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릅뜬 두 눈에는 핏발이 서있고, 커다란 이빨은 송곳니처럼 날카롭고, 머리털과 눈썹과 수염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 적황색의 화염상(火焰狀)에, 머리에는 오골관까지 쓴 분노의 신이 악마를 제압하는 모습은 신화에 머물러 있지 않다. 티베트 최초의 사찰인 삼예사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토착교의 방해가 심하자 그 흉신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금강무(金剛舞)로부터 이어져 지금도 티베트의 불교무용인 참(Cham)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중앙아시아의 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샤머니즘과 불교에 각각 연원한다. 불교의식에서는 보다 형식이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재일동포의 삶을 다룬 일본영화 ‘박치기’의 주제곡으로 한국에 알려진 후, 양희은, 적우, 임형주 등이 불러 유명해진 북한노래 ‘임진강’의 후렴 가사이다. 1958년에 발표된 이곡은 북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의외로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제2의 아리랑’이라고도 불릴 만큼 애창되고 있는 곡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을 흐르는 임진강과 분단선을 오가며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소재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이는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처용랑망해사에 따르면 신라 49대 왕인 헌강왕이 환궁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신하(日官)에게 물으니 답하길,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라 하였다. 이에 왕은 근처에 망해사를 세우도록 하였고, 왕명이 내려지자 구름이
무형문화재 58호인 줄타기 명인이 한 다리로 줄을 딛고 앉았다 일어서는 ‘외홍잡이’의 재주를 부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소리꾼과 악사 10여명은 산대에 올라가 잡가 중 서서 부르는 ‘선소리’를 하고, 양주별산대의 탈춤 ‘애사당 법고놀이’로 흥을 돋운다. 이어 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민요와 풍물굿이 이어지자 신이 난 관람객들이 공연장으로 내려와 모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신명 나는 축제를 즐긴다. 2004년 9월, 우리나라 고유의 놀이인 ‘산대희’가 220년 만에 재현됐을 때의 모습이다.조선시대 서울의 애오개와 사직골
청학은 명금, 백학은 분단, 오른쪽 꽃 속에는 복혜, 왼쪽 꽃 속에는 금례. 1795년, 정조가 지금의 수원인 화성으로 행차하였을 때 봉수당에서 열린 의례에서 학무와 연화대무를 춘 기녀들의 이름이다. 이때의 행사를 기록한 ‘정리의궤’에 따르면 이들은 화성에 속한 관기로 학춤을 춘 명금이 32세, 분단이 29세였다. 연화대무를 춘 복혜와 금례는 각각 15세와 16세로 어린 동기였다.이들이 춘 춤은 원래 학무와 연화대무라는 독립된 춤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궁중정재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이
재일조선인 1세들의 처절한 생존을 상징하는 음식이 ‘호르몬(ホルモン, 곱창)’이다. 일본인이 먹지 않아 버리던 호르몬을 가져와 1세들은 가게를 열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삶을 개척해 나아갔다. 이렇게 정착하여 형성된 곳이, 지금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오사카 츠루하시(大阪 鶴橋)의 코리아타운이다. 그러나 이곳이 생긴 배경이 우리의 슬픈 역사와 관계 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한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희생자와 그들의 가족과 후손들이 터를 잡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뿐.재일동포 가운데는 제주도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오사카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자신을 낮추고 환속한 원효 스님은 무애행(無碍行)으로 유명하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을 따서 ‘무애’라고 했다. 그는 거리며 시장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을 췄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란의 시기에, 전쟁의 참화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로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고 부처를 알게 하였다. 바로 ‘염불’로 말이다. 노래하
756년경 당나라의 고승 젠카이죠닌(禅海上人)이 일본의 이토자키(糸崎)항을 지날 때였다. 해상에서 본 이토자키의 경관이 고향의 육왕산(育王山)과 너무나 닮아 기쁜 마음에 스님은 이토자키에 정착하기로 하였다. 이토자키에 암자를 만들고 수행을 시작하니 이토자키에서 조금 떨어진 지금의 다카스(鷹巣) 해수욕장이 있는 해변에 초록색 털로 덮인 거북을 타고 천수관음보살이 현신했다. 이에 천수관음보살을 이토자키지(糸崎寺)의 본존으로 관음당에 모시자 보살들이 선녀들과 함께 자운(紫雲)을 타고 나타나 기쁨의 춤을 춘 것이 이토자키의 호토케마이(仏舞
1938년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서 낯선 동양인의 무용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을 관람한 저명한 무용평론가였던 페르노와 디보는 그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위대한 예술가”라 극찬했다. 또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예술 감독인 세르쥬 리파(Serge Lifar)는 여기서 공연한 ‘가사호접(袈裟胡蝶)’ 무용을 “이국적 전통의 내면에 깃든 심오한 철학에 깊이 매료된다”고 호평을 하였다. 그이가 바로 최승희와 함께 모던발레와 현대무용 등의 서구무용을 한국 춤에 접목시켜 한국 신무용의 지평을 열었던 조택원(1907~1976)이다.학창시절 잘나
피카소, 앙리 마티스, 찰리 채플린을 팬으로 둔 여자. 동양을 대표하는 월드 스타, 모던걸.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1911~1969)를 수식하는 말들이다.최승희는 원조 한류 1세대라 할 수 있는 예술가로 1920년대에 일본으로 무용유학을 떠나 귀국 후, 조선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기방이나 지방춤꾼으로부터 전통춤을 익히고 서양근대춤과의 접목을 시도하여 ‘신무용’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킨 한국 무용분야의 입지적 인물이다. 또한 불교무용의 선구자이기도 했는데 그녀가 새롭게 만든 수많은 무용작품 중에는 ‘승무’ ‘보살
1991년은 북한 예술계에 기념비적인 해이다. 북한의 프로 무대예술가들이 스타로 가는 등용문이자 최고의 전문예술인 경연대회인 ‘2·16예술상’이 제정된 것이다. 여기서 재일조선인 예술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재일조선인무용가 강수내가 독무 부문에서 ‘도라지’로 열연해 최초로 입상한 것이다. 민족 수난의 역사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조선여성상의 모습을 표현한 ‘도라지’로 입상한 성과와 그간의 공헌을 인정받아 강수내는 이듬해인 1992년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 받았다.강수내는 1961년 도쿄에서 태어난 2세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땅속에 묻힌 유물들이 500여년 만에 발굴되었다. 영통사 보관원에서 새로 발굴된 불화 삼신불상에 안무가 강수내는 우리 민족의 통일기원을 담았다고 했다. 강수내는 춤을 창작할 당시 여러 불교도서를 참고로 하였는데, 특히 수인과 계인이 가지는 의미를 배우며 안무를 고심하고, 단원들을 지도할 때 그 뜻을 설명하면서 형상 작업을 하나씩 해 나갔다.8분 20여초 가량의 ‘고려삼신불춤’에서는 영통사 보관원에 모셔진 법신(法身)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모셔진 화신(化身) 석가모니불과 보신(報身) 노사나불. 이 세
고려시대 도읍으로 500년의 영화를 누린 개성. 이곳 개성에 한국 천태종의 종찰이라고 불릴만한 사찰, 영통사(靈通寺)가 있다. 영통사는 문종(文宗)의 넷째 왕자인 후(煦), 즉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처음 출가한 곳이자 중국 유학 후에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고 열반한 곳으로, 불교계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그러나 영통사는 16세기 중반 화재로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던 사찰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기억 한편에 존재하던 사찰이 기적처럼 그 터를 내보였다. 1995년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