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m 깎아지른 바위산에불보살·불감 빼곡히 조성 소조·조각상 총7200여기모가오굴 버금가는 규모 윈강·룽먼·둔황과 더불어중국 4대 석굴로 손꼽혀 ▲ 마이지산석굴. 높이 142m의 석회암 바위 표면에 동서로 모두 194개의 석굴과 불감이 있다. 총7200여 기의 석상이 봉안돼 있다. 벽화도 1600여 점이나 된다. 둔황 모가오굴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푸른 구름의 반, 가파른 벽면 사이에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었다. 만 개나 되는 감과 천 개나 되는 방이 있다. 비록 사람의 힘으로 이루었다 하나 신의 경지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설화집 ‘태평광기’의 한 대목이다. 중국 간쑤성 톈수이
서역 오가던 상인·스님들장도의 평안 기원하며석굴·불감·불상 등 조성 정확한 조성 기록은 없지만169호굴서 ‘420년’ 명시한명문 발견돼 연대 추정 가능 ▲빙링스석굴 입구. 유가협댐이 조성된 후 석굴로 가는 길은 이제 뱃길로 변했다. 하지만 이 좁은 협곡을 지나 실크로드를 오가던 옛 상인과 스님들의 소원은 여전히 암벽에 서리서리 쌓여있다. 실크로드 답사 중 배를 탈 일이 있을 줄이야. 란저우(蘭州)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행은 아침 일찍 서둘러 유가협댐에 도착했다. 이 댐은 황허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61년 건설됨 댐이다. 높이148m, 길이840m, 저수량이 57억㎥에 이른다. 댐 위에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작은
북량 왕 저거몽손이 개착윈강·용문 석굴의 모델 돼 ‘대약진’운동 때 저수지 조성28m 좌불의 허리까지 침수34년 후 댐 만들어 물뺐지만사라진 채색은 찾을 길 없어 ▲‘중국 석굴의 코’로 불리는 톈티산석굴. 높이 28m에 달하는 이 석가모니좌불은 톈티산석굴 앞에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허리까지 물에 잠기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저수지의 물을 막기 위한 댐이 설치돼 그 안에 갇혀버린 형상이다. 한 무제가 설치한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였던 양주(凉州)는 지금의 우웨이(武威)다. 하지만 우웨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양주라는 옛 지명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도 양주라는 단어가 더 자주 등장한다. 오호십육
치롄산맥 가장 깊숙한 곳 웅크리듯 조성된 ‘진타스’ 군력·정복욕 몰아친 시대 속진도 접근 못한 수행처 ▲마티산의 유래가 된 바위 위의 말발굽 흔적. 말발굽 절(馬蹄寺)이라는 독특한 명칭의 유래는 이곳 베이마티스(北馬蹄寺)에서 만날 수 있다. 베이마티스에는 마제전(馬蹄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다. 내부에는 세 명의 티베트 라마상이 봉안돼 있고(안내인은 이 라마상이 총카파와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라고 설명한다) 그 아래 작은 유리 상자가 네모반듯하게 잘라놓은 돌 하나를 덮고 있다. 말발굽 흔적이 남아있는 돌이다. 안내인은 이 말발자국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수스와 같은 천마가 이곳 마티산(馬蹄山)에 내려왔다가 다시 하
하서회랑의 군사·경제 요충지마르코 폴로도 매료 당한 도시 5호16국 시기 수많은 이민족 흥쇄다양한 문화 어우러진 문명교역로 ▲ 마티스석굴군의 하나인 베이마티스. 산 꼭대기에 성벽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절벽을 뚫어 석굴 사원을 조성했다. 계단이나 난간 대신 바위산 속을 뚫고 올라가는 석굴통로로 각각의 석굴을 연결, 5층 규모의 석굴 사원을 조성했다. 하서회랑(河西回廊)의 허리춤에 위치한 작은 도시 장예(張掖)의 옛 지명은 감주(甘州)다. 곽거병(BC 140~BC 117)이 하서회랑의 흉노를 토벌하고 서역으로의 이동로를 확보한 후 한 무제는 하서회랑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산 전체 360여 석굴·암자 산재‘숙주팔경’에 손꼽혔던 불교성지 문화대혁명 겪으며 철저히 파괴무너진 석굴 주검처럼 널려있어 90년대에 불상·벽화 일부 복원유구한 역사 대신 초라한 흔적만 ▲북조 시기에 조성된 원수산석굴은 산 전체에 360여 개의 석굴과 암자 등이 산재해 있는 거대한 불교 성지였다. 그러나 1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온 석굴군은 근대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처참히 훼손됐다. 원수산(文殊山)은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 동남쪽 15km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북조(420~589) 시기 원수산 남북면에 걸쳐 360여 개의 암자와 석굴, 사찰 등이 조성됐다. 그 석굴
▲안시 위린굴은 모가오굴의 자매굴로 불릴 만큼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측면에서 모가오굴에 버금 간다. 작은 계곡인 위린허의 절벽에 조성된 석굴들은 은밀히 몸을 감추고 있어 계곡을 내려다보기 전까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벌써 3시간째다. 모가오굴(莫高窟)의 도시 둔황현(敦煌縣)을 출발해 안시현(安西縣)으로 가는 길. 남쪽으로는 풀 한포기 없는 치롄산맥(祁連山脈)이, 북쪽으로는 지평선을 그으며 펼쳐져있는 고비사막이 단조롭게 이어진다. 한 시간 전이나, 두 시간 전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지루한 반복이다. 풍경 변화가 없다보니 차가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인가도 없고 지
‘장안’ 영향력 약화된 틈에강한 군사·경제력 앞세운권문세가들이 교통로 장악 ▲ 강을 따라 줄지어 있는 모가오굴. 석굴군의 총 길이는 1.6km, 석굴수는 492개에 달한다. 둔황이 중국의 목구멍이라면 하서회랑(河西回廊)은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가늘고 긴 목이다. 둔황부터 동쪽으로 란저우까지 이어지는 하서회랑은 ‘황하의 서쪽에 있는 가늘고 긴 복도와도 같다’하여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도 불린다. 동서로 1000km 가량 이어지고 남쪽으로 치롄산맥(祁連山脈), 북쪽으로는 고비사막을 양쪽에 두고 있다. 그러니 사막의 갈증으로 목숨을 잃거나 거친 치롄산맥을 걸어서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면 하서회랑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
서역 문물이 중원으로 가는 입구풍요한 경제력이 석굴 조성 배경 한족이 불교와 가장 먼저 접한 곳366년 낙준 스님이 첫 석굴 개착 세계 최대 규모의 ‘벽화 박물관’ ▲모가오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96호굴 입구의 9층 누각. 이 석굴에는 높이 35.5m의 미륵대불이 조성돼 있다. 한밤을 꼬박 달려 옥문관(玉門關)을 넘었다. 옛 글에 ‘서쪽으로 양관을 나선다’ 함은 처량한 이별과 고단한 여정의 시작을 의미했고 ‘살아서 옥문으로 돌아왔다’는 곧 행복한 재회를 상징했다. 옥문관은 고래로 중국 한족 세력의 서쪽 끝, 그 너머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그러니 옥문과 양관을 나선다는 것은 곧 서역 정벌을 뜻했다. 생사를
20C 초 독일·영국·프랑스 등앞다퉈 실크로드서 유물 약탈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벽화 운반경쟁자에 뺏기지 않으려 흙칠도 무지한 농민·이슬람교도 훼손에60년대 이후엔 홍위병까지 가세 ▲무토강 계곡을 따라 절벽에 조성된 베제클리크석굴은 쉽게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사원이었다. 유물약탈꾼 폰 르콕조차도 이 옆을 지나면서 석굴 사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정비한 번듯한 회랑덕에 마치 성벽 같은 느낌이 든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의 베제클리크석굴은 그 이름덕분인지 일찌감치 유럽 열강 유물탐사꾼들의 표적이 됐다. 독일
화염산에 막힌 삼장법사처럼대협곡 입구에서 발묶인 일행 지표 온도 80℃ 열사의 땅은포도 맺는 풍요의 땅 됐지만 5세기 융성했던 석굴사원은허술한 담장 안에 갇힌 신세 ▲토욕구대협곡에 조성돼 있는 천불동 입구. 강을 따라 십여 미터만 올라 가면 4~5세기 투루판 불교의 중심지였던 석굴사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관리국 측의 단호한 입장에 발이 묶인채 입구에 서서 하염없이 계곡 안쪽만 바라보다 돌아섰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대법(大法)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서 장애를 만났으니, 단지 육체는 왕 곁에 머물 수 있겠으나 정신은 머물게 할 수 없을 것
▲키질석굴 입구. 쿠처에서 태어나 수많은 경전을 역경, 중국 대승불교의 시대를 연 구마라습 스님의 청동좌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옛 사람들의 기록은 때때로 후대인들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특히 역사의 흔적을 찾는 답사 길에서 옛 기록과의 대조는 필수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옛 모습을 잃어버린 유적에서조차 한참을 서성이게 되는 이유도 옛 발자취 한 자락 때문이다. 쿠처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 쿠얼러강 기슭에 남아있는 수바쉬사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있는 수바쉬(蘇巴什)사원 유적은 황폐하다. 무너진 흙담만 즐비한 이 유적이 본래 사원이었는지, 어느 왕조의 궁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키질카르가석굴은 쿠처국의 왕들이 조성하고 예배한 왕실 사원이었다. 지극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쿠처의 왕들은 석굴과 벽화를 조성하며 불보살상을 금으로 장엄했다. 그러나 화려하고 지극했던 그들의 신심은 약탈꾼들을 불러 모으는 빌미가 되어 석굴의 훼손을 가속화 시켰다. 쿠처에서의 일정은 숨 가쁘다. 오랜 역사의 도시인만큼 수많은 유적, 특히 불교 석굴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답사지였던 쿰투라석굴 외에도 키질카르가(克孜尔尕哈)석굴, 타이타이르(臺臺爾)석굴, 심심(森木塞姆)석굴, 마자르보하(瑪伯赫)석굴, 그리고 현재는 바이청(拜城)현에 속해있지만 옛 쿠처불교의 유적인 키질(克孜尔)석굴,
▲쿠처현 무자트강가에 조성돼 있는 쿰투라석굴의 오련굴 입구. 테라스처럼 보이는 복도를 따라 다섯 개의 석굴이 나란히 조성돼 있는 쿰투라석굴 특유의 양식이다. 그러나 석굴 내부에서는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외관만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인 여정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쿠처(庫車)현에서부터 시작된다. 쿠처는 고대왕국이었던 쿠처(龜玆)국의 중심으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대로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서한(B.C 206~A.D 8) 때 쿠처국은 오아시스로 주변 서른여섯 나라 가운데 9대국의 하나였다. 여러 나라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쿠처국은 이를 주변 국가
▲간쑤성(甘肅省) 톈수이(天水)시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마이지산(麥積山)석굴. 깎아지른 절벽에 불보살상을 조각한 솜씨도 놀랍지만 위태로운 벼랑 끝에 기꺼이 몸을 매달았을 이름 모를 이의 신심과 용기도 대단하다. 동쪽면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은 천 수백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저렇게 세간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北京)을 거쳐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의 우루무치(烏魯木齊)에 내리기까지는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실크로드’. 그 이름을 중국 대륙의 어느 한곳 즈음으로 막연히 생각하며 무심코 넘기던 시기, ‘익숙한 이름 실크로드’는 그리 낯선 곳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