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에게 최고의 수행 덕목은 인욕, 즉 잘 참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행을 이룬 사람들은 결코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꾸짖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전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법구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라한을 이룬 한 성자가 이제 갓 출가한 비구를 심하게 야단쳤다. 그 비구는 성자의 속가 동생인데 출가한지 넉 달이 되도록 게송을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한 것이었다. 이 동생 비구는 전생에 어떤 비구를 바보라고 놀린 업보로 인해 이번 생에 어리석게 태어난 것이었다. 동생 비구를 야단치던 성자는 화를 내며 “공부를 게을리할 것이면 당장 승단을 떠나라”고 호통을 쳐 댔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비구들은 “저 아라한이 꽤나 화가 난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보시, 지계, 인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공덕을 쌓고 수행하시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셨다. 전생담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거룩한 보살행에서부터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에게 조언을 하거나 용서하는 일, 또는 지혜로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는 등 생을 거듭하며 크고 작은 종류의 수많은 공덕행을 실천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소소한 공덕행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부처님의 전생모습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한량없는 공덕을 쌓아야 하지만 작은 공덕 하나하나가 모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불할 수 없음을 깨
인욕바라밀의 위대성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경전 곳곳에서 헤아릴 수없이 많이 다뤄지고 있다.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의 수행을 위함이 일차적인 이유이지만 다른 사람이 악업을 짓지 않도록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 나아가 한량없는 자비가 없이 자신의 수행만을 목적으로 삼고자 해서는 인욕바라밀을 완성할 수 없다. 『화엄경』에서 “남들이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요, 남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참는 것이다. 힘이 없어 물러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요, 능히 제압할 수 있는 것을 참을 때 진정 참는 것이다”라고 설한것도 바로 이런 인욕의 특성에 대한 설명이다. 『법구경』상유품(象喩品)에도 인욕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이
『법구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게송이다. “아라한의 인욕은 대지와 같아 성내어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다. 뜻은 문기둥처럼 견고하고 칭찬과 비난에도 동요가 없으며 마음은 고요하여 맑은 호수와 같다. 이러한 아라한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 이 게송이 나온 배경은 이렇다. 안거가 끝날 무렵 사리불 존자는 어느 비구의 귀에 가벼운 상처를 입히는 실수를 했다. 평소 사리불을 질투하며 나쁜 마음을 품고 있던 이 비구는 부처님께 가서는 “사리불 존자가 아무 잘못도 없는 저를 꾸짖고 욕설을 하면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며 거짓말을 했다. 부처님은 사리불을 불러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안거를 마친 수행자로서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도반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다면 어찌 용서를 빌거나 참회하지 않고서 길을
보살의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는 『보살선계경』을 살펴보면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수행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보살선계경』에서는 “모욕을 참지 못하는 것이 번뇌의 원인”이라며 “나에게 닥쳐오는 온갖 번뇌는 남의 과실 때문이 아니라 내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난관에 부딪힐 때 “왜 나에게만 이러한 일이 생기는가”라며 번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번뇌나 원망하는 마음이 고통이나 난관, 그 자체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불행한 일이 생길 경우 이를 즐겁게 여기기는 힘든 일이나, 이때에 참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스스로 업을 짓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담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는 성불하기 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사를 거치며 끝없는 보시와 고행을 거듭해 복덕과 지혜를 구족한 양족존(兩足尊)을 성취하셨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같이 복덕을 완전히 갖추고 정각을 이루신 후에도 복덕 짓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열심히 수행을 거듭하던 중 그만 눈이 먼 아나율 존자가 어느 날 자신의 헤진 가사를 깁기 위해 바늘귀에 실을 꿰어줄 사람을 찾는 일이 있었다. 아나율 존자가 “누구든 복을 구하고자하는 이 있으면 내 바늘에 실을 꿰어 주시오”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 다가가 바늘귀에 실을 꿰어 주셨다. 아나율 존자가 의아해 하며 “복덕을 완전히 갖춘 부처님께서 또 다시 복덕을 지으실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복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돼야 할 욕구 중의 하나는 바로 수면이다. 잠을 잘 자는 것. 이것이야 말로 먹는 것, 배설하는 것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결돼야 할 조건인 것이다. 경전 속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편안히 깊은 잠을 주무신다”는 말씀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분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잡아함경』을 살펴보면 “성냄을 죽이면 편히 잘 수 있고 성냄을 죽이면 근심 걱정이 없다. 성냄은 깨달음의 씨앗을 해치는 독의 근본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성냄, 즉 분노를 가리켜 ‘깨달음의 씨앗을 해치는 독의 근본’이라고 했으니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서 날마다 편히 주무실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꿈틀거린다면 누구라도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이자 티베트 종파를 대표하는 켈룩파의 창건자인 총카파 스님은 대표적인 저서 『람림(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살의 일에는 다만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자리와 이타를 성취하는 것이다.…궁극에 이르렀어도 다가오는 위해를 참을 수 없어 한 번 되갚음 한다면 계율은 청정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다가오는 위해에 어떤 것일지라도 보복 없이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 보복을 하지 않으면 타인의 나쁜 짓을 없앨 수 있고, 그가 좋아하는 선을 지을 수 있기에 최고의 이타이다.” 인욕하지 못하고 앙갚음을 한다면 계율의 청정성이 무너지고 비록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악업을 짓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샨티데바도 『입보리행론』에서 인욕품 첫 머리에 “천겁 동안 쌓은 보시와 부
『손자병법』을 저술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 손자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이 좋은 것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백 번을 싸워서 백 번을 다 이긴다 하더라도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방법에 비하면 전쟁은 그리 좋은 방법이 되지못하다는 뜻이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어떤 장수가 굳이 희생이 동반되는 싸움을 자청하겠는가. 부처님 역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법구경』 쌍서품(雙敍品)에 나오는 경구다. ‘남이 만약에 나를 욕할 때 / 나를 이긴 듯해도 이긴 것 아니라고, / 이런 마음에 즐거이 따른다면 / 원한은 마침내 그치지 않으리라. // 남이 만약에 나를 욕할 때 / 그가 이기고 내가 진 것이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라 한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Saha’에서 유래해 음역한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번뇌를 겪어내야 하고 고통을 참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참아야할 고통이 수없이 많기에 사바세계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괴롭히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우리는 ‘적’이라고 규정하는데, 만약 우리가 적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안다면 그것을 참고 견뎌내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법구경』 126게송은 인과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이가 진짜 적인가에 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탁발을 나갔던 스님이 루비 도둑으로 몰리게 됐다. 그 집에서 기르던 거위가 루비를 먹이인줄 알
대승사상에 입각하여 육바라밀에 대해 설하고 있는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을 살펴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나를 괴롭힘으로 인연하여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니 응당히 이 사람에게 대비의 불쌍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여기서 ‘그’란 나를 괴롭히는 자,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적이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고, 심지어 그 원인이 된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반성해야 한다니. 도대체 ‘적’이란 어떤 존재기에 그를 위해 대비의 마음을 내고, 심지어는 그를 통해 나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라는 것인가. 이에 대해 달라이라마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구분하며 우리가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부의 적에 대해 자비를 지녀할 까닭을 비교적 명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6년간 극심한 고행을 감행하셨다. 6년 고행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은 ‘익지도 않은 박을 꼭지를 끊어 햇빛 가운데 두면 누렇게 시들어 살이 마르고 껍질이 쭈그러지며 조각조각이 따로 떨어져 마른 두골과 같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늑골이 서로 멀리 떨어져 오직 껍질이 싸고 있을 뿐 마치 마구간이나 혹은 양의 움막 위에 서까래가 붙어 있음과 같아’ 여위었기가 차마 살아있는 사람이라 하기 어려웠을 정도였음을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행은 깨달음의 완성을 이루는 길이 아니었다. 부처님은 오히려 극심한 고행을 단호히 경계하시며 “몸을 잘 간수하라”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그렇다면 음해를 받거나 구타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몸이
“…부당한 행위를 목격할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마치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분노가 치솟을 때 대담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노는 없던 용기마저도 불어넣어 줍니다. 마치 분노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는 것입니다.…”-달라이라마의 『입보리행론』 법문 중에서. 부당한 폭력이나 공격에 대해 분노하며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묵묵히 수용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하곤 한다. 적의 공격이나 폭력에 대항하지 않는 모습은 무력하거나 비굴하거나 용기가 없어 보인다. 설혹 그 내면에 어떤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그 겉모습만큼은 비굴하거나 용기가 없는 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노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옛날에 몸을 찢길 적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성을 내어 원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불자라면 누구나 한두 번 즈음은 읽어 보았을 『금강경』의 제14장 이상적멸분 가운데 한 대목이다. 나와 너라는 집착을 포함해 모든 상을 떠나야만 적멸에 들 수 있음을 설하신 부처님께서 수행자였던 전생에 겪었던 일을 말씀하시고 있다. 부처님께서 비유하고 계신 전생담의 내용은 이렇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수행자로서 나무 아래서 좌선 수행 중이셨는데 마침 그곳에 가리왕이 궁녀들과 함께 소풍을 나
달라이라마의 수행원으로 30여 년간 그 분을 곁에서 지켜본 중국인 빅터 챈은 2004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달라이라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의 반세기에 걸쳐 단 한 번의 휴식기도 없이 수행을 지속해 왔다. 그는 끊임없이 시기, 분노, 질투 등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하고 친절, 자비 등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나가는 수행을 하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사람에게 조차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갖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라하며 심지어 “자비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행동”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달라이라마가 반평생을 거쳐 타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제거하는 인욕 수행을 계속해온 것이 오직 자신의 수행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만약 그
「불교대사전」에 나와 있는 ‘인욕(忍辱)’의 의미는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한문의 의미만을 해석하자면 모욕이나 박해를 참고 견딘다는 뜻이지만 인욕에는 보다 포괄적 의미의 ‘인’을 포함하고 있다. 인욕의 산스크리트어 표기를 살펴보면 ‘크샨티(ksanti)’로 ‘참다’는 뜻과 함께 ‘이해하다’라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한 단어의 쓰임새가 무척이나 다르게 여겨지지만 이것은 잠시 생각해볼 대목이다. 인욕은 그 실천을 통해 일체중생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육바라밀 수행 덕목 가운데 하나다. 사바세계란 뭇 생명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고 많은 생명이 어울려 살다보면 내 생각이나 형편과는 다른 이, 혹은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어려운 대상과 마주쳐야할 일이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과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