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地)수(水)화(火)풍(風)해와 달과 별,순례자의 영원한 도반이라네 순례자여 순례자여그대가 길을 나선 까닭은 무엇인가대지의 기운, 강물의 생명태양의 온기, 바람의 숨결 四大가 하나되니 우주가 되었네그것이 순례자의 본체라네순례자가 본디 如來였으니밖에서 찾을 것이 없었네 뒤에 올 순례자를 위해四大와 소박한 돌탑 남겼으니그곳이 바로 불국토라네순례자는 이내 여래가 되었네 세계 제일의 성지 강 린포체(카일라스)가 순백의 화관을 쓴 듯 그 모습이 장엄하고 신이하다. 강 린포체의 좌우에 있는 봉우리들은 강 린포체를 주불로 받드는 보살님들로, 세 분의 불보살님들은 히말라야와 티베트 고원이 빚은 ‘자연의 삼존불’이다. 강 린포체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마치 개미들의 행렬처럼 작게
티베트 전통의 익살스러운 가면극, 티베트인들의 순수하면서도 걸림이 없는 품성이 엿보인다. 티베트인들의 영적인 삶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아마도 우리와는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들의 삶은 편하게 먹고 부자가 되겠다는 우리의 뇌구조와는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가’란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온 몸에, 온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수행은 ‘어떻게 하면 더 맑고 청정하게 죄 안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집중돼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삶은 1300여년 동안 대대손손 이어져 오면서 몸과 마음의 구조마저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티베트 사람들은 지난 50년 동안 남(중국)이 뭐
티베트의 정신적 귀의처인 달라이라마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맑고 아름다운 영성을 간직해 온 티베트 라싸, 중국의 식민적 수탈이 반세기 동안 이어지면서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2008년 11월 3일부터 7일까지 라싸를 순례한 석종사 성지순례단에는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이자 석종사 금봉선원장인 혜국 스님께서 증명법사 겸 지도법사로 동행했다. 혜국 스님은 몇 해 전 북인도 다람살라에 주석하고 계신 달라이라마를 만나 티베트의 영성과 간화선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영혼의 땅 라싸를 꼭 한번 순례하기를 서원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한국의 수좌를 대표하는 혜국 스님의 눈에 라싸의 현재는 어떻게 비쳤을까. 혜국 스님이 라싸를 순례하고 들려주신 ‘티베트 불교 이야기’를 정리해 두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
척박한 자연마저도 양약으로 삼아 탐욕과 곤란함, 근심을 치유하는 티베트 사람들. 라싸의 외곽에 있는 너럭바위에 조성한 석가모니 마애불은 자연을 부처님으로 받들려는 그들의 표현이다. 오색으로 색칠한 부처님의 모습이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그리 티베트와 달라이라마에 빠져들게 되었느냐”고.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 언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티베트 사람들과의 인연 혹은 ‘필연에 의한 이끌림’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달라이라마를 처음으로 뵌 것은 2002년 1월, 성도성지인 인도의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이다.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과 함께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던 중 나는 보드가야 대탑에서 아주 낯익은 두 분을
1950년 10월께 중공군 티베트 침공 당시세계 이목-UN, 한국 지키는 데에만 집중달라이라마 “그로 인해 우린 관심 밖” 탄식“티베트 붕괴 막아 달라” 국제 사회에 호소 세라는 600년 동안 ‘달라이라마’ 전통을 전승해 온 겔룩파의 ‘사캬 예쉐’가 1419년 산문을 열었으며 티베트의 불교학과 수행을 주도해 왔던 중심 도량이다. 전성기 때 학인 수가 무려 7000여명에 달했으나 이제는 단 한명의 학인도 없어 쓸쓸해 보인다. ‘라싸엔 티베트 시간이 없다.’무슨 뜻일까, 지구상에서 자신들의 지리적 위치에 맞는 시간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도 있단 말인가. 실제 라싸에는 세계인들과 약속한 티베트만의 시간이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라싸는 물론 티베트 전역은 중국 베이징의 시간을 따
학인들의 열정적인 대론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라싸의 3대 사원 중 하나인 세라에는 현재 스님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진은 라다크의 한 곰빠에서 대론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 학인 스님들의 모습. 확인하고 싶었다. 달라이라마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향 라싸에서 달라이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받들면서 살아가는 맑은 영혼들을 눈으로 보고 오감(五感)으로 느끼고 싶었다. 돈과 힘을 앞세워 중국이 끊임없이 탄압하고 극한의 고통을 주더라도 그것에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것에 불자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며, 그것에 굴복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영혼을 맑히는 수행에만 진력하는 라싸의 영혼들, 그들은 분명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티베트에 불교를 전승한 인도의 고승 파드마삼바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매일 아침 일체의 인연들을 맞이하는 이 세상, 우리는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를 부대끼게 하며 살아갈 뿐이다. 여기는 어디인가. 아주 가끔은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떠돌고 있는 나를 측은하게 여겨 삼독(三毒)을 내려놓고 본디 청정했던 마음을 찾는다며 길을 나선다. 순례자가 되어 잠시 잠깐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그 동안 내가 지은 인연들과 욕망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일분일초 동안 일었던 참회의 마음도, 청정한 마음도 신기루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다시 삼독에 이끌려 일상으로 돌아온다. 누군가의 힘에
라싸의 파란 하늘 아래 서 있는 조캉은 마치 파란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그곳은 라싸에서도 가장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시인 ‘귀천’(歸天) 비록 이 시(詩)를 처음 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시인이 노래하고자 하는 하늘로의 귀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三毒)을 내려놓고 하늘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할 도반은 오직 자연, 이슬과 노을빛뿐이라는 시인의 시심에서
라싸의 티베트 사람들에게 고봉의 초입에 있는 바위는 삼존불을 모실 수 있는 도량이다. 정성을 다해 조성한 삼존불이 장엄하면서도 이웃집의 어르신처럼 서민적이다.티베트를 어머니라고 일컫는 것은 그곳이 생명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북쪽엔 7000m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와 쿤룬산맥이, 남쪽엔 4000m 전후의 광활한 들녘을 간직한 창베이고원이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를 이루고 있다. 그 고원들엔 초자연적인 힘과 지수화풍(地水火風) 인연의 기운이 응집돼 생성된 지구의 빙하가 오랜 시간 침식하고 퇴적하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낸 함수호들이 1만 5000여개나 존재한다. 바다의 짠 기운을 머금은 티베트의 호수들은 아시아 주요 강(江)들의, 이를테면 인더스강을 비롯한 얄루창포강, 진사강
달라이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의 작은 연지에 있는 정자, 공간미와 조형미가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다. 달라이라마는 노블링카를 생애 가장 행복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는 티베트 사람이지만 티베트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네팔에서 태어난 망명 2세입니다. 80년대 중반이던가요, 아버님은 어머니와 형, 누나, 사촌들과 함께 라싸를 탈출해 네팔에 정착했습니다. 히말라야의 험준한 길을 따라 네팔로 향하던 중 아버님은 몇 명의 가족을 히말라야의 설산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요.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은 가족들을 눈 속에 묻어 두고 온 것이지요. 네팔이나 인도에 정착한 티베트인들은 장사를 아주 잘 했습니다. 아버님 역시 세계 각 나라에서 온 관
‘깨달음’은 두 가지 방법으로 완성할 수 있다. 하나는 명상과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일상으로 관찰하면서 매 순간을 깨끗하게 정화해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웃을 위한 상(相)이 없는 사랑을 실천해 이 세상을 맑고 자비롭게 장엄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성과 영성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완성된 꽃(부처)을 피울 수 있다. 포탈라를 순례하는 길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길이다. 매우 가파르거나 편안한 마루가 반복되는 포탈라 길은 티베트의 민초들이 발원해 온 정토세상과 환생, 윤회, 자비에 관한 가르침들을 파노라마처럼 차례로 일깨운다.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직선도로가 아니라 지그재그로 오가는 이 길의 종착은 달라이라마가 상주하는 붉은 궁전이다. 그들이 발원해 온 정토세상이 최종 목적지인
티베트인들은 포탈라궁을 그들만의 극락정토로 꿈꾸었다. 포탈라에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는 작은 연지에 비친 포탈라는 서방정토의 극락으로 향하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듯 그 모습이 신이하고 장엄하다. 감히 포탈라궁 정면에 섰다.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자연스레 무릎을 꿇고 포탈라 초입의 담장에 이마를 대고 합장했다. 그리고 130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온전히 포탈라를 보살펴주신 불보살님들과 달라이라마, 수 없이 많은 티베트 민초들의 가피와 보시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이 옛 모습 그대로, 그들만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이곳 포탈라에 다시 모이게 하소서. 포탈라를 지켜주신 수많은 인연 공덕의 가피에 귀의하오며 온전한 티베트의 모습으로 몬람축제(티베티인들의 대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