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1944년 6월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두고 만해 한용운 스님(1879~1944)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기도로 인한 과로와 오랜 지병이었던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이 애도사에서 묘사했듯 만해 스님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화 같았다.만해 스님은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
2009년 5월26일,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꾸러미 하나가 발견됐다. 스님들이 조심스럽게 꾸러미를 벗기자 천 보자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태극 문양이 비쳤다.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풀어보니 놀랍게도 몹시 낡고 오래된 태극기였다. 귀퉁이는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지는 등 풍상에 많이 삭았지만 분명 태극기였다.크기는 가로89cm, 세로 70cm,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 덧그려진 태극기였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넣는 그 간절한 마음이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1965년 10월3일 한낮, 근현대 통도사의 중흥조로 널리 알려진 구하 스님(九河, 1872~1965)은 출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보낸 영축산 통도사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열반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랍 81세였다.통도사 역사에서 구하 스님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14년간 맡으면서 통도사의 면모를 일신했다. 특히 통도사와 통도사 산내 암자의 재산을 일원화 해 회계를 투명하게 했으며 이렇게 모인 정재를 바탕으로 통도사가
“너와 내가 하나요. 만물중생이 다 한 몸이요. 세계만방 모든 나라가 하나다. 이 세상 삼라만상이 한 송이 꽃이니라.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조선 땅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된다.”35년간의 일제 억압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은 다음날, 가야산 남쪽 끝자락인 덕숭산에 머물던 수행자들도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독립 소식에 만공 스님(滿空, 1871~1946)은 상좌에게 붓과 무궁화꽃 한 송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상좌가 그것들을 가져오자 만공 스님은 붓을 잡고 무궁화 꽃잎에 정성스럽게 휘호했다.‘세계일화(世界一花)’어느 제자가 고개를 갸웃거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다시 조선 독립운동을 하겠소.”1919년 3월 경성지방법원.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용성 스님(1864~1940)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한평생 불교혁신운동을 펼쳤던 용성 스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지도자가 필요한 순간 흔쾌히 앞장섰고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2년은 혹독했다. 가혹한 고문과 참기 힘든 수모를 당했다. 그럼에도 민족의 대표로, 존경받는 스님으로서 의연하기만 했다. 스님은 갇혔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
“그대의 일찍 가심은 그대의 앞날을 위하여 애통함을 금할 수 없거니와, 황폐한 우리 불교계를 위하여 더욱이 비탄을 억제할 수 없구나. 석원(釋苑)에 가을이 늦어 불일(佛日)이 스러지려 할 때 그대조차 입적하니, 등을 이을 자 그 누구며 빛을 돌이킬 자 그 누구냐.”(재일본 조선불교청년회)법을 구하러 인도로 향하던 범란(梵鸞) 이영재 스님(1900~1927)이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돌연 입적했다. 조선 불교계는 비탄에 빠졌다. 조선불교청년회원들은 국내외에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불교’를 비롯한 불교잡
호남 제일 미륵신앙 도량으로 불리는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일대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류에김제‧만경평야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 제1의 곡창지대다. 모악산에는 함금석영맥이 많아 산금(山金) 광산이 있었다. 예로부터 모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원평천과 두월천의 충적층에서 사금이 많이 채굴되기도 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거르면 사금이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자 금덩어리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모이면서 산자락 논밭마다 사금 캐는 이들로 북적거렸다.구한말, 나라는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 속 급변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날로 어수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불교는 탄압 속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스님들의 도성출입은 금지됐고 고된 노동이었던 산성축조에 동원되면서도 급료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먹을 양식과 의복, 땔나무 등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노동력이 많이 드는 한지를 제조해 공납으로 바쳐야 했고 산나물·꿀·미투리 등을 납부하는 잡역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양반과 아전들로부터 갖은 방법으로 스님들을 괴롭히고 모욕했다. 탄압 속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됐다. 법을 구하고자 인도나 중국 등 해외 유학길에 나서는 스님들의 발길도 끊겨 조선
불교의 부활을 꿈꾸며 억불정책에 맞섰던 허응 보우(虛應 普雨1509?~1565) 스님이 제주도에서 입적하고 그 후로 100년, 쇠락일로를 걷던 조선 불교에 중흥의 기틀을 다질 뛰어난 선지식이 태어났다.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 스님이다. 지안 스님은 배불숭유의 완고한 사대부의 득세에도 교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행력으로 수많은 대중들을 감화시킨 스님이었다. 특히 당대 ‘화엄학’의 일인자로 꼽히던 스님은 일생을 강설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말법의 시대, 위태롭게 사그라져가던 법의 등불을 다시 밝힌 지안 스님은 1644
조선 중기 한반도를 덮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이익보다는 의로움과 명분, 본분에 맞는 삶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정명사상을 외치던 조선 사대부들의 추한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왜군에 의해 백성이 도륙당하는 처참한 전란 속에서 임금과 사대부들은 비대한 몸에도 불구하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백성들을 버려두고 줄행랑쳤다.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건설했던 한양이라는 거대한 도성에 백성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한양만이 아니었다. 임금과 사대부들이 줄행랑을 친 명나라 가까운 의주 인근을 제외하고 전 국토는 왜군의 조총과 칼날에 도륙되고 있었
한국불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고 아끼는 호국애민(護國愛民)이라는 독특한 불교관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자장율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식이 계율과 밀법(密法)으로 국토의 안위를 도모했고 외침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중생구제의 자비심으로 분연히 일어나 스스로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에 의지해 대장경 판각이라는 불사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국난극복이 곧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을 구제하는 보살행이었으며, 외적을 침입을 물리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자비심
순혈 유자(儒子) 임을 자부한 신진 사대부의 득세로 불교는 조선이 개국하자마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숭유억불 탄압은 강도를 더해갔다. 사찰은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온한 세상이 됐다. 스님들의 과거시험인 도첩제 또한 폐지돼 유능한 인재들이 불교로 유입되는 통로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조선 중기, 신진사대부들의 패악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사찰에서 고기와 술을 요구했고 사찰 재물을 태우고 보물을 약탈해 가는 일을 버젓이 자행했다. 사찰을 폐사시켜 조상의 묘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전기 불교는 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급속도로 위축돼 갔다. 세종 6년부터 시작된 일방적 불교교단 통폐합은 불교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갔다. 사찰과 스님,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축소, 종단 축소 등으로 사찰 규모와 스님의 수가 대폭 줄었다. 후대에 호불군주 세조가 불법을 크게 일으키려 했지만 당시 받은 타격이 워낙 커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세조의 손자 성종 때에 이르러 유교가 더욱 득세하면서 무수히 많은 스님들이 장형이나 참형에 처해졌다. 설산, 원심, 계엄 스님 등이 불법을 홍포한 죄로 참수됐고 설은, 지성, 상명 스님은
1446년(세종 28) 반포된 한글은 조선의 극심한 불교탄압 속에서 탄생됐다. 한글 창제는 세종(1397~1450)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한글이 불교와 매우 관련이 깊고 특히 스님들이 한글 창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논문이 지속적으로 발표되면서 한글창제와 관련된 불교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학자들은 한글이 범자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108이나 33 등 불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을 들어 한글과 불교의 관계를 조명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불교는 명맥을 유지했다. 지독한 탄압과 시련 속에서 묵묵히 인욕의 길을 걸으며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전등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훼불과 모욕은 불교를 끊임없이 막다른 길로 몰았다. 고려 말부터 배불상소를 올리기 시작한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탄압에 나섰다.1392년 7월, 고려의 신하였던 이성계는 정몽주와 같은 고려의 충신과 우왕, 공양왕을 숙청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그리고 조선을 세웠다.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고려 말 보우·나옹 스님을 비롯해 무학 스님과도 인연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암흑기를 맞게 됐다. 중국에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저 한때 스쳐가는 탄압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은 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무려 500년 동안 일관되게 불교를 탄압했다. 그리고 그 탄압의 첫 희생자는 고려불교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이었다. 스님이 살았던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은 정치와 종교를 비롯한 온갖 이념들이 서로 충돌하던 시절이었다. 나옹 스님은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 스승 지공(指空, ?~1363) 스님과 함께 생불
1253년(고려 고종 40년) 12월 충주산성. 산 아랫마을을 몽골군이 장악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몽골군의 공격은 ‘세계를 정복했다’는 명성에 걸맞게 끈질겼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고려인이 몽골군 앞에서 피투성이 화살받이로 세워졌다. 70여일 간 전투가 이어지면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수두룩했다. 크고 작은 부상에 병사와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식량과 물이 모두 바닥을 드러내며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성을 내줄 수 없다.’가파른 성벽 위에서 한참을 고뇌하고 서 있던 김윤후 장군은 결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다. 있는 길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경우도 많다. 그 길은 정신적인 길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길일 수도 있다. 금산사를 개창한 진표 스님(718~?)의 구도는 두 가지 길이 꽉 막힌 곳에서 시작됐다. 구도를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이 그러했고, 구도 여정 또한 길이 끊긴 천 길 낭떠러지 중간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됐다. 안락함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 가장 높은 곳의 법을 구했던 치열한 구도의 삶. 특히 진표 스님의 삶은 흐릿한 역사의 흔적
거대한 불도 티끌 같은 불씨에서 시작하고 대해의 엄청난 물도 한 방울의 이슬에서 비롯된다. 1600년을 이어온 장대한 한국불교의 시원도 이와 같았다.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바다와 대륙을 건너 깨달음의 불씨를 향해 나아갔던 사람들. 방울방울 맺힌 구도를 향한 그 애틋한 마음들이 모여 결국 찬연한 한국불교의 오늘을 만들었다.구도의 길은 쉽지 않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홀로 떠나야 하는 길. 목숨은 한갓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갔던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목숨을 버리더라도, 티끌 같은 한 구절의 가르침을 열망했던 사람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국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는 유독 불교에 배타적이었다. 그래서 희생도 컸다. 어쩌면 많은 희생을 딛고 뿌리내린 불교이기에 신라의 불교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깊고 단단하고 찬란했을 것이다.이런 우여곡절을 대변하듯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유래에 대해 여러 기록들이 전한다.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이 있고,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이 있다. 또 미추왕(262~284)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