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종교의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권력과 세속의 정치인가를 구별 짓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다. 서로의 전체관이 혼돈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정치를 무시하는 종교인은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라고 했다. 종교란 이 세상을 진리적으로 구제하는 일 아닌가?그런데 여기서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려보자. 한 나라의 영도자이기를 목표로 하는 정치인이라면 그의 발언은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이 빈번히 하나님 운운하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앙은
매듭 없이 얽힌 실꾸리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 해결할 목표를 셋으로 요약 해 본다.첫째로, 법회 중심으로 사찰 운영 형태를 전환해야한다. 모든 교당은 법회 중심으로 운영하고 불공은 이에 부수되게 해야 한다. 일체 모임의 날짜를 일요일 중심으로 개혁해야한다. 법회 중심으로 하기 위해선 모든 승려의 교육수준이 균등해야하고, 하루 속히 모든 승려가 균등하게 대학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산중 사찰은 전통적으로 음력날짜를 중심으로하는 것이 도리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거듭
복법문으로 어떻게 천만인의 심장을 뒤흔들 수 있으며, 그런 것으로 어떻게 민족의 성격을 개조하고, 인류의 도덕적 심성을 변혁시키고, 중생의 업행을 개혁시킬 감화력을 발동시킬 수 있겠는가? 같은 복이라 해도 개의 복과 사람의 복이 같을 수 없으며, 스님이 복으로 여기는 것과 세속인이 복으로 여기는 것에는 다른 차원이 있어야 한다. 스님네와 불교가 개척한 차원 다른 복사상에 의해 세속적인 낮은 복사상을 끌어 올려 그 수준을 높여가는 범인류적인 진리의 일대항쟁이 불교의 저력 속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무량중생을 일체적으로 제도하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삶의 참 뿌리가 되는 진공, 또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묘유의 길이 얼버무림 없이 명시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철학적 사색가들의 공통된 견해요, 이조 오백년의 천대 속에서도 한 번 고개를 쳐들어 볼 뜻조차 가져보지 못한 것은 이 방향에서의 불교진리의 빈곤성 때문임을 불교인은 천만 번 명심해야 한다. 불교가 자신이 진정한 저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불교는 현실에 있어서의 중생 삶을 계도하고 인간의 정신생활에 있어서 새 전망을 약속하며, 이 국민의 도덕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사회적 양심을 깨우치며, 정
아무 사상도 기준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저 세상을 허망타고만 하다가 결국 세상일에 더 어둡고 더 약해져서 세상일에 더 잘 빠져드는,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하여’ 도리어 하찮은 일에도 세상에 더 잘 말려드는 그런 불교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피하는 자는 결국 피할 수도 없다. 정복해야 된다. 차지해야 된다. 부서뜨려야 한다. 우리는 이 나라, 이 역사, 이 백성, 이 사회를 불교가 책임진다는 기백을 보이자. 왜 자기 영토를 빼앗기는가? 마음씨가 좋아서 빼앗기는 것인가?이제는 스님들이 법문하는 내용도 과거와는 달라져야한다.
우리는 이제 이 시대가 말세라는 그런 패배주의적인 무기력한 자기변명을 청산하고 세상이 이런 것은 중생 업이 두터워 과보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교가 그만큼 세상 민심을 교화 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과 무책임성 때문이었다고 해야 한다. 허망하다 해서 될 일인가. 허망이라 해도 불교로서 허망타 할 것과 허망타 하지 않은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허망한 짓은 절대 아니하고, 그 허망치 않은 것은 부지런히 하는 종단이 돼야 할 것이다. 우리 불교가 오늘날 이 모양으로 된 것도 이 종단이 병든 무심주의에
이 모두가 내용 없는 ‘호국불교’의 깃발 아래 불교 사상성의 길이 온통 막혀버린 데서 초래된 슬픔들인 것이다. 정치를 대할 줄 모르는 불교의 자기 손실이 이렇게 커졌다는 것, 또 커진다는 것을 왜 스님들은 볼 줄을 모르는가. 불교는 중생구제의 종교요, 인간구제의 종교이며 사회와 세계와 한 시대와 문명을 구제하는 종교이면 국가는 그 속에서 부수적, 결과적으로 잘 될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불교는 도리어 국가를 감시하고, 불교와 부처님의 정신에서 어긋난 국가의 소행을 비판하고 꾸짖고, 백성의 생활을 돌보는 입장에 서야 했을 것이고, 불교
불교는 역사적으로 민중과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서 민생의 고통을 대변해 주며 가난한 사람을 더 연민히 여기고 가까이 맞이하려는 불교정신의 강한 독자성과 자립의 길을 개척해 내지 못했다. 언제나 왕권과 부호의 그늘에 기대어 중생을 제도하는 종교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중생과 세상의 도움에 손 내미는 자립 아닌 의타적 불교가 된 결정적인 원인도 ‘호국불교’다. 불교가 안일에 빠져, 순수히 불교적인 사상으로만 국가사회를 상대할 불교 고유의 사상세계를 개척할 현실의 필요성에 눈뜨지 못했던 것도 그 원인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가
돈이라면 똥 묻은 것도 좋다하는 그런 사람은 실로 폭이 넓은 이도 아니며, 무애인도 아니요, 오히려 그런 이는 도리에 어둡고 욕망에 오염된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의와 원칙을 지지함에 목숨도 두렵지 않노라’ 할 그런 걸림 없는 무애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억만가지 이익도 원칙과는 바꾸지 않겠노라’ 할 그런 무애는 없는 것인가? 아무렇게나 하고 적당히 형식도 잘 깨뜨리는 사람은 무애인도 아니며 푹 쉰 사람도 아니요, 오히려 의지도 약하고 이익에 어두우며 경계에 물듦이 심한 사람이다. 오늘날 불교가 무사상에 빠지고 노덕스님들이 한 결
여기서 사상이라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게 없다고 본다. 그것은 종교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 또 종교적 입장에서 불교적 입장에서 내려지는 일정한 가치 판단이 없다는 말이다. 종교인으로서 불교인으로서, 죽어도 해야 하고 양보할 수 없다 할 종교적인 어떤 행동노선이 있어야 할 텐데, 도대체 우리에겐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사상이 없어졌고 원칙이 사라진 것이다. 어떤 어른을 인격적으로 믿고 전망을 가지고 일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분의 사상이 모호하여 어떻게 달라질지 그 분들의 인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대체 불교
오늘날 한국불교의 노덕(老德) 스님네들이 비록 수행의 연륜은 많이 쌓고 혹 어떤 지견까지 얻었다고는 하나 실제에 임하여서는 왕왕 자신들의 수행에 대한 신빙성조차 의심을 받는 모순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분들이 출발에서부터 사상성이 너무나 결여되었던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오늘의 젊은 스님들도 이 점을 소홀히 하면 결국 우리들도 우리의 선배 노덕 스님네들의 전철을 되풀이하게 될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일체 중생 구제한다는 불교서지금도 ‘호국’ 자랑처럼 내세워자기비판·자기반성 결여 원인내가 왜 국가를 책임지라하지 않고
‘석보상절’만 해도 부처의 전생담과 본생담, 내생담을 통해 높깊은 사상의 피안을 설명했는데, 이 ‘월인천강지곡’은 한걸음 나아가 그 사북을 노래로 엮어 부르는 중에 절로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동시에 정음의 보람을 시험한 찬송가다. 그런데 이것이 한시가 아닌 일상용어를 통해 생활에 결부시킨 점에 의의가 크다.어려운 용어 쉽게 바꾸고인쇄 위해 간경도감 설치현 역경사업 거울로 삼길이러한 시책으로 말미암아 정음의 실용은 새로운 짙을 텄으니 우리 고전의 문자인 가사체(歌辭體)와 언해체(諺解體), 내간체(內簡體)가 이에서 확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