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역경을 딛고 목표를 성취한 한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더불어 끊임없는 내적인 욕구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우리가 2500여년 전의 붓다, 또는 공자나 노자, 예수를 오늘날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취한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난의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 더욱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우리는 붓다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택하는 순간, 고난의 길은 예견된 것이었다. 6년간의 긴
붓다는 열반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알고 고향 까삘라왓투를 향해 마지막 교화의 여정을 떠났다. 때는 6월, 낮 최고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는 더운 날, 중생을 향한 자비심과 연민으로 교화를 결심했다. 붓다는 약해진 몸을 이끌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북쪽으로 향했다.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그 누구보다 체력과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에 복잡한 삶의 흐름 속에서도 방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건강에 이상신호가 나타났던 시기에도 끝없이 연주여행과 작곡, 지휘를 강행했다. 그의 노년의 작품들은 청년기의 작품에 비해
붓다는 만년에 몇 가지 큰 아픔을 겪었다. 데와닷따의 반역과 사꺄족의 멸망, 그리고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열반이 그것이다. 붓다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승가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으며 붓다를 도왔다. 그들이 있었기에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둘은 붓다보다 연상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붓다를 존경했다.사리풋타는 자신의 열반을 예견하고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 붓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린 뒤, 고향인 날라까로 돌아가 자신이 태어났던 벽돌집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붓다는 사왓티에 탑을 건립하고 그의 유해를 안치하도록 했다.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20세기의 음악사에서 상당히 중요하고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곡가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기에는 진보적이지만, 보수적인 음악인들에게는 외면 받는 모호한 입지에 놓였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세계는 상당히 진취적이고 새로웠지만, 수 백 년 동안 계속되던 조성음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경향과는 방향이 달랐다.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기교와 터질듯 한 화성의 표현력은 그만의 강렬한 색채였다.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사회적 변화에 맞춰 유행하던 사회 풍자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많이
19세기는 서구사회에 큰 변화의 물결이 넘치던 시기였다. 근대적 산업화의 초석, 정치적 사회적 변동과 더불어 예술에 있어서도 주체성과 내면의 감정이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대두되었다. 음악 양식으로서의 낭만주의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의 시작까지를 아우른다. 19세기 예술 중 가장 낭만성이 짙은 예술 장르는 단연 음악이었다. 자연, 이국적 풍경, 개인의 의식와 민족주의적 감정들에 기반을 둔 낭만주의 음악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낭만주의는 영어의 ‘로맨티시즘(romanticism)'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음악은 낭만주의를 표
샤까족의 일원이었던 데와닷따는 까삘라왓뚜를 방문한 붓다의 설법을 듣고 밧디야, 아누룻다, 아난다 등 여러 왕자들과 함께 출가하게 되었다. 붓다의 사촌, 또는 야소다라의 남동생이라고 전해지는 그는 출가 후 신통력과 위력을 갖춰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도 뛰어났으며 사교성까지 있었기어 그의 주위에는 항상 권력과 재물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라가자하의 죽림정사에서 그 명성을 더해갔던 데와닷따는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자따삿뚜의 스승이 되었고 그 위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데와닷따의 추종자가 된 아자따삿뚜는 그를 위
바이올린과 첼로의 중간 음역을 지닌 비올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진 악기이다. 바이올린이 화려한 소프라노라고 한다면 비올라는 따뜻하고 온화한 알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음성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첼로의 음색보다 조금은 어둡지만 침착하고 세련된 매력을 가졌다. 또한 비올라는 실내악이나 규모가 있는 관현악에서 중후한 첼로와 개성 강하고 다소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중재자와 같은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와 비올라를 위한 그림동화 작품 113(Märchenbilder)'은 잔잔하면서도 개성 있는 서정성
19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파리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테르링크, 보들레르, 랭보 등의 문학가들이 중심이 된 ‘상징주의’ 문학은 직설 화법보다는 암시를 통해 아이디어를 나타내고 독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저변의 잠재의식과 내면적인 느낌, 인간의 심리 상태 등을 은유를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문학은 프랑스 문화의 새로운 부흥기를 열었다. 모호한 윤곽, 몽롱한 텍스처, 빛과 색의 유희로 대표되는 인상주의 화풍 역시 주목할 만한 문예사조였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의 화가들은 형태보다는 색채를 우선하는 즉각적이고 주관
‘바위 위에서 저 아래 골짜기를 향해 노래하네/골짜기의 메아리는 아득하게/멀리 멀리 계곡에 울려 퍼지네/내 목소리 더 멀리 울려 퍼질수록/저 아래로부터 또렷이 되돌아오네./내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그 곳의 그녀가 더욱 그립구나./깊은 번민 속에 기쁨은 사라지고,/희망을 잃고, 외로움에 빠져든다./노래는 숲을 울리며,/밤새 간절한 그리움으로 들려온다./어느새 노래는 알 수 없는 황홀함으로/내 마음을 하늘로 이끌어 날갯짓 하게 하네./봄이 왔다./나의 기쁨인 봄./이제, 여행을 가야지.’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가곡 ‘바위 위의 목동(
스무 명의 자녀를 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상당히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 첫 결혼에서 얻은 5남 2녀 중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자랐다. ‘함부르크의 바흐’라고 불리게 된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항상 작품을 쓰는데 매진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차분하고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집안은 항상 즐거움이 넘쳤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이는 때는 우리가 공부를 게을리 할 때 뿐이었다.”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13명의 자녀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활동 무대는 주로 라자가하 일대였다. 당시에는 붓다 이외에도 영향력 있는 여러 종교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중 산자야 학파에는 뛰어난 두 명의 수행승인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있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누구든 먼저 불사의 경지에 이르면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녹야원의 비구였던 앗사지를 만나게 된 사리풋다는 단정하고 여법한 그를 보고 감동하게 되었다. 그는 앗사지에게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어떻게 가르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앗사지는 “석가족의 아들로 출가한 위대한 사문인 붓다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작곡가 마누엘 드 파야의 ‘불의 춤(Danse rituelle du feu)’을 들으면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받는다. 원래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설을 줄거리로 하는 파야의 발레음악 ‘사랑은 마술사(El Amor Brujo)’의 13곡 중 한 곡으로, 여러 악기에 의해 편곡되어 연주된다. 피아노곡으로 편곡된 이 작품은 특유의 호전적인 분위기로 불의 이미지가 극대화 되고 있다.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긴 트릴로 시작하는 이 춤곡은 지속되는 불협화음과 옥타브, 하강하는 선율 등이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 준다. 모호한 조성의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