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이치를 알고 깨달은 분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서 화도 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자꾸 엎어져서 다시 일어나는 삶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끊임없이 부처님을 떠올리고 부처님의 따뜻한 미소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붓다처럼’에 나오는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오늘 아침 한 불자님이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습니다. 주변 사람과 불편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가장 힘든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두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운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분별에 의한 사랑과 미움은 그 자체로 괴로움을 만듭니다. 좋으면 가까이 두고 싶고,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반대로 싫으면 멀리하고 안 만나려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이런 분별심은 업을 짓는 근거가 되고, 이것으로 인해 생사윤회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꽃씨는 땅이 있어서 땅 위에 갖가지 꽃을 피우지만, 꽃씨에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금룡사 극락보전 상량식을 봉행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모셔서 극락보전이라고 했지만, 흔히 부처님 모시는 곳을 대웅전이라고 합니다. ‘대웅’이라는 말은 큰 영웅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영웅은 칭기즈 칸 같은 세속적 영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세간에서 말하는 진정한 영웅이란 욕심을 100% 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욕심을 완전히 버린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대웅전이나 극락보전을 짓는 것은 욕심을 버린 어른을 모시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욕심을 완전하게 버린 사람은 석가모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했다고 하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행복 그 자체입니다.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행복하면 깨달은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바라는 게 많으면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해서 인생의 참 목적으로 바꾸면 욕심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원력이 됩니다.욕심을 원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불교입니다. 미운 친구라도 그 친구 말을 잘 들어주고, 도와주고 공감하다 보면 머지않아 지인이 되는 것처럼 관점을 바
누구나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가령 설악산 봉정암에 올라 기도하고자 하던 사람은 봉정암에 도달한 자체로 행복을 느끼게 되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목표한 산 정상에 오르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이뤘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오르는 과정도 행복한 일입니다. 다만 스스로 목적에만 매몰돼 그 과정이 힘들다고만 생각할 뿐, 정작 그 과정에서도 느껴야 할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과정 역시 행복입니다.진정한 행복은 어떠
입동이 지나면 울긋불긋하게 아름답고 조화롭던 가을 산에 낙엽이 집니다. 그리고 모든 잎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한 생을 살다가 저물게 되면 본래 온 바 없이 왔던 그 자리로 다시 가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생명 존재들이 똑같습니다. 이 이치를 알아차린다면 허덕거리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움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알제리 태생의 피에르 나비라는 농부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에 대
요즘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묻지마 범죄, 보복 운전, 자살 등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과 대상만 다를 뿐, 같은 원인에서 기인한 것입니다.우리는 면역력과 힘을 키우고, 외부의 질병에 대응하여 튼튼하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또한 몸과 마찬가지로 운동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운동은 무엇일
반갑습니다. 오늘 초기불전연구원의 가치를 알려야 할 법석에 결례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있으나, 이 자리에 온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 스님과 원장 대림 스님과는 인연이 깊습니다. 저는 각묵 스님이 인도로 유학 가는데 일조를 한 장본인입니다. 각묵 스님은 이런 저에게 늘 고생하는 자리를 만들어 준 원흉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오늘은 한글날입니다. 한국사람 중에서 한글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부대중이 스스로 우리의 글을 통해 부처님의 원음을 몸소 듣고 체험해 깨달
‘육조단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새기겠습니다. “반야는 지혜를 말한다. 일체의 모든 시간에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롭게 실행하는 것을 곧 반야의 실천이라 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는 끊어지며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는 생기느니라.”오늘은 음력 8월의 초하루 법회일입니다. 초하루에 ‘오늘 절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시듯이, 매일매일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겠다는 원력이 항상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종교가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인간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또 앞으로 100년,
오늘은 불기 2567년 백중 기도 회향일입니다. 경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능인정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에서 우란분절이자 하안거해제일인 음력 7월15일에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삼보에 공양하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고, 오늘은 그 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그래서 오늘은 회향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어떠한 일의 마무리를 회향이라고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삶이고 참된 회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정치와 사회가 급변하고 하루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수없이
반갑습니다. 오늘은 극락정토가 장엄되는 날입니다. 백중 기도를 통해서 어두운 세상의 영가 중생들이 다 제도 되었다고 하면 그 자리가 극락정토입니다. 동명불원에서는 그동안 초하루, 미타재일 법회를 통해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오늘은 10장 ‘장엄정토(莊嚴淨土)’입니다. ‘부처님의 극락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이 제목의 뜻이지요.‘금강경’에서 ‘금강’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금강반야를 알게 되면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 세상이다.” 이 소리입니다. 금강반야가 무엇입니까. 금강반야는 곧 금
오늘 불자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법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가장 많이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통해 참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오직 조사관을 투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사관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사관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 자성 혹은 본성이라고 하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조사 관문을 투과하는 데는 근심 가득한 중생심이 있으면 세간에 걸려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해탈할 때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