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하는 자에 기회 주는 건 자비문중 선양해야 할 덕목 종정 유시 받들어 화합 이뤄야 지난 21일, 조계종정에 다시 추대된 법전 스님께서 지관 총무원장, 자승 종회의장, 법등 호계원장 등 종단의 주요 소임자들에게 대사면 단행을 요청했습니다. 대중화합을 위해 멸빈자들을 사면해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신 것이지요. 종정 스님은 예서 그치지 않고 종단개혁불사 기간(94년) 중 중징계를 받은 자들도 종단발전에 회향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사면, 경감조치를 행하라는 유시도 함께 내렸습니다. 종정스님의 대사면 유시에 따라, 앞으로 조계종엔 사면 논의가 뜨거워질 전망입니다. 그러나 종정스님의 유시와 총무원장 스님의 강력한 사면 추진의지에도 불구하고 사면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아직 많지 않습니다. 중앙종회
욕망 버리라는 게 불교지만교계마저 욕망의 노예화 만연지금 불교계에 ‘불교’있는가 욕망의 의미란, 아직 구하지 못했거나, 이미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 나아가서는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을 채우려는 욕구가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 바라는 것,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또한 욕망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도덕론자들에게는 이성과 의지에 의해 반드시 소멸되거나 통제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물론 욕망에 대한 다른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은 욕망을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막을 걷는 나그네가 오아시스를 보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듯이, 인간의 꿈도 신기루처럼 허망하다 하더라도 그 꿈이 있기에 살아가려는 의지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얻으려는 대상은 막상 쥐는
이벤트성 문화행사 한계 지적현대인 위한 土-日 법회 절실기존 신행생활 통렬한 참회 촉구한국불교, 기본에 충실해야 재기 “절이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법회를 열기 위해서입니다. 절마다, 사람들이 쉬는 매주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개설합시다.” 매주 일요일마다 절에서 법회를 열자고 간곡하게 호소한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법보신문 독자님들은 지난 890호 법보신문 24면에 전면으로 게재된 안성 도피안사 주지 송암 지원 스님이 쓴 장문의 글을 보셨을 것입니다. 절에서 일요법회를 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인데, 이렇게 스님이 적잖은 비용을 들여가며 법회를 열자는 호소를 하고 있으니, 절집의 속사정을 잘 모른다면 사실은 어리둥절한 일입니다. 송암 스님의 글은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문장
문화재관람료 토론회서 느낀 건불교에 대한 대중의 극단적 불신관람료 정당성도 중요하지만교계 현실 점검하는 계기 삼아야 ‘문화재관람료 논란!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1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긴급현안 토론회의 제목입니다.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실이 주관하고 시민단체 등이 공동주최한 행사였습니다. 솔직히 매우 곤혹스런 주제이기도 하고, 취재 일선을 떠난 입장이기에 여러 차례 고사했지만, 불교계를 대변해도 좋다는 주최 측의 양해 아래 토론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토론장으로 갈 때만 하더라도 내심으론 관람료 징수 위치를 옮기는 문제 이전에 관람료 징수 자체에 부정적 여론이 팽배한 만큼 조계종도 이제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지적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복지법인 공인이사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에 대한 교계와 법인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보건복지부는 1월 24일 사회복지법인·시설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복지서비스의 수준 향상을 위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법인 이사 수 5인 이상에서 7인 이상 확대 △국고보조 법인은 이사 정수의 1/4 이상은 시·도 사회복지위원회의 추천 임명 △이사의 1/3 이상은 사회복지분야, 감사 중 1인은 법률회계 분야 전문가를 임명해야 한다. 이 중 논란의 초점이 되는 것은 사회복지위원회의 이사 추천 즉, ‘공익이사제’ 도입이다. 이른바 사립학교법 갈등의 핵심인 ‘개방형 이사제’와 유사하다. 법인들은 이 규정이 법인 운영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처사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 조계
입춘은 ‘재수 비는 날’보다선행으로 공덕 짓는 날입춘·초하루도 뜻 깊지만썰렁한 성도절 이젠 바꿔야 입춘이었던 지난 2월 4일, 전국의 절은 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입춘을 좋은날로 삼아 기리는 곳이 불교계가 거의 유일한 데서 온 현상인 듯싶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절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부처님과 스님을 한번이라도 더 친견하고 청법(聽法)의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니까요. 이렇듯, 1700년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가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교는 민족종교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입춘뿐이겠습니까. 설, 대보름, 칠석, 백중, 추석, 동지 등 명절이나 절기에 절에 인파가 운집하는 일은 우리 절집에선 그리 생경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입춘과 불
신문은 인재 발굴서부터교계 흐름 이끄는 ‘멍석’구조조정에 내몰리는 기자들신문 살리는 건 불자들 몫 올 겨울 불교계 신문들이 크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현장을 뛰던 기자들이 회사의 사정으로 우르르 회사 바깥으로 내쳐지고 있습니다. 신문사의 살림살이가 어렵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하긴 중앙 일간지들도 하나 같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영세한 교계 신문사들이야 그 사정이 오죽 어렵겠습니까. 돌연 해직되거나 타의에 의해 회사를 떠나게 된 기자들 중에는 불교 언론계에서 20여 년을 일한 베테랑들도 아직 초년생 티를 벗지 못한 젊은 기자들도 있습니다. 경륜 있는 인재와 막 부처님 품안에서 꿈을 펼치던 패기 넘치던 젊은 언론인들이 절집을 떠나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나마 인재가 턱
말의 시비 끊이질 않는 세상소음에 가까운 말들 난무말 경계하는 게 불가 미덕일부 막말하는 스님 안타까워 말에 대한 말이 참 많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말에 대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고, 다음으로 차기 대통령 후보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들도 갖가지 해석을 낳고, 그 해석들이 또 다른 말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신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말의 또 다른 표출이랄 수 있는 인터넷 댓글들은 가히 말문을 닫게 할 정도입니다. 말, 참 중요한 것입니다. 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말이 없으면 세상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이 없다면 정치도, 교육도, 경제도, 외교도, 어떤 것도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등 정치인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말을 삼가거나 가려하라는 말은 할 수
‘중간과정’없는 개혁은혼돈과 무질서만 초래 善의 실천 위한 과정은불교가 담당해야할 몫 최근 프리드리히 쉴러(1759~1805)라는 근대 서양 철학가와 관련된 글을 읽었습니다. 미학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담긴 짤막한 글이었는데,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개혁 스트레스’에 대한 원인 규명과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반가움에 몇 번이나 읽게 되었습니다. 본디 제가 서양철학에 대한 상식이 턱없이 부족한 터라 쉴러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부득이 ‘여러 번 반복해 읽다보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선현의 가르침에 의지해 쉴러가 말하려는 의미를 어설프게나마 혜량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많은 프랑스 인들은 혁명의 성공이 가져다줄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습
불교계 낯 부끄런 일들은 우리 모두 함께 지은 공업진리-복전 향한 대신심은불자가 가야할 올바른 길 불교계가 소란합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 낯부끄러운 일들로 인해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는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위의를 지키며 잘 살아가고 있는 제방의 참신한 스님들조차 ‘희망을 잃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승단붕괴 조짐이란 진단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잠복해 있던 것이거나 음성적으로 내려온 관행들의 표출이라는 데 있습니다. 10여 년 전처럼 구종의 원력으로 떨쳐 일어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이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나브로 무기력 증세가 질병으로 악화된 듯합니다. 이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불교가 나락으로 빠
문화재 관람료 사찰을중생 재산 뺏는 ‘산적’ 취급근본대책 못 세운 교계도 잘못재화 아닌 진리의 선양이 우선 “옛적에 길목을 막고 ‘지나가고 싶거든 통행료를 내라’고 했다던 산적이 떠올랐다.” 한 일간신문의 문화재관람료 징수마찰 관련기사 중 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산적이란 사찰을 지칭합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요람이란 칭송을 받아도 부족할 사찰이 중생의 재산이나 뺏는 산적에 비유돼 몰매를 맞는 일이 지금 현실에서 진행 중입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도 없으니 난감할 뿐입니다. 기사를 보면서 오래전 읽어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해진, 김정한의 단편소설 『사하촌』을 다시 꺼내 펼쳤습니다. 『사하촌』은 “먼동이 트면 곧 죽고 싶은 마음 저녁밥 먹고 나니 천년이나 살고 싶네.”라는 소설의
수행자는 고단함 기꺼이 선택서산 스님 8가지 점검안 제시불자 기대 저버린 중진스님 구속엄청난 재앙의 암시일 수도 수행자는 어떤 분들일까요. 수행자는 매우 고단(孤單)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무등등(無等等)의 가치를 지니기에 많은 이들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걸어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수행자의 삶이란 범부들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 길의 목적을 보리를 구하는데 두든, 중생을 제도하는데 두든 수행자가 구분 없이 존숭되어야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서산 스님은 수행자(참선자)가 일상 속에서 잊지 않고 챙겨야 할 과제를 『선가귀감』에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십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혜, 여래의 은
60년대 말까지만 해도부처님오신날을 성탄절로 통용이러다간 ‘예배-장로’뿐 아니라‘자비’도 타종교 용어될 판 연말이면 ‘성탄절’을 기리는 행사와 장식이 온 나라를 뒤덮습니다. 성탄절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말합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울의 거리는 성탄절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시청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도심은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기리는 장식들로 마치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 와있는 착각을 들게 합니다. 성탄절, 이 단어는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 지칭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란 말이 크리스마스의 우리식 표현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60년대 후반만 해도 불교계에서 부처님오신날을 성탄절로 지칭했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1967년 5월 25일 서
恕는 상대방 입장에 서서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것恕로서 노-사 한마음 되어현대불교 창간정신 되살리길 ‘그 마음을 같게 한다(心+如’)는 의미를 가진 서(恕)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자입니다. 보통 용서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한자인데, 그 의미가 매우 심장합니다. 용서란 사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 받는 사람의 마음이 같아질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같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용서는 진정한 용서일 수 없지요.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처지를 십분 마음으로 이해했을 때, 용서는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상대방과 같게 한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 같은 이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마음과 같은 이를 찾기보다는 내가 상대의 마음과
인간의 욕심 채우기 위해대규모 가축사업 갈수록 확산조류독감으로 가축들만 희생종교, 무분별한 육식문화에 침묵 중국 제(齊)나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나라 신하 장포(莊暴)에게 ‘국왕으로부터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대답할 바가 없었다’는 하소연을 들은 맹자(孟子)가 다른 날 국왕을 만나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맹자는 ‘국왕이 음악을 좋아하면 제나라는 (발전을)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홀로 음악을 즐기지 말고 여러 사람들(백성)과 더불어 즐기라’고 권했습니다.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으면 다들 머리 아파하고 콧등을 찌푸리게 될 것이지만, 함께 한다면 백성들이 왕이 타악기 소리와 취주악기 소리를 듣고는 기꺼이 반가운 빛을 띠면서 왕을 칭송하게 될 것
노교수 해석에 학생 문제 제기실수 인정한 노교수에 박수갈채잘못된 佛紀 인정은 참된 용기경계해야 할 것은 후대의 조롱 대학 2학년 교양영어 시간 때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영어 과목을 담당했던 한 교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갈색 버버리를 걸치고 반백의 고수머리를 한 50대 후반의 중후한 모습은 요즘처럼 스산한 초겨울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요. 바리톤 음성의 영어발음은 또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참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런 멋들어진 외양 때문만은 아닙니다. 열린 사고와 닫힌 생각, 또 권위와 고집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보여준 철학과 용기가 그분을 잊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해 가을의 어느 날, 영어수업 시간이
“초원에서 뛰어놀다 소에게 얼굴을 차인 후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어요. 환한 세상을 다시 보고싶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빛을 잃어가던 몽골 소년이 전국병원불자연합회(회장 이원철, 이하 병불련)의 도움으로 희망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미담의 주인공은 애르댕 사이한(Erdene Saihan). 병불련은 몽골 해외의료봉사를 지원해주고 있는 금강선원과 김안과 병원의 도움을 받아 사이한에게 밝은 세상의 빛을 돌려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사이한의 눈은 실명상태에 가깝다.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왼쪽 눈도 점차 시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눈가에 남아있는 깊은 흉터는 1년 전 사이한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1년 전의 사고 이후로 사이한은 웃음을 잃었다. 11월 27일
종단 일 위해 나섰던 스님들따지고 보면 모두 고마운 분들종단의 중책 맡은 스님들은악순환 구조 선순환으로 바꿔야 최근 조계종에서 치러진 제14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세간에 회자된 것과 같이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선거였습니다. 승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장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정한 종헌종법을 가벼이 여기는 조짐이 나타났고, 그런 조짐들이 돈과 힘이라는 지극히 세속적 이해관계로 현실화하는 광경들을 보면서 자칫 승가가 붕괴될 수도 있겠다는 염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지요. 다 알다시피 조계종의 질서를 지탱해주는 구속의 틀은 오직 종헌종법입니다. 종단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스스로 정한 종헌종법과, 이를 종단의 구성원으로서 지키겠다는 양심에 기초한 자기절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