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야기를 ‘삼국유사’의 맨 앞으로 돌려보려고 한다. ‘삼국유사’의 처음은 ‘왕력(王歷)’으로 시작한다. 곧 ‘연표’다. 그 틀을 보면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맨 위에는 중국의 연표를 두었다.전설은 은유로 표현된 역사옛 전설들 모아 신화 만들어‘삼국유사’ 많은 학자들 연구국사 연구에 있어 절대원전‘술이부작’ 논어 경전됐듯이삼국유사도 ‘술이부작’ 기록올 한해 ‘삼국유사’ 연재 통해신화의 합리적 설명에 노력 실제 본문에서는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기록되지만, 중심 이야기가 신라인만큼 왕력
‘삼국유사’를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고승은 아무래도 자장, 의상, 원효스님이 아닐까? 그런데 의외로 이분들 못지않게 일연 스님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고승이 있으니 바로 진표 스님이다. 특히 진표 스님은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라고 이어진 두 글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 분량을 합치면 상당한 비중인 셈이다. 그럼에도 진표 스님이 앞서의 다른 스님들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분의 점찰법회라는 것이 맥을 잇지 못하고 오래전에 끊긴 탓이 아닌가 한다. 진표 스님, 치열한 망신참법지장과 미륵에게 계를 받아점
‘삼국유사’ 탑상편의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달달박박”과 “남월산(南月山)”은 모두 아미타와 미륵을 함께 다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침 하나는 백월산, 하나는 남월산이라는 ‘달’과 관련된 비슷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 앞의 백월산은 온통 판타지로 가득 차있고, 다음의 남월산은 철저한 다큐멘트이다.미륵불과 아미타불 됐다는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경덕왕때 백월산 남사 세워각각 불상으로 조성해 경배부족한 물에 목욕한 까닭에달달박박 성불 때 금색 부족 불상에 얼룩 남아있는 이유이들 불상 현재는 볼 수 없어다만 광배 명문은 기록 남
‘삼국유사’ 의해편의 ‘현유가·해화엄’조는 경덕왕대 고승들의 마법 대결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유가’의 ‘현’은 태현(太賢, ‘삼국유사’에서는 大賢으로 표기하고 있다)스님으로 신라에 유가종파를 개창한 승려였고, ‘해화엄’의 ‘해’는 법해 스님으로 화엄종에 속했다. 이야기는 태현 스님부터 시작한다. 태현 스님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곳에는 석조미륵장육상이 있었다. 그런데 태현 스님이 이 미륵불 주변을 도는 의식을 할 때마다 미륵불의 얼굴이 태현 스님을 돌아다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고대불교에서는
근래 경주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발굴소식이 전해졌다. 경주 낭산 자락 구황동에 위치한 “황복사지 동편”의 경작지에 방치된 왕릉터에 대한 발굴이었다. 이 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이 발굴된 곳이어서 이후 많은 관심을 받아온 지역이었다.조사결과 왕릉으로 사용 안돼 알 수 없는 이유로 공사 중단황복사지엔 삼층석탑만 남아신문왕 추모 석탑 명문 나와 ‘삼국유사’ 기록에 황복사는의상·표훈 스님과 인연사찰 신문왕릉 조성과정 혼란 주목공사 중단 원인들 추론 가능황복사탑 주변 발굴 이뤄지
‘삼국유사 탑상편’의 ‘사불산·굴불산·만불산’에 실린 세편의 이야기는 제목이 ‘산’자 돌림이다. 그러나 각각의 내용을 보면 등장하는 산의 개념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사불산과 굴불산은 석불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불산 이야기부터 살펴보자.‘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린3구의 ‘산’자 돌림 불상들하늘에 내려보낸 ‘사불산’땅속 있다 드러난 ‘굴불산’신라장인이 빚은 ‘만불산’당대 최고의 작가들 작품신이 만든 작품으로 전해작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아름다운 신화들이 탄생사불산은 현재의 경북 문경 공덕산에 있는 대승사라는 절에 관한 기록인데, 그곳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린 ‘요동성 육왕탑’의 이야기는 당나라 때 도선(道宣, 596~667) 율사께서 저술한 ‘집신주삼보감통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일연 스님이 채록한 것이다. 제목의 뜻은 ‘요동성에 있던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란 뜻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성에 고구려의 성왕이라는 왕이 순행을 왔다가 신비한 오색구름이 휘감아 돌며 머무는 곳을 발견했다. 이에 그곳으로 다가가보니 그 구름 속에 지팡이를 든 승려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은 사라지고 대신 3층의 흙으로 쌓은 기단 위
‘삼소관음중생사’란 제목도 번역본에서 대체로 원문 그대로 사용되는 제목인데 언뜻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세 곳에 나타났던 중생사의 관음상”이란 뜻이다. 그 안에 옴니버스식의 이야기 네 편이 실려 있다. 중생사 관음상은 어떻게 세 장소에 나타나셨다는 뜻일까? 그리고 어떤 상이었을까?세 곳 나툰 관음상 의미지만네 가지 옴니버스 기록 남아중국의 대표 화가인 장숭요신라로 와 꿈 속 관음상 조성고려 초 유명 정치인 최승로중생사 관음상 점지로 탄생사찰 운영 어려움에 처하자스님으로 변신 시주 받아와‘삼국유사’ 기록 종
‘삼국유사’탑상편 중에서 ‘전후소장사리’ 기사는 매우 길고 내용도 복잡하다. 더구나 번역서에서는 제목을 보통은 쉽게 한글로 풀어쓰지만, 이 기사만큼은 제목 자체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후소장사리’라는 한자 제목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진신사리 계보는신라 자장율사로부터 비롯‘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두골·어금니사리 등 100과황룡사·통도사·태화사 등3곳에 공식적으로 봉안제석천이 가지고 있던 사리고려에 전해진 기록도 있어조선초 수백과에 이르던 사리명나라 사신이 싹쓸이 해가국내 대부분의 진신사리는통도사에서 분신한 사리들우
‘삼국유사’ 3권 제4 ‘탑상’편은 말 그대로 탑이나 불상과 같은 인위적인 조형물에 대한 기록이지만 드물게 ‘어산불영’ ‘대산 오만진신’ 기사는 자연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탑상’에 실린 기사가 대부분 신라, 그리고 고구려, 백제에 관한 것이지만, ‘파사석탑’과 더불어 ‘어산불영’은 가야에 얽힌 이야기이다.‘파사석탑’ 이야기와 더불어드물게 보는 가야불교 기록 국경 초월 용과 나찰녀 사랑수로왕, 부처님 모셔와 막아귀의한 용 물고기와 법회참석수많은 물고기 모양 바위 남아나쁜 짓하다 부처님께 교화된아프가니스탄 악룡 전설 비슷함께 머물러
우리나라에서 삼보, 즉 불·법·승을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하면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를 말한다. 그중에서 불보사찰, 즉,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찰이 통도사인 이유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유독 이곳의 사리가 진정한 석가모니의 사리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삼국시대가 끝나갈 무렵 자장율사께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 가셨다가 문수보살로부터 직접 이 사리를 받아오셨기 때문이다. 문수보살께서 직접 전해주신 사리이니 틀림없이 석가모니의 사리가 아니겠는가?삼보사찰 중 불보인 통도사석가모니 진신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인문 혹은 김흠순의 부탁으로 20여년(짧게는 10년일 수도 있다) 만에 신라에 귀국한 의상 스님에게는 당의 신라 침공 준비 사실을 알려야하는 긴급한 임무가 있었다. 정말로 신라는 일개 스님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당의 대규모 군사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중국의 동태에 어두웠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김인문이 의상에게 전달했던 내용은 단순한 침략준비 사실을 넘어서 정확한 침략의 날짜나 경로, 책임사령관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의상 스님의 귀국이 스승 지엄의 입적 때문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걸쳐 활동했던 스님들 중에 ‘삼국유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스님은 아무래도 자장(590~658), 원효(617~686), 그리고 의상(625~702) 이렇게 세분을 먼저 손꼽을 수 있겠다. 비록 자장율사는 신라가 백제를 점령한 660년 직전에 입적하셨지만 활동 연대의 일정 기간이 원효, 의상 스님과 겹쳐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의상 스님 당에 들어간 연도삼국유사에 두 개로 기록 돼650년 배 타고 당에 갔다가670년 당 침공 알리러 귀국당으로 떠날 때 원효와 동행원효 해골물
‘삼국유사’ 권5 ‘효선’의 “대성효이세부모”, 즉 “김대성이 전생과 현생의 두 부모에게 효도하다”라는 이야기 속에서 석굴암 공사의 마지막 단계는 이렇게 기술되고 있다. “갈라진 원형의 감실 뚜껑천신 완성”삼국유사 기록아치 위 얹기 전 깨졌다면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것멀쩡한 상태 올려 졌지만세월 흐른 후 균열 가능성‘돌못’이라는 독특한 부재덮개 균열에도 돔 지탱해석굴암 균열에 대한 아쉬움설화로 재해석 놀라운 지혜“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의 뚜껑(龕盖)을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쪽으로 갈라졌다. 화를
얼마전 모 학회가 ‘원효의 사상이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왠지 원효와 문화, 혹은 원효와 예술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의상 스님과 예술’ 혹은 ‘자장율사와 예술’ 같은 개념은 다소 생소하게 들린다. 아마도 그것은 원효 스님의 삶이 다소 자유분방하고 기인의 행동을 보였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삶 자체가 파격이었다는 점에서 예술이 지향하는 바와 어떤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의상, 자장 두 분 역시 불교미술사적으로는 중대한 영향을 남긴 분들이고 이에
‘삼국유사’의 여러 목차 중에서 미술사학자들에게 특히나 관심을 받는 내용은 ‘탑상’편이다. 그리고 이 ‘탑상’편의 시작은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으로 시작한다. ‘연좌’의 사전적 정의는 ‘고요히 앉아 참선함’이므로, 결국 ‘가섭불이 좌선하던 돌’이란 의미가 된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에 성불하신 여러 부처님을 일컫는 개념인 ‘과거불’ 중에서 석가모니 바로 직전에 성불한 부처님이시다. ‘가섭불연좌석’의 주요 내용은 황룡사에는 과거불인 가섭부처님이 좌선하던 돌이 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일단 일연 스님의 기록을 믿고
흥륜사(興輪寺)는 아도스님이 발단이 되어 법흥왕이 시작하고, 결국에는 이차돈에 의해 완결된 신라 최초의 공식 사찰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표적인 사찰들이 이런저런 흔적이나마 남기고 있는 것에 비해서 흥륜사는 완전한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조차 불분명하며,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보 역시 없다. 그저 조선시대 문집 등을 통해 15세기에는 이미 터만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쩌면 황룡사처럼 몽고의 침입 때 불탔는지도 모르겠다.이차돈 순교에 의해 완결된신라의 최초 공인된 사찰금교 동쪽
황룡사 금당에 봉안되어 있었던 신라 3보의 하나인 금동장육상은 진흥왕대인 574년에 완성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이루지 못하자 불상을 만들려던 금동재료를 배에 실어 바다로 떠나보냈고, 이 배가 신라에 도착하여 진흥왕이 거둬 완성한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린 이 불상의 복원적 고찰에 대해서는 2015년 3월 ‘쟁점, 한국불교미술사’ 연재에서 다룬바 있다. 이번에는 그 불상이 어디서 제작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장육’이란 1장 6척의 준말5.6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공식적으로는 29대 법왕의 아들이지만 ‘삼국유사’ 무왕 기사는 다소 특이한 그의 출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에 과부가 되었는데,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어릴 때는 마(서여, 薯?)를 캐다가 팔며 생업을 이었기에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도대체 왕의 아들인데 그 어머니가 왕자를 낳기도 전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얘기고, 또 왕자인데 어릴 때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백제의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반면, 이들에 둘러쌓인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였다. 이때 역할을 한 사람이 아도(我道) 스님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무려 네 사람의 아도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아니, 정확히는 세 명의 아도와 한 명의 묵호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연 스님 자신도, 또 학자들도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아도에 관한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담긴 기록엔무려 4명의 아도가 등장 역사의 퍼즐들 맞춰보면509년 신라 건너왔을 것신라의 반고구려 정서로 모례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