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에 비해후진국이었던 신라가삼국을 통일한 것은 통일 향한 열망 때문 불교가 처음 전파될 당시 신라에서는 삼국 가운데 가장 토속세력의 저항이 우심했던 것 같다. 신라의 주축 세력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얼마나 이질적이었을까? 스키타이 문명의 핵심과 만나는 곡옥(曲玉)과 금관의 장식이 왜 신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신라인은 고구려와 백제계의 사람들과 다른 종족인가? 신라와 가야는 아주 다른 종족인가? 나는 가야의 왕족인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행적에 관심이 많다. 가야는 신라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김유신은 멸망된 가야의 왕족이었다. 그런 김유신이 왜 신라에 한을 품고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영토팽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 나는 김유신 장군의 심리를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불교 본질 수행이지만밑바탕에 신심 없으면부처 향한 귀의도 없어알음알이로 전락할 것 불교의 본질이 신앙에 있지 않고 수행에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시주 쌀을 머리에 이고 가시던 어머니를 따라 산길을 올라가 절에 갔던 나는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몸에 잔득 배어 있다. 여간해서 바라기 어려웠던 소원성취를 부처님 전에서 간절히 빌었던 젊은 시절의 나는 그 소원을 이루었다. 그 소원은 내 힘으로 이루었다기 보다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로 성취되었다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도저히 성취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일들이 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중생이 어찌 부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젊었을 때에
일상 벗어나는 모험은타성에 빠진 감각 자극두려움없는 도전정신이종교 전파의 원동력돼 일상생활에 젖어 살게 되면, 누구든지 타성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예부터 영웅호걸들은 그 일상을 거부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그 모험들은 대부분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여 우리들의 긴장감을 항시 자극한다. 그 긴장감의 자극이 19세기에는 서구인들의 동양탐사를 감행하게 하였고, 20세기에는 지구인들의 우주탐사를 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주탐사를 그리워하는 관심의 백미(白眉)는 미국 우주인이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몸을 달나라에 안착시켜 달라는 유언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 시신이 달나라에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겠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한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과는 판
불교, 소유 차원 아닌존재의 사유 가르쳐다른 종교와 큰 차이존재는 ‘마음의 충만’ 불교는 기독교만큼 도덕적인 종교가 아니다. 유교는 비록 종교적인 요인이 희박하지만, 도덕적 교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유교와 기독교는 다 함께 도덕적 교설의 무게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 다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이 세상의 도덕적 교화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불교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소유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의 차원을 사유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불교와 유교,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와의 큰 차이다. 이 점은 간단히 가볍게 생각될 문제가 아니다. 단적으로 유교와 기독교의 신학은 존재론적 차원의 사유를 정면으로
부처는 중생 안에 내재밖에서 찾으려는 태도이분법적 사고서 기인선악 전에 순수 찾아야 불자의 신행은 세상의 존재방식이 이중적인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부처임을 깨닫기 위해 멀고 먼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로 깊이 침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봄을 찾기 위해 온 산하와 들을 찾아 헤맸던 송나라 여류 시인의 시가 말하듯이, 봄은 자기 집안의 나무에 이미 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우리가 부처를 찾기 위해 부처님이 계신 산과 깊은 숲속을 뒤척거리면서 찾아 헤매지만,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을 우리가 잊고 있었다는 것은 아닌가?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가 계
극단적 윤리주의는필연적 대립 불러의리 명분 벗어나공동이익 추구해야 우리가 유교적 윤리도덕을 조선시대의 종말과 함께 시원하리만큼 청소해 버린 가장 뚜렷한 이유는 유교적 윤리도덕의 규범이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유교적 윤리도덕이 압도하는 사회는 윤리도덕적으로 건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윤리도덕의 규범이 사회생활의 생명을 억압하는 그런 진풍경을 초래한다. 우리는 한국문화를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 이 말에는 한국문화를 병적으로 키울 위험성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우리가 어떤 가치에 정신적으로 젖어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 경우 정신을 못 차릴만큼 균형감을 상실하고 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 일례가 바로 조선시대의 유교적 과잉지배 이데올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n
근대 기독교 유입 이후 선악 이원적 분리 풍토 ‘선’강요 ‘악’될수 있어 공인된 기록에 의하면, 불교는 한국에 들어 온지 가장 오래된 종교요 사상이다. 지금은 종교와 철학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기독교 유입에 따른 결과이고, 그 이전에는 종교와 철학의 차이가 없었다. 불교는 사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르치는 사상과 가르침이지, 지금같이 믿음을 가르치는 종교적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교는 기독교의 강세와 함께 변한 측면이 없잖아 있다. 부처님은 결코 예수님처럼 믿음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불교는 믿으라하지 않고 보라고 한다. 눈으로 직접 응시하라는 의미가 부처님 설법에 큰 몫을 차지한다. 영원을 말하시던 예수님이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영원을 말씀하시지 않
이 땅의 사상·종교는우리말 리듬에 맞아야염불은 불교의 토착화 서양 철학은 동양 철학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사유를 구사하는 것에서 뛰어남을 보인다. 인간을 해석하더라도 이 세상을 도외시하고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서양 철학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와 세상의 이해를 이원적으로 볼 수 없다. 나는 세상을 보는 한국 사람들의 눈이 옛날에 비해 아주 많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 선진국들의 수준과 별로 다를 바 없기에 자격지심으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쌍쌍이 모여 앉은 한국의 노인네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긴 장죽에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카메라로 찍어대는 미군들을 보면서 어딘가 그 장면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남정네들이 지게에 무엇을 지고
세상의 법 알려준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막연한 미래 약속 대신넉넉한 현실의 길 제시 부처님의 말씀은 세상의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이 점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희망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역설한 것이지만, 부처님은 그런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현실의 사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현실의 사실을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없고 또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기독교처럼 다가올 미래에 어떤 신념을 결코 말하지 않고 다만 넉넉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밝힐 뿐이다. 그래서 불교는 기독교처럼 주관적 격정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잘 범하지 않
더러운 마음 극복 아닌 마음 놓아 버림이 부처굳어 있는 엄숙미 보다자연스러움이 더 중요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수승한 대목은 신(神)에의 신앙을 배제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불교는 애시 당초부터 무신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불교의 의미가 너무 논리적으로 경직되어 버리기에 세상사를 읽는 사연에서 부드러운 맛이 없어진다. 신에의 신앙은 기독교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종교 못지 않게 인도의 고대 종교도 모두 신을 믿는 신앙적인 요소로부터 출발하여 세상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측면을 무시하고 세상사를 오로지 법의 차원에서 성찰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처음이라 하겠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허약한 인간이 강력한 초월적인 신의 의지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불교에서 ‘욕계’란감정적 세계 아니라 자연의 실상인 실법욕심과는 전혀 달라 불교는 본디 신앙적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그 근본이 신앙적이다. 한국에는 기독교 세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종교가 곧 신앙적인 요소를 바로 나타내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불교는 신앙적인 요소를 거의 머금고 있지 않다. 다만 수행적인 요소를 주류로 하고 거기다가 약간의 신앙적인 냄새를 띠고 있을 뿐이겠다. 불교를 기복적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이 하느님처럼 여겨지고 있을 것 같다. 기복적인 불교가 종교적으로 고려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모든 종교는 다 기복적인 요인을 함유하고 있고, 그 요인을 무시하고는 종교가 일상생활에서 생활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과 하느님과의 차이는 전
불교는 자연 중심 관점당위 대신 필연성 강조실질적 이익 있는 법이공허한 정의론보다 중요 부처님의 말씀은 세상의 필연성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가 세상에 알리는 도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선포한 도에 비해 세상의 필연성이 지니는 법에 보다 가깝다. 그리스도의 도는 의(義)를 설파한 도이다. 의는 현재에는 약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에서 강력한 것이 될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것을 니이체는 ‘복수와 원한의 심리를 속으로 머금고 있다’고 간파하였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자가 하늘나라에서는 첫 번째 자가 될 것’이라는 비유도 결국 원한에 찬 복수의 심리를 나타낸다고 니이체가 읽었는데,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 이것은 복음의 의미와 같다. 이익이 지배하는 세상이 응징당하고, 정의가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