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비교를 마치고자 한다. 원고를 마감하면서 1990년대 초 한국에 상좌부 위빠사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보급했던 거해 스님과의 일화가 다시 생각난다. 거해 스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첫 호에서 소개 한바 있다.초기불교의 대승 비판은불자들에게 극심한 혼란대승은 초기 근거하지만훨씬 더 수승한 이치 담아당시 필자는 어느 도심 포교당에서 거해 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개 절에서 열리는 법회는 낮 12시쯤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난 후에 진행하는
인간과 세상을 파괴하고 불행을 가져다주는 악마나 마군은 과연 존재할까? 적어도 종교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친다.기독교의 경우 악마는 그들의 창조신 여호와에게 대적하는 존재로 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인간들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 존재이다. 본래는 신의 총애를 받던 천사장이였는데 스스로 신의 지위에 오르려다 신의 노여움을 사 악마가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지금도 악마가 활동 중이며 신과 인간을 분열시키고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린다고 말한다.과거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이
불교에 관한 지식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인상 깊은 불교의 교리를 물어보면 대부분 공(空)이라고 말할 것이다. 공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차별되는 불교를 대표하는 가르침이다.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구절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공은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의 의미를 물어보면 이에 대해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불교를 상당히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공을 빈 공간이나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원리로 오해하기도 한다. 더러는 공을 과학적 입장에서 풀이한다며 물질과 현상의 근원
종교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각(覺)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이다. 계시의 종교는 신이나 절대자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특정한 인간에게 계시를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각의 종교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지혜를 계발하고 능력을 연마하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불교나 유교가 대표적이다.불교는 깨달음에 기반한 종교부처님의 행적이 교리의 일부초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실제사건 중심 설득력 높아대승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비교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성(佛性)이다. 초기든 대승이든 불성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가지고 있다. 불성을 진아론(眞我論)이나 유아론(有我論)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초기불교에서는 불성을 인도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은 아트만의 변용으로 알고 있기도 하고 대승불교에서도 불성을 영원불변하는 실체개념으로서 진아(眞我) 혹은 절대적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는 불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생긴 무지의 결과다.초기불교는 불성 개념 없고중생도 무명으로부터 연기대승불교 교리 토대
불교는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괴로움으로 본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제자 아난다에게 “고(苦)를 보는 자 열반을 본다”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중생들이 겪고 있는 크고 작은 괴로움들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진리도 알 수 있다. 초기불교, 무명은 제거 대상세계 또한 더럽고 추한 존재대승에서 무명의 본질은 공청정한 불성의 왜곡된 작용무명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세상을 부정·긍
불교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종교다. 불교의 뿌리인 부처님은 세상을 창조한 신도 아니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자도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부처님을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위대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인간이지만 그 위치는 세상을 창조한 신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더욱 높은 곳에 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초기는 당시 예법에 따라 예경대승은 완전한 조복 형식 취해인간인 부처님에 대한 예법이제법본성 향한 공경으로 진화이때 동서남북의
역사적으로 볼 때 세상에 출연하신 부처님은 석가모니 한 분 뿐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부처에 의해 세워진 가르침이다. 그 분이 없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는 많은 부처님들이 석가모니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나온다.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이나 스물네 분의 부처님 혹은 천 분의 부처님 설 등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출현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된다. 한시대 한분의 부처님 출현초기불교는 엄격한 수기관동시대에 여러 부처님 출현대승은 수기를 방편으로 간주초기경전은 한 시대에 한분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부처님 교설 중에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다. 그러나 이는 초기불교의 삼법인이고 대승불교에서는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포함시킨다. 초기불교는 삼법인이라는 말 대신 삼특상(三特相)이라는 용어를 쓴다. 근래 한국불교가 상좌부불교와의 교류가 활발해져서인지 삼법인을 무상(無常)·무아(無我)·고(苦)로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삼법인이라는 말 대신에 삼특상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초기는 삼법인을 진리로 보고 대승은 이 또한 공함으로 봐모든
중생은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한다. 사람이건 미물이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괴로움을 따르고 즐거움을 배척하는 존재란 없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 가치로서의 즐거움을 불교에서는 ‘감각적 쾌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중생의 인식기관인 육근(六根),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의미한다. 중생은 육근을 통해 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육경(六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된 대상에 따라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방식 가운데에 무기(無記)라는 것이 있다. 무기는 제자들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하는 방법이다. ‘독전(毒箭)의 비유경’에는 부처님 제자 마륭까풋타 이야기가 나온다. 마륭까풋타는 부처님을 찾아와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문제를 비롯해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를 질문했다. 마륭까풋타의 질문에 부처님은 침묵한다. 의와 법에 상응하지 않고 지혜와 깨달음과 열반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대신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마륭까풋타의 질문 중 부처님의 사후에 관한 내용
수행은 불교의 이상계에 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불교수행의 범주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란 쉽지 않다. 팔정도(八正道)·육바라밀(六波羅蜜)·십선행(十善行)·사무량심(四無量心)·사섭법(四攝法)·삼심칠조도(三十七助道) 등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수많은 방편을 수행으로 본다면 수행의 범주는 대단히 넓다. 하지만 불교수행을 논한다면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학과 혜학은 모든 불교수행의 근본이다. 그러나 정학과 혜학을 수행하는데 있어 초기와 대승불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초기불교건 대승불교건 정
불교에서는 마음(心)을 중시한다. 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의지처로 마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법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들로 심(心)·의(意)·식(識)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때 심과 의와 식이라는 용어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초기불교는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심위법본(心爲法本), 자정기의(自淨其意), 식생고명색생(識生故名色生) 할 때에 심이나 의나 식이 마음을 뜻하는 말들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다.초기불교 육식으로 마음
불교를 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을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지나치게 괴롭게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왜 이 세상이 괴로움이라고 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범부들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회의일 것이다. 그래서 일면 이해되는 측면이 많다.사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이 세상은 머물만한 곳이 못 되는 것으로 나온다. 초기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설은 인간들이 누리는 보편적 행복이나 즐거움을 고통으로 보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가 아라한을 목적으로 수행한다는 시각에서
불교는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수행이 없으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수행의 정의와 범주를 똑 부러지게 명확히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으키는 모든 선한 행위를 수행의 정의로 범주로 삼는다면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초기 대승 모두 해탈지향수행 결과 동일하지 않아초기불교 번뇌 제거 초점대승은 불성 발현에 주목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 깨달음과 열반, 해탈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고 해서 내용마저 동일하지는 않다. 똑같은 목적을 향해 수행하지만 내
스승의 수준이 높으면 제자들의 수준도 그에 맞게 높아야 한다. 초기불교의 교리를 한 단계 뛰어넘어선 대승불교에서 부처님 제자들은 초기불교와 많이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대상은 비구들이 대부분이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들은 비구만 있는 것은 아니고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도 있지만 법은 주로 비구들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법을 설하는 방식도 초기불교는 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동시에 법을 설하기 보다는 개인이나 작은 무리들을 향해서 그때그때 법을 설한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대하는 예법이나 청법의 방식도 매우 소박하고 단
사람들은 무상을 존재가 사라지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꽃이 시드는 것을 무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무상은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의 무상은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뿐 아니라 나타나는 측면까지 포함된다. 지금 태어난 어린 생명도 무상한 것이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도 무상한 것이다. 무상은 병듦과 죽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태어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상이란 찰나도 그냥 머물지 못하고 변해간다는 의미기 때문이다.이런 무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또한 다르다. 존재가
보살은 부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이며 세상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는 구원자다. 누구든지 부처가 되기를 서원했다면 반드시 보살의 길을 밟아야 한다. 보살의 길은 바라밀의 실천에 있다. 바라밀은 ‘방편’과 ‘완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보살이 행해야 할 실천덕목이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자비·출리·결단·서원 등 열 가지를 비롯해 자신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갖가지 행위들이다. 부처님이 불과에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은 바라밀의 실천을 통한 보살도에 있다. 단순히 계행과 선정과 명상을 닦아 최
불교에서 연기론을 빼면 나머지 교리들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연기론이었으며 제자들에게 수행을 통해 확인시키려 했던 것도 연기론이었다. ‘잡아함경’ 요본생사경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밝히고 있다. 연기론이 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연기란 팔리어 ‘Paticca Samuppada’에서 비롯된 용어다. ‘무엇무엇 때문에 일어난다.’ ‘무엇무엇 때문에 생겨난다.’라는 뜻이다. 어떤 법이 일어나고 생길 때에는 어떤 조건에 의지해야만 일어나고
불교는 중생을 윤회하는 존재로 본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 여정은 계속된다. 중생이 윤회를 하는 까닭은 무명(無明)과 업(業) 때문이다. 이를 끊지 못하면 반복되는 생사로부터 탈출 할 수 없다. 이런 무명과 업을 모두 청산하고 윤회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하신 분이 있다. 부처님이다.부처님은 무명과 업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후에 대해 부처님 계실 때부터 많은 논쟁을 낳았다. 부처님이 몸을 버리고 입멸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