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모든 면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어가는 시대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인생관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방식도 크게 달라져가고 있다. 어제의 당연함이 오늘은 부적합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의 양식에 대한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인류문화의 집결체인 다양한 종교들도 변화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는 입장에 처해지게 되었다. 불교계도 그간 많은 변화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젊은 시절만 해도 사찰에서 찬불가를 부르고 피아노가 대웅전의 한구석에 놓여있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어디 비단 찬불가뿐이겠는가? 불교계의 봉사활동, 템플스테이, 인터넷 불교동아리 등 다양한 방면으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생명공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평균수명이 100세인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2000년에 유엔이 정한 고령화 사회로 분류되었다. 평균수명도 계속해서 높아져 2005년에는 평균수명 78세로 장수국가가 되었고, 2018년에는 80세를 넘어설 것이라 한다. 바야흐로 노인복지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물론 복지문제가 노인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사회는 노인복지에 대한 고민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전통적인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로 급속히 변화하고 보니 노인복지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지원 하에 전국적으로 노인복지관련 시설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세워지고 있지만, 아직 수요에 못 미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과
요즈음 세계경제가 예측이 어려운 불확실성의 상황에 놓여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고이래로 이러한 난국일수록, 사전에 어려움을 예측한 사람들의 선견지명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느 한 대안에 동의할 수 없이 총체적으로 진퇴양난에 빠져드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면 개발과 보존인가? 인간위주인가 생태위주인가? 저축인가 소비인가? 모든 문제가 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왕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살아온 방식의 구조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에,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이 없이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인 듯이 보인다. 즉 자기 생각 속에서 맴돌아봐야 자기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사람들이 한 세상을 살면서 각기 생각하고 행동이 다른 것은 각자의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을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우주관이라고 불러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의연히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도 있고, 멀쩡한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여 전전긍긍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사에 지극히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불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윤회설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하며 끝없는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이 끝없는 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고, 그 방법론이 중도(中道)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 고리 밖에 또 다른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우리는 전 세계의 정보망이 시공을 넘어서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인터넷으로 지구저편과 화상대화를 하고 시장에 가지 않고도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그뿐인가! 조만간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거나,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 재택근무 하는 새로운 생활패턴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터전과는 달리 가상공간 내에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생활을 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가상공간 내에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를 이용하여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얻는 등 현실과 동등한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린든 랩(Linden Lab)에서 개발한 세컨드 라이프라는 인터넷 기반의 가상 세계로 2003년에 시작되었다. 이렇게 세컨드
80년대 중반에 모든 어린이 장난감이 위험할 수 있음이 매스컴에 심각하게 대두된 적이 있었다. 특히 중국무술영화에서 착안한 쌍절곤과 람보라는 영화에 나온 야전용 칼과 총은 비록 그것이 플라스틱 재료로 만들어 졌다할지라도 위험하기 마련이다. 그러자 세간의 비난과 경영난에 봉착한 장난감 제조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리가 만든 모형장난감은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은 재질로 만들어졌다. 단지 그 외형이 위험해 보인다면, 모든 가정에서 쓰는 부엌칼이 오히려 더 치명적일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에서도 우리는 모든 사물과 상황 인식에 대한 양면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필자도 어린 시절에 동네친구들과 목검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이 위
동양에서 기(氣)의 존재와 해석만큼 논란이 많은 단어도 드물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음이라는 단어를 개념의 구별 없이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어느 때는 마음을 버리라 하고, 어느 때는 마음을 일으키라하고, 어느 때는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유식학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한다고도 표현한다. 이와 같이 기(氣)라는 표현도 다양한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어, 때로는 혼돈을 일으키기도 한다. 근자의 기에 대한 해석은, 현대과학의 발전에 힙 입어 “에너지와 정보를 가진 파동”이라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듯하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온 우주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동양식으로는 온 우주가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파동이 에너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무신론적인 자연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정하다고 말할 때, 단지 외관의 수려한 용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정하다고 말할 때는 이미 이목구비의 보이는 육체적인 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이러한 이목구비에 대한 수행은 『능엄경』에 잘 설명되어 있다. 간략히 정리하면 이목구비에는 각기 4가지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차원은 육신의 기관으로서의 기능이요, 둘째 차원은 감정의 표현수단이요, 셋째는 정신의 표현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차원의 기능은 ‘나’를 중심으로 쌍방향의 정보통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차원은 앞의 세 차원을 통괄하는 ‘나와 너’를 넘어선 혼융일체의 차원이 된다. 이러한 육체적 기능 이외의 여
불교무술뿐 아니라 모든 수행에 있어서 호흡조절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진다. 불가의 경전 중에서 특히 호흡을 중점적으로 다룬 경전은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이다. 더불어 남방 상좌부 계열의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호흡관찰은 매우 중요한 기법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호흡에 대한 중시는 비단 불교뿐이 아니라 도가(道家)와 선가(仙家)계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호흡(呼吸)이란 단어는 물론 한자이고, 이는 내쉬고 들이쉰다는 우리말의 날숨과 들숨에 해당된다. 우리말에서는 생명이 다하는 것을 목숨이 다했다고 한다. 즉 숨이라 표현되는 생명력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활동을 숨 쉰다고 한다. 그래서 숨을 쉬면 살아 있는 것이고, 숨이 멎으면 이승을 하직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사는 동안 숨 쉬는 모습이 천태만별로 모두
지난 70~80년대는 동양전통의 다양한 무술들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와 더불어 고전적인 무술영화가 많이 상영되어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협영화에서 감명을 받던 협객의 의리 같은 것은 사라지고, 극렬한 격투기같이 오직 승리만을 염두에 둔 종목만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격투기종목은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고, 일반사람들의 건강과 정신도야를 위한 취지와는 목표가 다른 것이라 하겠다. 본래 무술이란 지난 고대 문명시대에 있어서 인성 교육과정의 하나이었다. 심지어 공자의 문하에서도 육예(六藝)라고해서 활 쏘는 법을 가르쳤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고래로 한국의 제왕들은 문무를 겸전했음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전의 전통적인 인
요즈음 몸짱이니 얼짱이니 하는 신조어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몸을 단련한다고 하면 헬스센터에 가서 근육을 키우거나, 러닝머신에 올라 살을 빼는 것인 줄만 아는 경향이 있다. 만일 우리가 몸을 단백질과 지방으로만 이루어진 육신이라고 보면 이것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살을 빼고 근육을 키우는 동안, 어느 정도 전신의 기혈유통이 순조로워 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수행에서 몸공부라고 하면, 단지 몸수련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지 결코 마음수련과 별개의 것으로 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점은 동양의학에서 오장육부의 장기상태와 감정이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즉 건강한 상태란 몸과 마음이 혼연히 일치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고, 몸과 마음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부작용이
수행은 불성 경험·발현하기 위한 것궁리(마음)-실천(몸) 모두 성불 가능 석가 세존이래로 불교의 갈래가 다양하게 전개되어, 흔히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의 중관과 유식, 밀교 및 동방불교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물론 세분화하면 갈래는 더욱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 실천수행법도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나 크게 보면 결국 몸과 감정과 정신을 잘 다스려, 세존께서 제시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교의 공부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처음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는 첫 단추는 역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시작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달마조사는 말하였는데, 그것이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다. 즉 이치를 궁리하든가 실천을 통한 경험의 두 가지
불가와 그리스철학에서 우리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물질이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작용까지 포함하여, 밀교계통에서는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6가지로 나타내어 물질적 존재인 오대(五大)와 물질적 대상에 대하여 인식 작용을 하는 심법(心法)인 식(識)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점들을 현대식으로 풀어보면, 인간은 몸, 인식능력 및 정신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셋은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고 순환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이 있기에 인식작용을 하고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역으로는 한 생각을 일으켜 기억이 떠오르고 몸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향의 심신작용은 동양학에서는 원형의 순환궤도로 표현되고 있으며, 오행(五行
뇌과학 “마음은 의식과 동일한 뇌 작용”동양의학 “경락으로 몸-마음 상호 영향 모든 종교는 그것이 유일신교이든 다신교이든 간에 인간의 마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설을 가지고 있다. 유일신교의 경우에 인간의 마음은 오로지 신을 향해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만, 근자에는 니체 같은 서양철학가의 반론에 의해 한풀 꺾인 상황이 되었다. 동아시아 종교로 통칭되는 유불도의 경우에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며 전개되어 왔다. 예를 들어 원시유가의 경우에는 상제(上帝)를 인정하고 있지만, 후일 성리학에 들어오면 이기설(理氣說)로 바뀐다. 도교의 경우도 도가와 도교로 나누어 보면 그 궁극적 대상이 차이가 나고 있다. 단지 불교만이 시종일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붓다의 교설에서 나타나듯이, 스스로 진리를 구현할
‘마음=뇌’ 주류속 동양사상 관심 집중 유식은 현대인지과학의 불교식 버전 최근에 학제간 연구로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 불리는 인간의 마음과 앎의 과정을 연구하는 분야일 것이다. 인지과학의 태동을 보면 과거 2차대전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미영연합국의 시도에서 비롯되었고, 연후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급속도로 인지과학분야가 발전되어 왔다. 그 후 불과 60년 정도의 세월 안에 그간 컴퓨터와 관련된 과학발전의 역사는 참으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IT(정보과학), BT(생명과학), NT(나노과학)와 함께 CT(인지과학)를 4대 핵심융합기술로 선정하여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인지과학을 활용한 응용기술이 이미 알게 모르게
불교는 흔히 서양에서 ‘마음의 과학’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서양에서도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이 오래되었지만, 마음을 벗어나는 세계까지 다루는 불교와는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와 동양사상이 19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에 전래된 이래 서구심리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양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켄 윌버(Ken Wilber)의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 혹은 ‘초개인심리학’이라 할 것이다. 이는 용어표현 그대로 ‘나’와 ‘나를 벗어난 세계’까지 총체적인 의식체계를 전일주의(全一主義, Holistic)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론 중에 현대인의 이해에 쉽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세 개의 눈’ 혹은 ‘세
易은 우주 존재-운동원리 표상 화엄법계는 주역의 세계와 일치 주역(周易)에 대한 연구는 그야말로 동양학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천 년간 동양에서의 학문적 연구 및 실천수행 측면의 정점은 바로 주역의 해석에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역이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기록된 경전으로서만 그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사상 때문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이치를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즉 역(易)이란 우주의 존재원리와 운동 원리를 표상하는 것이자, 현대식으로 말하면 복잡계의 다른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역학에서 태극 음양 사상 팔괘 64괘로 표현되는 기호학으로서 세상의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질서를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마치 현
근자에 들어와 복잡계란 용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각 학문분야에서도 복잡계란 말을 붙인 신조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21세기에 들어 학제 간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서, 가히 복잡계란 용어는 신지식인의 대명사처럼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와 철학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종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복잡계란 용어의 사용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서구 과학계에서는 일대 혁명이 일어나, 그동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서 확립된 기계론과 분해 위주로 치닫던 환원론 등의 전통적인 단순성과학(science of simplicity)에서 전일론(全一論)적인 복잡성과학(science of complexity)으로
과학 발전사는 신해행증의 다른 표현신과학은 과학-종교 절충한 퓨전과학 현대는 과학문명의 시대라고 하지만, 기실 무엇이 과학적인지 명확하게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을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본다면, 과학은 다름 아닌 나와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가설이라 할 것이다. 즉 과학이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3승의 방편론이자, 보이지 않는 실상을 알기 위한 일종의 사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의 발전상에는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나타나 있고, 동시에 변화하고 있는 생각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을 방편이자 가설이라고 정리해보면, 결국 이고득락(離苦得樂)하려는 생각의 흐름인 것이다. 우리가 과학은 서양에서 전래되었다는 편견을 벗어던지면,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으
역대 불교는 무한 경쟁 체제서 우위과학문명 속 현대적 교상판석 절실 저간의 불교관련 출간물을 보면 불교학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결실로 인하여 마치 인간이 생명의 비밀을 거의 장악한 듯 한 오만함도 엿보인다. 그런 배경 하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등이 모두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유전학, 진화학 및 뇌과학을 기반으로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불교도 인간학의 범주임에 생명과학으로 재해석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되지만, 과연 그런지는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할 수 없으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