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령 잠무&카슈미르 주(州)의 여름 주도인 스리나가르에서 시작한 카슈미르/간다라 기행을 파키스탄 령 아자드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에서 끝맺으려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아쉽지만 그 초입인 만세라에서 끝맺기로 하였다. 마침 그곳은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이 있는 곳이며, 베삼―길기트―파미르의 쿤자랍 패스를 넘어 중국의 서쪽 끝인 카슈카르에 이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KKH)를 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여러 지역을 20여 일에 걸쳐 임무를 수행하듯 답사하였다. 스리나가르―바라물라―아반티포라-아크누르―암
당초 스와트 지역을 답사한 후의 계획은 밍고라에서 북쪽의 샹글라 고래(해발 2134m)를 넘어 베삼이라는 곳에서 아쇼카 왕 암각법칙이 있는 하자라 지역의 한 도시인 만세라로 가,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무자파라바드로 가는 것이었다. 무자파라바드는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Azad Jammu & Kashmir)의 주도(州都)로, 1948년 유엔에 의해 정전선이 그어지기 전까지 피르판잘 산맥을 넘어 우리-바라물라-스리나가르(총 170㎞)로 가는 길목이었다.파키스탄령 카슈미르로 입경은외국인이라 불허, 발길 돌려서카슈미르 행 출발점 머리로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오늘하루 밍고라 인근 불적을 대충이라도 돌아볼 셈으로 호텔 지배인을 통해 택시를 예약해 두었다. 그러나 오전 6시에 오기로 한 택시는 날이 밝고 한참을 지나서도 오지 않는다. 지배인을 깨워 다그친 끝에 7시 무렵에야 왔다. 불현 듯 불려나온 듯한 운전기사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검은 피부에 흰 곱슬 수염을 한 파슈툰 노인이었는데, 보기와는 달리 매우 친절하였다. 또한 매우 헌신적이었다. 택시 또한 1970∼80년대에 출고된, 한눈에도 고물이다 싶은 토요타 코롤라였는데, 보기와는 달리 전혀 덜덜거리지
스와트의 중심도시는 밍고라이다. 고대 불교시대 이래 이 지역의 명칭은 발리그람(Baligram)이었지만, 19세기 영국에 저항하여 스와트 독립국을 세운 아쿤드 압둘 가프르(1793∼1878)의 통칭인 사이두 바바(Saidu Baba)의 이름을 따 사이두 샤리프로 바뀌었고, 20세기 초 인근에 상업지역으로 들어선 밍고라가 오늘날 이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가 되었다. 밍고라는 말하자면 사이두 샤리프의 신도시인 셈이다.제1·제3 두 곳의 승원터가 존재3유적은 언덕 이용한 굴원 형식1유적지 정면에 원형기단 대탑대탑 둘레엔 수많은 소형
본 연재 프롤로그에서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갠지스 강 유역이 불타 현생의 무대였다면 간다라는 본생의 무대였다고 하였지만, 스와트 강을 끼고 있는 웃디야나(烏仗那國)는 전설에 따르면 본생은 물론이고 현생의 부처님과도, 부처님의 가계와도 관련된 불연(佛緣) 국토이다. 부처님은 이 나라의 중생들을 위하여 중국(인도의 중국(中國), 즉 중천축의 마가다)에서 이곳 변방까지 날아와 아파랄라(Apalāla) 용왕을 조복시켰다.아름다운 집·정원이라는 뜻으로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려지던 곳정부군이 2009년 탈레반서 탈환인근에 신도시인 밍고라
“이 땅에서는 어떠한 생물도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중략)…이전에 황실의 주방에서는 수백천의 생물들이 식사를 위해 도살되었지만, 법의 칙령을 반포하는 지금은 단지 세 마리의 동물, 두 마리의 공작과 한 마리의 사슴만이 도살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슴은 정기적으로 도살되는 것이 아니며, 이 세 마리의 동물조차 앞으로는 도살되지 않을 것이다.”아쇼카는 인도 통일 후 무력 아닌법에 의한 게 진정한 승리 깨달아전국각지에 법의 칙령을 반포하고널리 알리려 바위·돌기둥에 새겨마애법칙
현장(玄)은 당시 간다라는 이미 부서지고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하였지만 1000여 곳의 승가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당시 수도였던 차르다사나 페샤와르에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발굴된 승원터는 모두 페샤와르 북부 마르단의 산악지역에 존재한다. 카니시카 승가람이나 대탑과 같은 도시근교 평원의 승원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탁티 바히(Takhti Bahi), 사흐리 바롤(Sahri Bahlol), 자말가리(Jamal garhi), 시크리(Sikri) 등이 마르단 지역의 대표적인 승원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이 간다라의 수도를 푸루샤푸르(페샤와르)로 옮기기 전의 수도였던 푸쉬칼라바티(Pushkalavati)이다. 푸쉬칼라바티는 ‘푸른 연꽃(靑蓮華: puṣkara)의 도시’라는 의미로, 오늘날 차르사다의 옛 이름이다. 차르사다는 페샤와르에서 동북쪽으로 30㎞ 떨어진 도시로 카불 강과 스와트 강을 건너야 한다. 현장 역시 푸루샤푸르의 카니시카 가람에서 동북쪽으로 50여 리, 큰 강을 건너가면 푸쉬칼라바티성(布色羯邏伐底城)에 이른다고 하였다. 간다라의 옛 수도였던 만큼 당연
카니시카 왕의 700척 높이의 장엄하고도 화려하였던 대탑도, 협(파르슈바) 존자가 맑은 바람(淸風)을 일으켰고 세친 논사가 ‘구사론’을 지어 지극한 공덕을 이었던 그의 승원도, 부처님이 사용하였던 두말 들이 큰 발우도 오늘의 페샤와르와는 무관하다. 페샤와르 박물관 1층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완벽한 도상(圖像)의 불상 또한 오늘의 페샤와르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크고 작은 저 많은 불상과 불두는 아득한 시간 저 너머 존재하였던 것들이다. 그 때 저것들은 탁티바히나 사흐리 바흐롤의 감실에서, 스투파 기단에서 회랑에서 기
“대 스투파 서쪽에 있는 오래된 가람은 카니시카 왕이 세운 것으로, 높다란 2층집(重閣)들과 늘어선 묘당들, 층층의 누대(層臺)와 그 사이로 동굴처럼 깊숙이 들어선 집(洞戶)들로 이루어져 있다. [왕은 이곳에] 고승을 초대하여 그들의 뛰어난 덕을 현창하기도 하였다. 비록 허물어졌을지라도 여전히 빼어나다. 승도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다. 가람을 세운 이래 간간이 뛰어난 사람(異人)이 배출되었다. 논을 지은 이들과 깨달음을 증득한 이들로 인해 맑은 바람(淸風)이 불고 지극한 공덕(至德)도 이어져 왔다.고르
1909년 3월 당시 페샤와르 박물관의 미국인 큐레이터 스푸너(D. Brainerd Spooner)는 근교 샤지키데리에서 불타의 사리와 재가 담긴 금동용기를 발굴하였다. 거기에는 카로스티 문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모든 구법승이 찾아 예배하고언제나 밝은 빛을 발한다 해서‘작리부도’라는 이름으로 불려1909년 3월 페샤와르 박물관미국인 큐레이터인 수푸너가불타 사리 담긴 금동용기 발굴팻말은 물론 아무런 흔적도 없어지금은 지역사람들도 존재 몰라“카니시카푸라(당시 푸루샤푸르)의 대왕 마하라자 카니시카의 갸륵한 선물인 향
말대로라면 ‘향기로운 땅’인 간다라(Gandhara)의 고대 중심도시는 탁샤쉬라나 푸쉬칼라바티(오늘날 차르사다)였지만, 2세기 쿠샨제국의 카니시카 왕이 푸루샤푸르(Puruṣapur)를 수도로 정한 이후부터 이곳이 간다라의 중심이었다. 아마도 중앙아시아나 박트리아 땅에서 카이버 패스(고개)를 넘어온 그들이 탁샤쉬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인더스 강을 건너야 하였고, 푸쉬칼라바티로 가기 위해서도 카불 강과 스와트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인도서 중앙아시아 나가는 관문‘변방의 요새’ 뜻 지닌 폐샤와르무굴제국 시대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