇌 따위 절로 사라질 것만 같다. 일하는 모습을 한참 소리없이 지켜보다가 이윽고 스님을 향해서 합장하고 절을 올리자 스님은 나보다도 더 허리를 굽히고 몸을 낮추어 절을 하고 나서는, 어디에서 오셨느냐며 반갑게 환대해 주시더니 석종사의 창건내력까지 자세히 설명해주는 게 아닌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했던가.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비울 줄 아는 저 마음이라면 그 어렵다는 불도(佛道)를 언젠가는 능히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놀라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돌아가실 때 밤길 운전 조심하라는 스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대웅전을 나와 종무소 쪽으로 내려오는데 전조등을 밝힌 차량 한 대가 들어와 주차를 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 산문의 인적이 다 끊겼는데 누가 절을 찾아올까 하는 호기심에 눈길을 돌렸더니 웬 노스님 한분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멀리 출타 중이시라던 혜국 큰스님이 혹시 돌아오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유투브 영상을 통해 날마다 불법의 가르침을 전해주시던 그 혜국 큰스님이, 이 세상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내 앞에 떠억 서계시며 나를 맞는 게 아닌가. 하,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13살 어린 나이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수행정진을 계속하다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동안 장자불와하면서 하루 5천배씩 절을 올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오른손 세 손가락을 연비해 가면서까지 깨달음을 얻고자 하신 이 시대 대표적 선지식(善知識)을 직접 친견할 줄이야. 단아한 체구에 형형한 눈빛, 법문하실 때의 천하를 호령하는 듯한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어디에 감추셨는지 따듯하고 정감어린 음성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며 장갑도 끼지 않아 차갑기만한 중생의 손을 부처님처럼, 아니 어린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처럼 아무 망설임없이 덥석 잡아주시는 게 아닌가.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따로 법을 청할 수도 없고 결국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작별하려는데, “공양간에 가셔서 꼭 공양들고 가이소.”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공양간에 가셔서 꼭 공양들고 가이소.” 스님이 거듭 건네주신 그 말씀 한 마디에,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공양을 먹지는 못하고 내려왔지만 앞으로 며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내내 배가 부를 것만 같았으니 이 어찌 희유(稀有)한 경이(驚異)가 아니겠는가. 머리끝에서 내린 물이 발치까지 간다했던가. 그러고보니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있어 더욱 빛나는 자비 도량, 놀라움에서 시작하여 놀라움으로 끝난 석종사 기행이었다. 나무석가모니불.
작성일:2020-03-01 16:59:32 118.218.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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