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옥천사에 이르니 ‘장산(萇山) 옥천사(玉泉寺)’라는 편액과 함께 일주문 양 기둥에 걸린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산색문수안 수성관음이(山色文殊眼 水聲觀音耳)’. 직역하면 ‘산빛은 문수보살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보살의 귀로다’일 터. 팔만사천대장경에 담긴 금과옥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에도 백졸 스님은 왜 이 경구를 새겼을까? 일주문 사이에 걸린 현수막이 초겨울 바람에 나부낀다. ‘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 대웅전에 들어서니 수미단이 이색적이다. 상단엔 ‘육조단경’, 중단엔 ‘신심명’, 하단엔 ‘보현행원품’
11월15일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와 성균관대가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진행한 21세기 전통 차 진흥을 위한 대토론회에는 200여명의 차인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전통 차 문화의 의미와 전망’을 주제로 현대 한국사회에서의 전통 차 문화가 어떻게 태동되었는지, 커피 문화에 밀려 있는 차 문화를 어떻게 중흥시킬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 펼쳐진 뜻 깊은 자리였다.일타 스님 은사로 출가해‘염화미소’ 화두들고 정진1990년대 보스턴 등지에문수·보현사 개원해 포교봉암사 산문폐쇄 첫 단행법난 당시 총무원서 수습70년대 정·재·문화계 교류한국차인
‘선사는 범패를 잘 불렀다. 옥을 굴리는 듯한 음조와 상쾌하고 애환 깃든 목소리는 능히 하늘을 환희, 감동케하고 인간의 감정을 오랫동안 부드럽게 하여 천인일체(天人一體)를 이루게 하면서 은은히 울렸다. 마침내 이를 듣고 배우는 자가 항상 당(堂) 안을 꽉 메웠다.’산사에 울린 범패 소리에가슴 뭉클해 14세에 출가어산작법 초대학교장 맡아 15년간 260명 후학 양성아버지 일응 스님 가르침“풍각쟁이는 되지 말아라”의례 속 의미 이해한다면의식의 숭고함 더해질 것30명 기숙·교육시설에서선생 노릇하다 가고 싶어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짓고 쓴
경주 기림사(祇林寺) 주지를 맡았던 종광 스님은 몇 해 전 ‘물소리 좋다’며 계곡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솔향기 진한 숲 속에 ‘지족암(知足菴)’ 세워 놓고는, 이 절경 속에 암자 하나만 있는 게 못내 아쉬웠던지 암자 옆 오솔길 끝에 수계정(水溪亭) 하나 더 세웠다. 토함산서 시작된 물은 계곡 따라 내려오다 지족암과 기림사를 거쳐 세간으로 나간다. 석굴암 부처님 말씀 또한 물길에 얹혀 흘러오는데, 팔만법음 한 소절 건져 올려 다관에 담아 음미해보려 이 수계정을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월산은사 출가·학봉은사 전강 서옹·일우 법석에서 임
일본의 조동종 개산조 도겐(道元, 1200∼1253)선사가 쓴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세상에 나온지 7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선의 나침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정법안장 95권’ 전권을 한국어로 완역한 책은 없다. 그 연유야 확연히 알 수 없지만 95권이라는 방대함만으로도 범접하기 어려운데 ‘도겐의 선지와 사상’까지 통찰할 수 있어야만 읽어낼 수 있으니 번역을 한다는 게 그리 녹록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어머니 병을 고치기 위해초등학교 6년때 관음기도청년시절 지장기도 매진정토연구·염불의 길 걸어日유학 중
현재 한국 선화계를 이끄는 선두 주자는 양산 문수원의 수안 스님이다. 선화에 깃든 예술적 품격과 가치를 한국은 물론 일곱 번의 해외 전시를 통해 유럽과 러시아에 유감없이 전한 인물이 수안 스님 아닌가.그런 수안 스님에 대해 누군가 필자에게 물어온다면 장황한 설명은 걷어치우고 1985년 세간에 선보인 수안 스님 시집 ‘오소라’ 가운데 한 편을 보여주고 싶다. 스님이 1981년 10월 부산 전시회를 열며 전한 초대의 글 ‘오소라’ 전문이다.10대 생계위해 가구점 들어가허드렛일 도우며 목공일 배워인곡스님 인연으로 18세 출가무자 화두로
속리산 복천선원장 진옹 월성(震翁 月性) 스님은 최근 역대 한국선사들의 오도·열반 경지를 표출한 ‘오도에서 열반까지’(사유수)를 선보였다. 책 ‘머리말’ 끝에 새겨진 한 줄이 복천암으로 향하게 했다. ‘오늘 하루도 눈 뜨면 오도송을, 눈 감으면 열반송을 부르는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스님 된 친구 부처님 자랑에덕숭좌장 금오 스님에게 출가‘까까중’ 놀림 견뎌내며 탁발스승 말없는 법문 ‘하심’ 체득사형 탄성 당부에 복천암 맡아40년간 머물며 선객들과 정진신미대사 자료수집·연구 매진한글창제 주인공 세상에 알려한 사람 걸을 만한 오솔
청량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계곡물 소리 따라 숲길을 오르니 그 끝에 용문선원이 서 있다. 선원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말 그대로 절경이다. ‘잉어’ 한 마리가 이제 막 용이 되어 상원사를 넘어 가려는 듯, 모든 산 줄기가 상원사를 향해 힘차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대학재학 중 방황 끝에 출가노스님들, 상원사 복원 당부문헌 찾아 선원 등 불사착수조계종 청규 실천도량으로 화두를 들었단 이유 하나로 잡초 하나 뽑지 않는 관행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돼농촌일손·노인돕기도 수행 70세 노인수좌 갈 곳 없어요양설비 갖춰진 선원 절실송담·오현스님 복
1980년대 초반, 미타사가 자리한 서울 옥수동에 30여명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단국대 불교학생회 소속의 그들은 골목 어귀마다 현수막을 걸더니 거리거리 골목마다 손수 제작한 포스터를 붙였다. ‘미타어린이법회 모집!’ 이내 300여명의 신도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900여년 전통의 고요하던 미타사에 젊은 활기가 넘쳐났다. 열여덟의 사미 정수암 맡아도심포교 핵심 사찰로 우뚝IMF 한파속에 복지관 위탁지역주민 화합 토대 급성장 전생에 복 지어야 승복입어스승 한마디 뼈에새겨 정진반평생 동행 사제 종일스님인생의 최고 도반이자 스승 무관심·
단언컨대 역대 봉축법어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부처님 법은 중생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고, 실제적인 이익과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불교는 냉철한 합리적 사고와 행동을 멀리하고 마음만 깨치면 그만이라는 ‘깨침의 신화’에 매몰돼가고 있습니다.”이타(利他)를 외면한 채 자리(自利)만 구하고 있지 않느냐는 광주 원각사 회주 현고 스님의 촌철살인이다.송광사 구산스님 은사로 출가조계총림 사격 조성한 주인공불교환경·사회복지 지평 열어템플스테이 처음 착안해 실행성직자는 진리 실천하는 사람관념적
‘착하게 살아라’ 강박 관념‘내려 놓아라’에 풀려 발심‘공부하다 죽어라’ 혜암선풍달마선원 대중과 함께 진작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미즉생멸심·迷則生滅心)/ 깨달으니 진여성이네(오래진여성·悟來眞如性)/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부수니(미오구타료·迷悟俱打了)/ 해가 돋아 하늘과 땅 모두 밝도다(일출건곤명·日出乾坤明).’‘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아신본비유·我身本非有)/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무쇠 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철우함월주·鐵牛含月走)/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석사대효후·石獅大哮吼)’원당
경기도 화성 태봉산 자락에 자리한 무우사(無優寺)를 오르는 산길은 의외로 깊었다. 도심 한 복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작은 산이지만 우거진 숲이 전하는 고즈넉함은 여느 산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 그 산길을 오르며 뜬금없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원제. All The Names)’가 떠오른 건 ‘무우사’라는 특이한 사찰명 때문이리라. ‘세상 만물 각각에 이름을 부여한 건 인간이다. 제대로 지어놓기나 한 것일까? 혹 그 이름으로 인해 그 존재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나?’하는 의문과 동시에 ‘이름이 있기에 새로운
범어사 교수사 홍선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휴휴정사를 3월 봄비가 촉촉이 적시고 있다. ‘쉰다’는 건 쉬운데, 쉬고 또 쉰다는 ‘휴휴(休休)’는 어렵다. ‘휴거헐거(休去歇去)하면 철목개화(鐵木開花)’할 것이라 했지만, 어떻게 ‘쉬고 또 쉬어야’ 쇠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를 알 수 있을까? 스님이 손수 차를 내는 사이 슬며시 여쭈어 보았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쉴 일 없습니다.”‘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한 마디라도 전할 법한데 아니다. 차 한 잔 따르던 스님이 책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길 한 번 보라는 뜻일 터. 책상에 수
법륜사에 하얀 눈이 잠시 날렸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려 있어서일까? 도심사찰이라기 보다는 산사 느낌이다. 해월 선래 스님이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도 ‘탁’ 하니 펼쳐진 경치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선래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를 ‘학소대’라 이름한 연유가 능히 짐작 간다.출가 전 선래 스님이 고등고시를 패스해 ‘세상을 호령해 보겠다’며 운달산 김용사로 들어간 건 1957년. 시간 날 때마다 사찰업무를 봐 주던 청년은 종무일로 서울 총무원에 갔다 동산 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 눈에 보아도 거목임을 직감했다. 동산 스님 역시
조계종 최초 비구니 강원은 현 동학사 승가대학이다. 대강백이었던 경봉 스님을 초빙하며 강원 문을 연 것이 1956년이니 58년이라는 역사가 스몄다. 현재 강단에 서 있는 비구니 강주 중 동학사 강원을 나오지 않은 스님이 없을 정도다. 그 자긍심 실로 클 터.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동학사와 강원의 역사를 오늘 날까지 이끈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일초 스님이다. 일초 스님은 1980년대 중반 주지를 맡으며 대작불사를 일으켰다. 지금의 동학사 사격은 그 때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초 스님의 향훈(香薰)은 동학사에
금강암이 자리한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렸다. ‘저 산만 넘으면 우리 집’이 있을 게 분명했다. 초등학교 1학년 ‘영수’는 대웅전을 지나 산으로 향했다.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내가 살던 마을이 아닌데….’ 다시 절로 가려 발길을 돌렸지만 이미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호랑이한테 물려 갈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인 소년은 고향에서 자주 보았던 멍게나무 아래 웅크렸다.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으면 호랑이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할머니는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거지?’불과 며칠 전만 해도 소년은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아들아버지 사형 소식 충격에승복 벗고 산사 나와 방황절 신도 손가락질 참을만도반마저 ‘빨갱이 새끼’정부 기관 감시눈길 ‘공포’송담 스님 첫 제자로 출가한과 그리움 시심에 녹여‘500편 낙서’모아 시집 발간격동의 근현대사 고통 껴안고‘원수 갚지말고 은혜 갚아라!’ 도안(道安) 스님의 경책에 따르면 출가란 ‘어버이와 일가친척을 떠난 것이며 세속의 몸치레를 버린 것’이다. ‘쌀 한 톨에도 7근의 시주 은혜가 깃들어’ 있음을 뼈에 새기며 ‘니르바나에 이르려는 수행인’들에게 출가 전의 일을 굳이 캐묻지 않는 이유가
정진 중 폐병에 생사위태은하사 기도 후 완전치유 쇠잔한 산사 30여년 불사명실상부 가람으로 ‘우뚝’ 대통령에 호통치던 동산납자 가슴으로 안은 전강당당·자비 겸비 스님 그리워 애국가 곡조 ‘아리랑’ 적격국화인식 무궁화 재고해야 전 세계인 의식 전환시킬국제선센터 건립 대원력 ▲대성 스님 바다를 향해 우뚝 솟아오른 김해 신어산(神魚山).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가진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누군가 금강산에 비견해 소금강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산을 소금강산이라 했고 그 산자락에 자리한 산사를 금강사라 한 적이 있다. 산자락에 해무라도 드리워지면 기암괴석은 밤하늘의 별처럼
원인모를 병에 ‘고통’살기 위해 남장사 출가 동산 스님 사친서 한 대목에‘마루 닦으라’ 은사 뜻 이해 강원 졸업 직후 선방서 화두스승 뜻 헤아려 ‘지장신앙’ 하루 일종식 수행하며총 6개 사찰 중창·인수 후학 용맹정진 바람 담은두타선원 도락산에 조성 지혜 공장서 불성 녹여계율 틀에 부으면 ‘부처’ ▲묘허 스님 “닦고 나면 안 닦을 때와 어떠하냐?” 또 똑같은 말씀이다. 굳이 제자를 당신께서 머무르는 상주 남장사로 불렀으면 내로라하는 선사들의 일화 한 토막이라도 들려줄 것이지 법당 마루 닦으라며 매일 똑같은 물음만 던진다. “예, 전보다 깨끗해 보입니다.” “그래
8살 때 태국사원 보며‘나는 불자다’ 처음 인식 숱한 종교·철학 찾았지만가슴 속 공허함은 여전 불교 접한 후 환희 눈물티베트 사원으로 곧 출가 12년간 히말라야 동굴서생과 사 넘나드는 정진 여성도 당당한 깨달음 주체비구니 스스로 길 개척해야 ▲텐진 빠모 스님 “비구니 스님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져합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비구니 스님이 가야할 길은 비구 스님이 개척해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유 영역을 확대해 가야 합니다. 비구와 비구니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승가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텐진 빠모 스님의 일성이 조계종 국제불교학교 강단에 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