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 지식인들이 불사리에 관련한 논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의 주요 관점이 불사리의 유래와 역사, 사리 봉안의 의미 등에 초점이 맞춰졌기에 이후 자연스럽게 사리신앙에 관한 학문적 지형(地形)이 형성됐다. 김대은(金大隱, 1899~1989)의 ‘사리와 탑파의 연기’(‘불교’, 1930), 김영수(金映遂, 1844~1967)의 ‘통도사의 사리와 가사’(‘一光’, 1936) 등인데, 이들의 담론이 오늘날 학계의 연구 방향,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선구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어려운 시대였지만, 불교도들
우리나라에서 근대(近代)는 조선 왕조가 근대적 정치사회 체제를 갖추던 19세기 후반부터, 1910~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될 때까지로 설정하는 게 보통이다. 일제가 그들의 불교를 강권함으로써 우리 불교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불교계가 침체기에 빠진 시기라 사리신앙 자료도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근대기부터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기록 매체가 등장했다. 신문은 속성상 굵직한 정치사회 뉴스부터 저잣거리의 흥미로운 사건까지,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들이 취재되고 지면에 실리기에 생활상과 풍속을 알려 할 때 유용한 자
사리신앙과 경전은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 모두 고대에 불교가 대중화하는데 중심이 되었던 두 축이었다. 특히 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니, 사찰에 가면 누구나 석가모니 진신을 배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신앙이 더욱 두터워졌기 때문이다.사실 오늘날에야 누구나 탑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불교가 처음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탑의 의미나 기능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사리가 있으면 탑이라고 하고, 사리가 없으면 지제(支提)라고 한다.”(‘법원주림’)라고 하여 탑에는 사리가 봉안돼야 한다고 말
사람들이 탑에 지극한 예경(禮敬)을 드리는 까닭은 그 안에 봉안된 불사리 때문이다. 모든 불교국가 온 누리마다 오랜 세월 동안 숱한 탑이 세워진 것도 결국 사리신앙의 표현과 다름없다. 불사리를 공경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탑을 세우는 공덕이 무량함을 언급한 이야기는 거의 모든 불교 경전마다 빠짐없이 강조되곤 했다. 탑을 세우는 일, 곧 조탑(造塔)의 공덕을 주제로 한 경전도 있으니, 다라니경 계열의 경전들이 그렇다. 본래 ‘다라니’란 지혜나 삼매 또는 산스크리트어 음을 외는 진언(眞言) 등을 두루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자로는 총지
불사리는 부처님의 유신(遺身)인데, 그를 가리키는 용어가 다양하여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에 조금 복잡한 면이 있다. 이런 까닭은, 부처님 육신에서 부처님의 정신을 찾고, 나아가 불교를 각계각층에 전파하기 위해 사리의 범위를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개념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불사리는 부처님의 신골(身骨, 혹은 遺骨 또는 靈骨)인 진신(眞身)사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 경전인 법신(法身)사리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또 진신사리는 다시 전신(全身)사리와 쇄신(碎身)사리로 나뉜다. 전신사리는 신골의 일부가 아닌, 말 그대
사리를 담은 사리기(舍利器)와 그것을 꾸미기 위한 물품들을 통틀어 사리장엄(莊嚴)이라 한다. 미술이나 문화 그리고 신앙에는 나라마다 다른 민족성이 나타나곤 하는데, 사리장엄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사리장엄은 엄숙미가 강조되었고, 중국은 웅장함, 일본은 화려번화, 우리나라는 절제된 화사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 같다.그런데 사리장엄에는 기본적으로 불사리를 경배하는 마음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장엄하면 불사리의 위의(威儀)에 합당한 장엄이 될까 하는 고민이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탑(古塔)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에서 아름다운 조형
한일 양국의 불교사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아스카·나라 시대(6~8세기)는 불교가 처음 전래하고 발전한 시기로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한다. 또 헤이안 시대(8~12세기)는 불교가 일본 특유의 정서를 담아내며 융성했던 시기로 우리의 통일신라 및 고려 중기와 겹친다. 이 두 시기에 사리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면 일본 사리신앙의 큰 흐름을 이해하기가 쉽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열성을 보였던 이는 아스카시대 융성의 장본인으로 일컬어지는 쇼토쿠(聖德, 574?~622)태자였다. 고구려의 혜자(惠慈), 백제의 혜총(惠
우리와 일본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아주 가까워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할 것 같은 두 나라인데,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워낙 깊고 커서 그런지 외려 서로를 외면하는 일도 적잖다. 이런 태도는 두 나라 사이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국가 간 교류는 호혜(互惠)를 바탕으로 한 상호작용이고, 더욱이 종교와 문화는 주고받는 양쪽 모두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일본의 불교가 발전하는 데는 우리나라 삼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사리신앙이 널리 확산하는 데도 우리의 도움은 큰
중국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500년 넘게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에 철학적 사유 방식과 논증이 크게 발달해 사상의 개화기를 맞았다. 또 도교가 성행하며 수행(修行) 경험도 쌓았다. 불교가 전래되자마자 선교(禪敎) 양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불교라는 고차원의 학문 혹은 종교를 섭취할 만한 토양이 잘 갖춰져 있었던 덕분이었다.하지만 세상일이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오랜 전법 과정 동안 개인이나 승단 입장에서 큰 난관에 맞닥뜨리거나 도저히 해결해 낼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때마다
중국에서 사리신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는 수(隋, 581~618)‧당(唐, 618~907)에서 오대(五代, 907~979)에 이르는 약 400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은 남북조(420~589)시대로, 대략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에 송(宋)을 비롯해 그 뒤를 이은 제·양·진 등 한족(漢族) 네 나라, 북쪽에는 북위(北魏)와 거기에서 갈라진 동위와 서위, 북제와 북주 등 선비족(鮮卑族) 다섯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남북조 각국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문화와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중국은 불교를 후한(後漢)시대인 58~75년 사이에 인도로부터 전해 받은 뒤 저명한 불교학자들에 의해 사리신앙의 이론적 근거도 마련되면서 불교 전법의 한 축이 되었다. 446년 전국 사찰의 불상을 부수며 불교를 탄압했던 ‘측천무후의 법난’ 같은 큰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사리신앙을 중심으로 한 굳건한 신앙으로 극복하며 불교의 황금기를 일궈냈다. 9세기 이후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불교가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는 데는 중국의 역할이 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을 이어온 중국 사리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고 다비 후 나온 한 말 여덟 되의 사리는 우여곡절 끝에 골고루 나누어져 8기의 탑에 봉안되었다(이를 ‘근본 팔탑’이라 하는데, 8탑이 아니라 9탑, 혹은 10탑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동안 이 탑들을 중심으로 사리신앙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리신앙이 인도 전체로 볼 때 과연 보편적 현상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리 혹은 그를 담은 탑에 직접 경배하여야 하는데, 단 8기의 사리탑만 가지고서는 사리신앙이 확산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리신앙이 인도 전역으로 퍼지게 된 데는 아소카(Aso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