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45분, 청곡사 대웅전 앞 적막의 한가운데 서 있다. 도량석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북극성과 눈이 딱 마주친다. 북극성과 나와의 거리는 433광년이다. 433년 동안 빛의 속도로 달려온 북극성의 별빛이 창백한 푸른 점 속의 아주 아주 작은 나의 눈에 와닿는 기막힌 순간이다. 찡하다. 곧이어 목탁이 또로로록 올려지고 새벽바람이 소리를 싣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대웅전 처마에 깃들어 사는 작은 새가 제일 먼저 맑고 고운 소리로 응대한다. 천년을 넘게 흐르던 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히 깊이
어떤 동기를 통해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때 인간은 흔히 만족감이라는 매우 기분 좋은 심리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뇌신경학자들은 이것을 뇌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여 우리 자신에게 행복이나 기쁨 같은 감정적 보상을 주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도파민이 어떤 자극을 통해 과도하게 분비되면 인간은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쾌감에 자주 노출되면 이런 경험에 집착하며 벗어나지 못하고 마침내는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중독에 빠지게 된다.과거에는 ‘중독’하면 약물이나 알코올, 담배와 같은 물질에 의한 중
어제 같이 사는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말이 많았던 이유는 그 일을 끝까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아하! 그렇구나!’ 싶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마치고 그 대화를 돌아보면 제가 말을 많이 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명 그분은 만족하고 돌아갔지만 돌아서서 다시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남아있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이야기를 더 들어주고 더 공감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남습니다. 아무리 잘 설명하고 친절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더라도 그것은 대부분 현장에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신분을 아는 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기설법, 대기설법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에 적합한 언어와 방편을 들어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도 ‘법화경’의 ‘제2방편품’을 펼칩니다. 이 품에는 틈날 때마다 자주 독송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십력 부분입니다.‘어떠한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생각해 보는 지혜의 힘’ ‘법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를 아는 지혜의 힘’ ‘모든 사람의 현재 상태를 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르쳐 인도하
나무들이 제법 물오르기 시작한다.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환한 봄이 오고 있다. 올해는 남해 쪽에 있다 보니 어느 때보다 빨리 봄기운을 맞이한다.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여리디여린 새싹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얼었던 땅과 마른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지 필시 뭔가가 돕고 있음이다. 봄에 춘곤증이 오는 이유는 우주의 기운이 새싹들이 움트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에너지도 새싹들에게 기운을 나눠주었는지 괜스레 봄빛 햇살에 나른해진다.모든 새싹은 싱그럽고 사랑스럽다. 근원에서 바로 출품된 것이기 때문일까? ‘나 여기 살아있었어
전 세계 베스트셀러 ‘신경끄기의 기술’의 저자 마크 맨슨이 한국을 여행하고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상의 제목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다. 한국인에겐 제목에서 이미 불편함이 다가온다. 보통의 경우 이런 제목의 동영상은 한국에서 인기를 얻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지하철을 경험하며 감탄하고,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두어도 안전한 한국에 찬사를 보내는 영상에 열광한다. 그런데 이 영상은 거의 모든 미디어에서 다루었고, 원본 영상만 해도 거의 100만에 가까운 조회 수를 보인다. 한 외국인의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한
월요일 저녁 명상센터에 홀로 앉아있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운율을 따라 허공 속에 흘러 다니고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의 불빛이 꼭 필요한 곳만 비추고 있습니다. 어둠은 밝음을 빛나게 합니다. 지금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들어와 누워서 바다 위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마음은 신통력이 있습니다. 그곳을 생각하고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은 그대로 느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하듯 우리의 마음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지 싶습니다. 곧 우리 마음의 고
십년 전 다녀온 인도로 이번에는 불자님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되었다. 열흘 동안 마법의 성과도 같았던 따뜻한 나라 인도에서 함께 간 불자님들과 현지인의 포용력에 큰 감동을 경험한 여정이었다. 이번 순례를 통해 불자님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그분의 생각을 읽고자 했다. 성지에서 주고받은 말에는 그분의 믿음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순례의 순간순간이 연꽃처럼 피어난다.“스님! 여기는 다른 세상 같아요. 저승 같다는 느낌이 들 만큼 다른 세상이요.” 바라나시에서 마주한 안개 자욱한 새벽, 배를 타고 가는데 어느 순간 앞과 뒤를 전혀 가
2월을 ‘정화의 달’이라고 한다. 2월을 뜻하는 ‘February’라는 단어의 어원은 혹독한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이하기에 앞서 묵은 때를 씻고 향을 쬐는 의식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고대 로마에서도 2월 15일에 죄를 씻는 예식이 있었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2월이면 정초기도, 입춘 삼재기도를 앞두고 사찰마다 정성 가득한 기도의 풍경이 불자들에겐 익숙하다. 바로 이 기도와 의식이 정화의 과정에 해당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정화는 새롭게 시작하거나 깨어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2024년은 갑진년 청룡의 해다. 흔히 청룡은 청춘과 기백 그리고 왕을 상징하며 동쪽을 수호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맞는 청룡의 해는 초고령사회로 들어가는 시작의 해라는 것이다. UN인구청(UNPD)에서 정의하는 초고령사회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것을 말한다. 한국은 2010년대 후반부터 출산율이 감소하고, 2020년부터 베이비붐세대가 노인이 되면서 초고령사회가 가속화됐다고 한다. 초고령사회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노인이 되는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보험의 인상, 국민연
함께 살고 있는 일봉 스님과 아침공양을 하는데 봄이(함께 사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다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뭐가 나타났나?’ ‘고양이를 보고 짖는가?’ 그러다가 결국 설거지를 부탁하고 봄이를 보러 갔습니다. 갔더니 얌전하게 앉아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습니다.좀 더 다가가니 봄이가 반응을 보입니다. 반갑다고 뛰며 나가서 놀게 해달라고 끙끙거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해 결국 목줄을 해 내려왔습니다. 아래층 공양간에서 놀면 되겠지 싶어서 데리고 들어갔더니 그 정도
제 방에는 작은 칠판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깜박 잊는 일들이 잦은 탓에 벽에 작은 칠판 하나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칠판에 “따뜻하게, 정갈하게”라는 단어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 단어가 참 좋습니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생각이 많음을 꿰뚫어 알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수시로 대상을 옮겨가며 비교하기 급급합니다. 잠시 일어나는 생각에서 비롯된 갈애에 연연하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낼 때가 무척 많습니다. 저는 부산의 도심 속에 있는 한 작은 포교당에 있습니다. 이곳 포교당은 거리가 시끄럽고 또 분주합니다. 거대한 메가시티 안
내게는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감기 기운이 몰려올 즈음, 나는 마치 비밀 요원처럼 바이러스의 침입 신호를 포착한다. 목뒤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오싹한 기운, 눈가에 찾아오는 그 불청객 같은 피로함을 말이다. 그 순간, 나의 특별한 감지력이 발동한다. 타이밍을 놓치면 꽝이다. 그래서 나는 특급 대응 요원처럼 행동한다. 비타민C를 아낌없이 투입하고, 생강차와 꿀보이차를 대거 동원한다. 그러면 몸속의 면역 세포들이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각성하여, 감기 바이러스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마 전 일본 고베에서 2023 국제종교인평화회의(IPCR)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 일본, 중국의 종교인들이 모여 ‘동북아 평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과제’라는 주제로 대화했다. 세 개의 분야로 나누어 세미나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자연재해에 있어서 종교지도자의 역할’이라는 토론 주제가 있었다. 이번 세미나가 열린 고베는 1995년 1월 17일 새벽 5시 46분에 진도 6.9에서 7.3 정도의 강진이 덮친 곳이다. 물론 지금은 30년 전 대재앙이 있었던 곳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 건물과 공원으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도시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관찰하여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으로 몸과 정신작용을 의미합니다. 육근(나)과 육경(대상)이 늘 상호 작용하는 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온 삶과 살아갈 삶 모두 항상하지 않아서 변해가고 변해가기에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갑진년은 푸른 용의 해라고 합니다. 용은 변화무쌍하면서 신출귀몰하여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존재입니다. 푸름은 새로운 도전을 의미합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모습 속에는 ‘갑진’의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무
한 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감사의 달 12월이다. 2023년을 돌아보니 좋은 인연과 만남, 뜻깊고 감사한 추억, 무수한 집착심과 만나며 하심(下心)과 겸손을 배운 경험들이 떠오른다. 새해 출발은 내 인생 첫 책을 내놓으며 나도 세상에 함께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출간의 인연이 법보신문과도 이어져 세심청심에 1년간 12번의 글을 쓰는 소중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만남에는 이별이 뒤따른다. 애별리고(愛別離苦)의 교리를 들지 않더라도 좋은 인연과 헤어짐은 고통이다. 만남 속에 이별이 예정되어 있고, 만남과 이별이 한 쌍임을 그동안
어둠이 빨리 찾아옵니다. 오후가 되면 어느새 문밖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가 다가오나 봅니다. 밤이 길어지는 것을 느낄 즈음이면 그 정점이 다가옴을 알 수 있고 조금 지나면 다시 밤이 짧아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모두 이렇게 가득 차면 다시 줄어들고 작아지면 다시 늘어나는 현상들 위에 살아갑니다. 어제도 밤하늘의 달을 보았습니다. 반달보다 작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손톱같이 작은 달이었는데 어느새 커졌습니다. 어찌 보면 달은 작아지면 작다고 걱정하고 커지면 커진다고 걱정하는 나
‘추우강남(追友江南)’은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의 뚜렷한 주관 없이 남에게 끌려서 덩달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의 핵심은 자신의 주관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주변 친구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어릴 적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나쁜 친구와 어울리면 자신도 나쁜 사람이 될 거니 좋은 친구를 만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가 나쁜 행동으로 학교에 왔을 때 많은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는 착한데 나쁜 친구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어
재난이 있는 곳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 자비심이 싹트게 됩니다. 자비는 보리의 어머니입니다. 깨달음은 자비심 속에서 태어나 자비심의 양분을 먹고 자라서 지혜라는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지혜는 자비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비는 고난과 역경이 있는 곳에서 더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고요와 평온 속에서는 강렬한 자비심을 얻기 어렵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을 다니며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며 관음보살도 구고구난이라고 고난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십니다.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입니
살다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 이 글을 쓰는 지금이다. 일주일 후로 알았던 원고 마감 날이 갑작스레 오늘로 변경되었다. 긴급한 순간을 맞이하면 멈칫하게 되지만 이럴 때는 스피드가 중요하다. 할 건지 말 건지. 이것저것 재면서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 보면 선택은 더뎌지고, 불안과 고통은 늘어난다. 얼마 전 서울대 최종훈 교수의 ‘인생 교훈’이라는 글을 우연히 보고 오늘부터 이렇게 살 거라 다짐했던 것도 선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