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운문산 대각선사(大覺禪寺·운문사) 끝 운문산 대각선사는 근대에 복원, 운문문언 스님의 종풍을 잇고 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마른 똥막대기다.(乾屎厥)”“석가여래께서 생존하시던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대중이 너무 오래 섰으니, 속히 세 차례 절을 하라.”“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입니까.”“소주(蘇州)의 마황(麻黃)과 익주(益州)의 부자(子)니라”“어떤 것이 선(禪)입니까”“노주(露柱)가 개구리를 삼키느니라.” 중국 선불교에서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과 더불어 선가오종을 형성했던 운문종의 원류 운문문언 스님은 학인들을 제접함에 있어서 이렇게 짧은 어구로 대답하고 지도했다. 운문(雲門·864∼949) 스님은 소주 중오부의
9. 임제사(臨濟寺) 임제사에는 특별하게 남아있는 유물이 없다. 임제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의발탑만이 외롭게 서있다. “황벽이 뭐라 가르쳐 주던가” “조사가 오신 적적한 뜻을 세 번이나 물었으나, 매번 매만 맞았습니다. 제게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황벽이 그렇게 그대를 위해 노파심(老婆心)으로 애를 썼는데 아직도 허물을 찾다니” “(임제는 이 말에 크게 깨닫고)그의 불법에 아들이 얼마 안 되는 구나”라고 했다.대우 스님이 “아까는 모르겠다 하더니, 이제는 또 얼마 안 된다 하니 이게 무슨 짓이냐”하고 호통을 쳤고, 동시에 임제가 한 대 갈기니 대우 스님이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내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잡았던 임제의 옷깃을 놓았다. 임제가 황벽
8. 백림선사(柏林禪寺) 백림선사 관음전 앞엔 잣나무가 아닌 측백나무가 조주종심선사의 선풍을 알리고 있다. “어디서 왔느냐?”“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고, 누워 있는 여래를 보았습니다.”“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누가 너의 주인이냐?”“정월이라 아직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존체 만복하소서.” 어린 나이에 고향 조주(曹州)의 용흥사로 출가한 이후 경과 율을 익히는 대신 참선을 하며 여기 저기 총림을 두루 돌아다니던 조주종심(趙州 從·778∼897) 스님이 남전보원 선사를 찾아 나눈 첫 문답이다. 마조의 법을 이은 남전은
7. 남화선사(南華禪寺)·국은사(國恩寺) 조계문은 혜능 스님의 행화도량인 조계산 남화선사에서 육조의 돈오법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혜능 스님이 육조단경을 설한 소관시 대감사에서 20km 가량 떨어진 광동성 곡강현 마패진에 스님이 40년 가까이 주석하며 법을 설했던 조계산(曹溪山) 남화선사(南華禪寺)가 있다. 사찰 인근이 조 씨 집성촌이었던 이유로 조계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 때문에 남화선사를 품에 안은 뒷산과 사찰 앞을 가로지르는 냇가도 조계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이름이 혜능 스님이 주석했던 조계산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혜능 스님이 주석한 이후 조계가 선의 근원을 상징해왔음을 알고 있는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6. 광효사(光孝寺)·대감사(大鑑寺) 광효사는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도량이다. 중국 최초의 보리수와 의발탑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주창했던 육조 혜능(638∼713) 스님은 광동성 신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이 노씨 속명이 능이었던 혜능은 세 살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자라서는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혜능은 24세 되던 해 어느날 손님을 따라 갔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5조 홍인 화상이 『금강경』을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했다”는 손님의 말에 그날 밤으로 어머니가 홀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5. 오조사(五祖寺) 선종사찰순례단이 오조사 입구 좌우 문 위에 걸린 신수 스님과 육조 혜능 스님의 게송을 바라보고 있다. 호북성 황매현 시내와 쌍봉산을 잇는 길에서 4조 도신 스님을 만나 동진 출가하여 중국선종의 법을 이은 홍인(601∼674) 스님. 일곱 살 때 도신 스님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의 성 씨가 ‘불성’이라고 했을 정도로 남달랐던 홍인 스님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기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주 씨 성을 썼다. ‘불법을 깨쳐 널리 펴 보이겠다’는 전생발원을 인연으로 남다르게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홍인은 법을 이어 받은 후, 전생발원을 실현하고자 쌍봉산을 내려와 황매현 동쪽의 빙모산으로 자리를 옮겨 654년에 빙모산 백련봉에 오늘날의 오조사가
4. 사조정각선사(四祖正覺禪寺) 도신 스님이 법을 폈던 사조정각선사는 최근 복원돼 옛 모습을 되찾았다. 오른쪽 전탑은 도신 스님의 진신상과 신라 법랑 스님의 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탑. 사조정각선사(四祖正覺禪寺)와 오조선사(五祖禪寺)가 자리한 호북성 황매현은 2조의 사공산, 3조의 천주산과 불과 100리 길이며, 2조 혜가에서 5조 홍인까지 법을 이어 100여 년 동안 선을 중흥시킨 곳이어서 ‘선의 황금 삼각지’로 불리고 있다. 도신(道信·580∼651) 스님의 속성은 사마씨다.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에서 태어나 일곱 살 나이에 동진출가했으나, 스승의 계행이 바르지 못함에 고심하던 중 14세에 사미의 몸으로 천주산에서 수행하던 3조 승찬대사를 찾게 되었다. 승찬대
3. 산곡사(山谷寺·삼조사) 삼조사 주지 관용 스님을 비롯해 30여 명의 대중이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2조 혜가 스님은 승찬(僧璨)에게 “여래께서 법을 가섭에게 주셨고, 그렇게 차츰차츰 전하여 나에게 이르렀는데 내가 이제 이 법안을 그대에게 주고 아울러 가사를 주어서 법의 신표로 삼겠다”며 법을 전하고, “본래 인연 있는 땅에 땅을 인해 종자와 꽃이 난다. 본래 종자가 없으면 꽃도 나지 못한다”는 게송으로 전법의식을 마쳤다. 2조 혜가 스님 곁에서 2년여를 시봉하며 병도 치유하고 법맥을 받은 승찬 스님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양자강을 건너 안휘성 안경시 잠산현 천주산의 건원선사(乾元禪寺)에 이르러 토굴로 들어가 수행에만 매진했다. 건원선사는
2. 이조암(二祖庵) 소실산 발우봉 이조암은 법당 하나가 전부라고 할 만큼 형색이 초라하다. 달마대사는 서토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너희들은 얻은 바를 말해보라.” “제가 보기에는 문자를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고 도를 삼는 것입니다.”(도부)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제가 알기에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에 단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총지)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있지 않으니,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습니다.”(도육)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이때 혜가 스님은 말없이 다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자기 자
1. 소림사(少林寺) 우리의 일주문 정도에 해당하는 패방에 새겨진 ‘숭산소림’이라는 글자가 소림사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재가불자들의 간화선 수행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선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중국 선종사찰 순례단을 구성, 3월 5∼11일까지 소림사에서 운문사까지 중국 선종사찰을 순례했다. 50여 명의 재가불자들이 참여한 순례길을 함께 했다. “내가 즉위한 이래 오늘까지 많은 절을 짓고, 많은 경전을 사경하고 또 수많은 승려에게 공양을 해왔소. 이 모든 것들이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소?”“전혀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아무 성스러울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