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숙종이 ‘원교국사’ 추증…스님 비석 세워 덕화 기려일본에 큰 영향…스님 생애 그린 ‘화엄연기’일본 국보로 의상 스님이 주석하며 해동 화엄의 덕화를 펼쳤던 부석사 안양루 전경. 오늘은 역사상의 의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랜 역사에서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고 그리고 사라져 갔습니다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그런데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서 그 명성이 오히려 빛났습니다. 그가 전한 화엄의 밝은 빛과 지극한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준 그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의 화엄초조인 의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보개여래(寶蓋如來)의 후신(後身)으로 추
의상 스님이 집대성한 『화엄일승법계도』. 안광석선생 화엄연기 참조. ‘60 화엄경’ 방대한 내용7언 30구 법성게로 요약 이름 집착 무리위해법성게에 그림 더해참다운 근원 친절히 설명 法자 佛자 가운데 배치는원인과 결과 드러내기 위함오늘은 의상의 법계도인(法界圖印)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의상은 육십화엄경의 그 방대한 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된 게송으로 요약하여 이를 법성게(法性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의상은 이 게송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이 시를 다시 하나의 도인(圖印)에 합하여 이를 반시(盤詩)라고 했습니다. 즉 반시란 도인에 게송을 합하여 만든 것으로 의상이 최초로 창안한 것입니다. 가로 15행 세로 14행의 직사각형 도인을 점선으로
의상 스님 진영. 경북 영풍군 부석사 소장. 여래장사상은평등 이념 지통·진정도하층민 출신불법에 차별 없어 의상 스님성기사상인간존엄 강조 불교의 교리에는 인간평등의 이념이 두루 깔려 있고, 또한 불교교단의 모든 성원은 평등의 원칙 아래 있었습니다. 갖가지 다른 신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불교교단을 형성했을 때, 브라만들이 비난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브라만이 최상의 종족이요, 나머지는 미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큰 강물이 있다. 그러나 그 강물들이 큰 바다에 이르고 나면 앞의 이름들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大海)라고만 불린다. 이와 같이
『염불작법』에 실린 의상 스님의 투사례. 20년전 민영규 선생에 의해 학계에 보고됐다. 스승께 몸을 던져예배 한다는 의미 염불작법에 수록민영규 선생 공개 신라 예경의식 중내용 남은 유일본 은사 효당(曉堂) 스님의 노트 중에는 의상화상 투사례(投師禮)가 있었는데, 이것은 화엄사의 정휘헌(鄭彙憲 : ?-1969)의 소장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었습니다. 투사례가 수록된 판본인 염불작법(念佛作法)이 민영규선생에 의해서 학계에 보고된 것은 20년 전의 일입니다. 염불작법은 중종 24년(1529) 전라도 광양현 만수암(萬壽庵)에서 간행한 것이었습니다. 투사례는 예경문(禮敬文)이라는 제목으로도 유통된 바 있습니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의 제경요초(諸經要抄)에는 의상조사예경
의상 화엄의 중심 개념신라 거쳐 고려 이어져고려 ‘감지금니화엄경’‘나옹화상계첩’에 전문 고려 충정왕 22년에 제작된 『감지금니화엄경』속의 일승발원문 전문. 험난한 이 사바세계를 잘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발원이 필요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십바라밀을 설했는데, 이 중에 원(願)바라밀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화엄의 십불(十佛) 중에는 원불(願佛)이 있습니다. 의상에 의하면, “백사십원(百四十願)·십회향원(十廻向願)·초지원(初地願)·성기원(性起願) 등이 모두 다 그대로 원불(願佛)”이라고 합니다. 화엄경에는 보살의 수많은 서원이 등장합니다. 화엄경은 여래의 깨달음을 개현(開顯)한 것이면서, 동시에 보현행원으로 대표되는 보살도를 밝힌 경입니다. 이 경의 각
華嚴十刹은 대학 수준…최치원 11곳, 삼국유사 12곳으로 기록 정선의 금강산도 화첩 중 낙산사.의상은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했고, 또한 천축산 불영사와 금강산 마하연을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의상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절도 적지 않은데, 오진이 살았던 골암사(寺), 진정이 세운 비로사(毘盧寺), 능인이 창건한 봉정사(鳳停寺), 표훈이 창건한 표훈사(表訓寺)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의상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서 여러 사찰이 창건되면서 화엄종 세력은 차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下代)에는 전국의 여러 곳에 화엄종 사찰이 건립되자 화엄십찰(華嚴十刹)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에 화엄대학(華嚴大學)이 십산(十山)에 있다고 하면서, 화엄교학의 폭넓은
법장이 의상보다 18세 연하 의상 귀국후 書信 우정 이어 중국의 법장 스님이 의상 스님에게 보낸 친필편지. (당현수대사진적 「기신라의상법사서」일본 천리대 도서관 제공)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법장(法藏 : 643-712)과 함께 동문수학했습니다. 법장은 지엄이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 이를 듣고서 입문했는데, 대개 의상이 입실(入室)한 같은 해이거나, 아니면 그 이듬해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법장은 의상보다 18세나 연하였고, 또한 머리를 깍지 않은 세속인이었습니다. 그는 지엄이 입적한 3년 후인 670년에 태원사(太原寺)에서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았는데. 당시 28세였습니다. 법장이 비록 당시에는 출가 이전의 속인이었고, 후배였다고 하더라도 의상이 그와 맺었던 친교는 오래
8세기 중엽 최고 고승으로 추앙…금강산 표훈사 창건의상 法孫 논란 불구 『법장화상전』에 직계 제자로 기술 사진은 표훈 대사가 금강산에 세운 표훈사 전경. 금강산의 많은 절들이 소실됐지만 표훈사만은 지금까지 남아 표훈의 명성을 전해주고 있다.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표훈(表訓)은 상족(上足) 제자였습니다. 그가 의상의 십대제자, 혹은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과 찬녕의 『송고승전』, 그리고 『삼국유사』 등에서 다 같이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훈은 의상의 직제자가 아니라 의상의 법손(法孫)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대덕(大德)은 나이 50세가 되면 7년을 기한으로 임명하던 승직(僧職)이기에 750년대에 대덕을 지낸 표훈
『삼국유사』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에 행적 남겨까마귀가 출가 권유…의상에게서 『법계도』 전수 비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오늘은 의상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분인 지통(智通)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이량공(伊亮公) 댁의 종이었는데, 7살 때인 용삭 초년(661, 문무왕 원년)에 출가했다고 합니다. 이 해는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때입니다. 그는 의상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낭지(朗智)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출가와 수계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7세 어린 나이에 출가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영취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지통은 이에 따라 영취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의 나무 밑에서 쉬다가 문득 이상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
지엄은 의상에게 의지(義持), 법장에게 문지(文持)호 내려신앙적·실천적 성향이 강한 의상의 곧은 의로움 높이 평가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중국 종남산 지상사 경내. 사진제공=한국불교연구원의상에게는 의지라는 호가 있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승 지엄이 지어 준 호이기에 더욱 소중한데도 말입니다. 의상이 종남산의 지엄문하에서 수업할 때 동문 중에는 법장(法藏, 643~712)이 있었습니다. 법장은 의상보다 18세 연하의 후배였고, 출가 이전의 행자였는데 그 스승이 입적한 2년 뒤인 28세에 머리를 깎고 수계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습니다. 지엄은 지상사에서 화엄을 배우던 제자 의상과 법장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이는 체원
진정 출가는 어머니 구도심 아들 효성이 함께 빚은 감동 구도기 부석사 범종각 앞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붉은 목련. (사진제공 = 한국불교연구원)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설법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마음으로 기뻐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효성은 남달랐던 젊은이였습니다. 이 젊은이가 홀어머니와 이별하고 출가하는 장면을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했습니다.“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고자 합니다.”어머니가 말했습니다.“불법은 만나기 어렵
자비로우면서 엄격한 스승…오진·지통·표훈 등 10대 제자 남겨황복사·부석사·추동에서 화엄 강의…『법계도인』 고려로 이어져 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 의상 대사는 소백산에서 처음으로 화엄회상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해동화엄의 초조(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입니다. 최치원이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온갖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소백산이 같
화마 없는 터전…『화엄경』 강설, 구름처럼 사람 몰려해동화엄 근본 도량…가람 배치 미타정토 따라 건립 태백산 영주 부석사의 전경. 의상 대사는 선묘룡의 신통으로 이곳에 화엄도량의 터전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영주의 봉황산 중턱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로 13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부석사의 창건설화는 이렇습니다.귀국 후에 산천을 편력하던 의상은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곳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도 어찌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양양 낙산의 관음신앙, 의상 대사로부터 시작『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창건설화 담겨 조선후기 대표 화가인 김홍도의 『금강산도화첩』에 수록된 낙산사 전경.문무왕 10년(670),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일차적으로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조정에 알렸습니다. 조정에서는 고승 명랑(明朗)의 자문에 따라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670년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신라 침략은 67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신라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여러 전투 중에서도 당의 육군을 괴멸시킨 매초성전투와 해군을 대파했던 기벌포전투는 유명합니다. 675년의 매초성 전투에서는 당나라 군사 20만명을 상대로 18회나 싸워 신라가 모두 승리했고, 다음해의 기벌포전투
“스님께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를 성취하겠다”는 선묘의 서원은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 깃들어 있어 일본 『화엄연기회권』에 실려있는 선묘와 의상의 만남.의상이나 원효가 활동했던 7세기의 한반도는 전쟁의 먼지가 사방을 덮고 있었고, 당나라와 일본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의상이 도당 유학길에 올랐던 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이듬해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나라로부터 귀국을 서둘렀던 바로 그해에 당나라는 신라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동아시아 세계를 휩쓸고 있던 그 어렵던 시절에도 의상은 흔들림 없이 구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자에게도 조국은 있었고, 그 조국이 외침으로 위태로울 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던 것
금정산서 7일 독경 신중 힘으로 왜구 쫓아中, 남산율종 창시 지엄도 신중 공양에 감탄스님에 대한 민중 의식 존경을 넘어 숭배로의상대사가 수학한 종남산의 정업사 도선율사탑.의상이 지상사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660년대의 종남산에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조(祖)로써 유명한 도선(道宣 : 596667)이 살고 있었습니다.의상에 비해서 29세나 연상이었던 도선은 의상이 종남산에 이르렀던 661년에 이미 6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에는 의상이 도선의 초청을 받아서 공양을 대접 받았다는 설화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의 처소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웃에 도선율사가 있어서 항상 천공(天供)을 받는데, 매양
많은 분량의 초고여러번 압축 끝불에도 타지 않는7언30구로 집대성스승 지엄 지도로 불후의 명저 남겨표훈 등 제자들에끊임없이 전승돼의상 스님이 집대성한 『화엄일승법계도』. 안광석선생 화엄연기 참조.의상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전하는 글 중에는 짧은 게송(偈頌)이나 발원문(發願文)이 대부분인데, 법성게(法性偈)를 비롯하여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투사례(投師禮) 등이 그것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1권,『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1권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법계도』 이외에는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저서들은 일찍부터 유통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법
625년 신라 귀족 김한신의 아들로 탄생38세에 入唐…종남산에서 지엄과 조우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 묘오에(明惠)가 1206년경 원효의 진영과 함께 봉안했던 의상의 진영. 지금도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전한다.의상(義相)은 진평왕 47년(625)에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구도적 천성이 역연했던 의상은 나이 19세에 왕경에 있는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8년 연상인 원효와 만나 함께 구도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가계나 스승, 그리고 국내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이 무렵 구도의 열정에 불타던 신라의 젊은 구도자들은 중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용감한 젊은이는 머나먼 천축을 향하기도 하였다. 의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