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림은 산지관리법상 ‘임업생산과 함께 재해방지·수원보호·자연생태계보전·자연경관보전·국민보건휴양증진 등의 공익기능을 위하여 필요한 산지’로 분류되어 있다. 따라서 사찰림은 공익적 기능과 함께 산림의 경제적 기능(임산물 생산)도 함께 중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찰림의 종교적 기능이나 경제적 기능은 점차 축소되는 반면 공익적 기능만 강조되는 것이 요즈음의 실정이다.정부의 일방적 주도에불교계와 갈등 깊어져종단 차원의 비전 제시담당할 직제 구축 중요모델 사찰림 운영하고기관·시민과 협업 구축인공적 불사 못지않게숲보전 노력 회자될 것사찰림의
산림휴양, 숲 해설, 산림치유, 수목장, 숲 유치원. 지난 30여년 사이에 숲에서 새롭게 창출된 산림영역이다. 1970~1980년대의 치산녹화기에 우리 귀에 익숙하던 입산금지, 사방사업, 속성수, 산림녹화 등의 단어는 사라지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용어들이 어느 틈에 우리네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사찰 숲 이용 늘고는 있지만일반 휴양림 수준 못 벗어나산림청, 치유프로그램 개발산림치유지도사 양성 박차템플스테이에 숲 활용도 낮아산림치유 명상 등 개발 시급가람 바깥의 숲은 지난 30년 사이에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한국 산림(637만ha)의 약 1%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림의 경영 실태는 어떤 형편일까?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불사에 사찰림에서 벌채한 목재를 이용하고 있는 사찰은 있을까? 지난해 ‘사찰림의 활용방안’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런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숲은 사원경제 생산기반화석연료·목재 수입으로숲 운영기술 모두 사라져70~80년 무분별한 남벌좋은 목재 고갈도 한몫사찰에 산림부 운영하며숲 가꾸는 일본의 사례한국불교 밴치마킹 필요아쉽게도 어느 사찰에서도 사찰림 경영이나 사찰림 벌채에 대한 궁금
나라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순례길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불자가 생각하는 순례길과 기독교도들이 꼽는 순례길이 다를 수 있고, 등산객들이 꼽는 순례길과 문인들이 생각하는 순례길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주변의 불자들에게 먼저 물었다. 어떤 순례길이 가장 인상적이냐고?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숲길을 추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걷던 희랑대와 지족암을 거쳐 해인사의 선원에 이르는 숲길을 최고의 순례길로 치는 이도 있다. 산꾼들이 추천한 순례길은 거리가 조금 있는 선암사에
비자나무와 차나무와 동백나무. 이들 난대성 수목은 지난 천년 세월 동안 터줏대감처럼 남부지방 사찰의 중요한 식솔이었다. 사찰은 어떻게 천년 세월 동안 이들 수목과 깊은 인연을 이어왔을까? 사찰 숲은 이들 수종이 의탁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생육환경이었고, 스님들은 이들 수목의 생육특성과 이용법을 대를 이어 끊임없이 전수하였으며, 그래서 이들 수종의 종자와 잎에서 생산된 특산품을 국가의 공납품(의약품, 제사용품)이나 사찰과 민간의 생활용품(기름, 의약품, 기호품)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산불 막고 민간약 대용동백나무 민간 연료로비자나
치약산 구룡사 입구 한구석에는 ‘黃腸禁標(황장금표)’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있다. 이 자연석은 이 일대가 조선왕실에 봉납하던 황장목 소나무 산지[黃腸禁山]였음을 알려주지만, 구룡사를 찾는 방문객 중 이 금표를 찾는 이는 드물다. 구룡사 일대가 황장금산이라는 확정적인 자료는 ‘관동읍지(關東邑誌)’의 ‘구룡사’ 조(條)에 ‘즉황장소봉지지(卽黃腸所封之地)’라는 기록과 19세기 초의 ‘광여도(廣輿圖)’에 구룡사와 함께 표기된 ‘禁山(금산)’으로 확인할 수 있다.치악산 구룡사 입구 황장금표왕실에 황장목 공급하던 증거사찰 숲 문헌·금
사찰의 지팡이 설화는 이 땅에 불교의 정착과정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귀중한 통로이다. 우리 민족은 다른 문화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자연물을 숭배하는 토속신앙을 재래로부터 전승해 왔다. 선조들은 천지(天地), 일월(日月), 성신(星辰), 산천(山川)을 숭배하였고, 이와 같은 숭배의 대상들은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함에 따라 일부는 불교에 융화되었고, 일부는 민속으로 전승되거나 무교에 수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수목숭배 수용한 흔적은신중탱화 그림에서 확인내소사·영국사 당산제에는전통적 수목숭배 엿보여 고승 대덕의 지팡이 설화12곳 사
사찰의 옛 풍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해인사 홍류동의 솔숲은 고운 최치원이 거닐던 그 당시에도 울창했을까? 통도사의 들머리 솔숲(무풍한송)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을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은 조선시대 문사들의 문집이나 화원들의 그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조선 문집이나 화원 그림에사찰 솔숲 글·그림으로 담겨활엽수 주로 채취 농경문화소나무 위주 문화경관 창조40년 전 60%나 되던 솔숲현재는 24%미만으로 줄어크고 화려한 불사 못지않게전통경관 보존에 관심 필요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사유록(四遊錄)’ 유호남
사찰 숲은 최초로 파악된 1910년 이래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찰림의 규모 변화 추이를 살펴보는 일이다. 사찰림 규모의 변화 추이는 나라 전체 사찰림과 개별 사찰의 산림면적 변화를 따로 나누어 살펴봐야 하는데, 전체 사찰림 규모는 북녘 사찰림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는 분단 현실이 있고, 개별 사찰의 산림면적은 정보 접근의 한계가 존재한다. 또 다른 접근 방법은 사찰 경제에 끼친 사찰림의 역할 변화와 산림구성(수종, 수령 등)의 추이를 살펴보는 일인데, 모두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광복 이후 사찰림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없다. 몇몇 단편적인 기록으로 광복 이후와 한국전쟁 전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찰림에 대한 자료가 일제강점기보다 광복 이후에 오히려 더 빈약한 형편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일제가 남겨 논 자료 보다사료로 남은 자료 더욱 빈약전시의 회의록과 기사 통해사찰 숲 도·남벌 확인 가능식민지 수탈로 피폐한 산하그마나 보전된 목재 비축지정부 또한 전쟁 상황에서도사찰 숲 지키기 위해 노력광복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사찰림에 관한 정부의
사찰 숲은 일제강점기 30여년 동안 어떻게 비상 금고 구실을 할 수 있었을까? 한두 해도 아니고 30여년 동안이나 금고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숲이 가진 재생 가능한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로 산림 시업안을 편성토록 하여 숲을 조성하게 한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이다.숲이 사찰금고 가능한 건재생가능한 숲 특성 때문일제, 베어낸 나무 양보다더 많은 나무 심도록 강제18세기 헐벗은 남한산림일제 거치며 오히려 늘어먼저 숲의 특성부터 살펴보자. 산림을 흔히 재생가능한 자원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적절하게
조선총독부는 조선 병탄과 함께 사찰령(1911년)을 통해서 사찰의 재산을 관청의 소유물처럼 통제하였다. 사찰의 산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탄 이전까지 개개 사찰이 필요에 따라 시행해오던 임목의 벌채 행위는 금지되었고, 임야의 매매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임목의 벌채와 임지의 처분은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사찰림에 대한 이러한 허가 절차는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하였다.총독부 사유림 벌채원에벌채상황 기록으로 남아21년 동안 645건 허가지역별 경남 가장 많아일제의 불교계 통제정책사찰의 재정불안 이어져불사·분담금 때
조선말까지 사찰은 왕실과 상호보험적 관계를 지혜롭게 유지하면서 억불숭유의 힘든 세월을 견뎌내었다. 조선 말기에는 봉산을 자임하면서 양반 권세가나 토호의 탐욕에서 사찰 숲을 지켜내었다. 미약하게나마 긍정적으로 작용하던 조선왕실의 보호막마저 사라진 일제강점기에 사찰 숲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사찰숲 기록이 많지 않지만‘조선임업사’에 일부내용 담겨국권침탈 다음해 사찰령반포사찰재산·승려활동 모두규제일제 수탈로 사찰재정 열악이에 따른 사찰림 남벌 우려 사찰 숲의 유래와 관리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쉬 찾을 수 없듯이, 일제강점기의 사찰
찰은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를 조선말까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주권을 잃은 병탄 이후에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산림 소유권의 형성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삼림법과 임적조사 통해산림소유자 대략적 파악‘조선임야조사령’ 마련해연고제시하면 소유 인정숲 소유권 확보위한 노력송광사의 ‘산림부’서 확인산림 소유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정된 ‘삼림법’(1908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통감부 통치시기에 제정된 삼림법은 산림을 제실림(帝室林), 국유림, 공유림,
조선시대 말기(1910년)의 사찰 숲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쉽게도 각 지방의 사찰들이 어떤 숲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와 같은 기록들이 여타 사찰에서도 전해졌으면 그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그와 유사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선 말기 1,300여 개소의 사찰이 관리(또는 소유)했던 숲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1912년 일제총독부 남긴‘조선임야분포도’서 확인사찰숲 위치와 영역 표기사찰의 산림 소유권 확인황폐해진 사원 소유 산림유림이 사찰숲
조선시대 사찰의 산림 소유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국가(왕실)가 사찰에 하사한 땔감숲, 왕실의 태실과 능침수호를 위해 사찰(원당)이 수호한 봉산, 왕실 의례용 임산물의 생산을 위해 사찰(원당)이 직접 관리한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이 그 유형이라 할 수 있다.조선, 산지소유 불인정무수한 산림소송 남발매매문서·송사 기록에서사찰, 산림소유 확인가능순천 송광사·선암사 분쟁산림소유분쟁 중요한 기록조선 조정(왕실)은 형성 유래가 각기 다른 이들 산림을 사찰 소유로 인정했을까? 사찰은 국가가 하사한 이들 사패지(시지와 봉산)를 사유
조선 조정의 산림시책은 주로 소나무재와 땔감의 원활한 조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축재와 조선재로 쓸 소나무 조달용 산림시책은 송목금벌(松木禁伐)로 통칭되는 소나무 행정[松政]이었다. 연료조달 시책은 조정의 각 관사에 쓸 관용 땔감은 관용시장(官用柴場)에서, 각 능원용 땔감은 향탄산에서 조달되게끔 분리하여 시행했다.왕실능원 땔감 조달 위해사찰숲 향탄봉산으로 지정경기 일원 몰려 있다가 조선후기 남부지방 집중사찰이 지정을 요청하고산림관리까지 직접 맡아산림황폐의 비극상황에서양반 수탈 피할 유일 대안조선 조정은 능원의 향탄산을 대부분 경기
조선시대의 사찰은 국가의 산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했다. 사찰이 조선 왕조의 능역과 태실 주변의 산림을 직접 수호한 사례(법보신문 1288호 참조)는 보호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반면 사찰이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을 직접 공급한 사례는 생산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은 황장(黃腸)과 국용주재(國用主材)와 향탄(香炭)을 말한다. 황장은 왕족의 관곽재(棺槨材)로 이용된 몸통 속이 누른 소나무이며, 국용주재란 국가와 공신과 재신(宰臣), 향교의 위판(位版)에 사용된 밤나무재(材)이고, 향탄은 각 능(陵)·원(園)·묘(墓)의
1300년 전 진여원의 땔감숲(32ha)은 어떻게 오늘날의 월정사 사찰림(5782ha)으로 확대되었을까? 월정사 사찰림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 정확한 유래를 밝힌 기록은 없다. ‘자객으로부터 세조를 구한 고양이를 위해 사방 80리의 토지를 상원사에 하사했다’는 유래 또한 분명한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사찰에 땔감 숲 제공 전통신라에서 조선까지 이어져조선, 억불정책에도 불구원찰을 늘리고 산림도 제공임진왜란 후 산림 파괴되자왕실, 사찰숲 봉산지정 보호사찰림과 달리 사원전에 대한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건봉사(乾鳳寺) 재금강산남(在金剛山南), 해인사 재가야산(在伽倻山), 전등사 재길상산(在吉祥山), 조선 초(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지역별 불우(佛宇: 사찰)항목에는 하나 같이 사찰의 소재지를 ‘在OO山’과 같이 산을 중심으로 밝히고 있다. 신라 최초의 가람 흥륜사는 도읍의 숲(천경림)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가람이 산중으로 갔을까?산지가람이 본격 도입된나말여초에 사찰림 시작선종 도입·풍수지리설도사찰림 형성에 큰 영향삼국유사에 진여원 기록국가 내린 사패지서 비롯학계에서는 시대에 따라 사찰의 창건 장소가 도읍(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