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서 개혁종교였던 불교힌두교 부흥에 점차 흡수 복 기원 민중이 예배대상화 ▲1. 세계 최초 불교 석굴 군투팔리 승원굴. 작년 말부터 1년 이상의 답사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매 다음번엔 그 많은 곳 중에 어디를 택해 어떤 주제로 써나가야 할까가 늘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시작하면 사진 선택, 도면 작업과 더불어 최종 마감 교정까지 2~3일은 족히 걸렸었다. 불교 사원, 석굴, 스투파 탑 유적을 한국 절과 비교하면서 기존에 없던, 기존 정설을 상당수 뒤집는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면서 보람을 느꼈다. 7월에는 이 내용을 마곡사 옆 조계종 전통불교문화원에 가서 2박3일 동안 스님들에게
암반 절벽에 2km 뻗어있는 성스러운 석굴군의 엘로라 주불 사방에 협시상 ‘즐비’ 일 년 이상 연재했던 인도 불교유적 답사기도 이제 올해 말, 다음호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답사지 마지막으로 엘로라 석굴을 택한다. 인도 대륙에서 불교 사원이 사라지는 거의 끝 무렵이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 엘로라는 인도 대표 종교의 석굴사원들이 나란히 사이좋게 모여 있는 성스러운 땅이다. 평지에 우뚝 솟은 암반 절벽에 석굴이 무려 2km 길이로 뻗어있다. 총 34개 굴 중 1굴부터 12굴까지가 불교 굴이다. 13굴부터 29굴이 브라흐마교, 곧 힌두교 굴이고 끝 다섯 굴은 자이나교 굴인데 중간에 오토릭샤 삼발이를 타고 가야할 거리다.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거대한 바위산을
▲ 1. 벽체 장식판 시무외인 불상 조각. 동아시아 실크로드로의 불교 전파 길목이었던 간다라의 사원을 보기로 하자. 역사, 미술 교과서에 간다라 미술이라 잘 알려진 이 지역은 현재 파키스탄 북부, 동쪽 탁실라에서 서쪽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페샤와르 그리고 중간의 마단, 또 북쪽 말라칸드 고개 넘어 인더스 강의 발원지 스와트 계곡 등 네 지역이다. 지금은 정치정세가 불안하여 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예배의 중심이 아닌 불상 ▲ 2. 스투파 기단의 불상 조각. 넓은 지역 간다라의 오랜 역사의 누적을 “간다라
‘용과 나무의 언덕’에3~4C 익슈바크왕조 유적찬란했던 불교문화 남아 ▲ 1. 나가르주나콘다 전형적 사원. ‘독방렬 안마당 승원+스투파와 불상 말굽형 대칭 쌍 예배당+큰 스투파’(좌). 2. 사원 기본 모습. 기둥 안마당에서 본 왼쪽 끝 스투파 예배당, 오른쪽 끝 불상 예배당, 그리고 멀리 가운데 큰 스투파(우). 불교가 천년을 휩쓸었던 인도에 수많은 사원 유적지가 있다. 그 중 중남부 안드라프라데시 주 나가르주나콘다가 있다. 대승불교 시조 한분인 나가르주나, ‘용과 나무’ 의역 용수(龍樹) 스님이 만년에 머무른 곳이라는데, 사실은 불분명하다. 콘다는 언덕이다. 현지인들에게는 청평호 같은 댐
초기엔 예배·승원 분리시간 흐를수록 경계 모호거주 독방도 부처님 조성인도 전통종교 영향 받아 ▲ 그림1. 불상 사당이 된 승원굴. 안마당 공양 공간 ‘만다파’. 11굴.(좌), 그림2. 아잔타 11굴 평면. 속 사당방과 안마당 네 기둥 만다파.(우) 전편에서 본대로 불과 다섯 개의 예배 탑당굴과 거주 승원굴로 시작한 조용했던 초기 아잔타 석굴은 5세기 후반 바카타카 왕국에서 총 29개 굴을 연이어 파는 대대적 역사를 벌였다. 그 전까지는 없던 부처님 형상이 석굴을 휩쓸게 되는, 이름하여 대승불교라는 큰 변화를 가져온다. 민짜였던 초기 스투파와는 달리 불상 합체 스투파의 화려한 예배 탑당굴 19굴 26굴 두 개를
타지마할보다 위대한세계문화유산 아잔타암벽굴 29개 나란히석굴 변화가 한눈에 ▲1. 물돌이 개천 암벽의 아잔타 전경. 아잔타 석굴은 인도 대표 건축 타지마할보다 더 위대한, 꼭 가 보아야 할 세계문화유산이다. 2006년 12월21일 산치를 보고나서 저녁 보팔에서 만원 기차에 올라타고 새벽 1시 잘가온에서 내렸다. ‘론리 플래닛’ 안내서에 소개된 자그맣고 아담한 여관에서 하룻밤 잘 자고 일어나 아침 아잔타 행 첫 버스에 올랐다. 아잔타로는 남, 북 두 곳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북쪽은 잘가온에서 60km, 남쪽은 그 2년 후 두 번째 간 아우랑가바드에서 105km 떨어져 있다. 아잔타 석굴은 와고르 개천의 물돌이 말굽형으로
부처님 그리는 건 불경처음엔 빈 옥좌만 표현석굴 속 불상은 획기적 석굴에 드디어 불교 역사상 최대사건, 부처의 형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초기 석굴들은 인도탑 즉 스투파 모신 탑당굴 중심의 무장식 단순 형태의 석굴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스투파 숭배 자체도 석가모니께서 자신을 비롯해 아무것도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위배된다. 석가모니는 오늘날 힌두교의 전신인 창조주를 숭배하는 기존 바라문교의 관습을 타파한 다름 아닌 정신적 철학적 개혁 사상가였었다. 오늘날 불교에서 채식을 하는 식습관도 살생을 금한다는 자비에 바탕을 두었다고 되어있으나 알고 보면 바라문 시대 창조주 프라자파티와 베다 제 신들에게 엄청난 수의 가축을 잡아서 바치는 피의 희생제 의례에 석가모니가 반기를 든 데서 비롯된다.
인도 중부 아라비아 해안쿠다 석굴은 말굽형 탈피조성 때부터 네모 형태로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아 좁은 방에 스투파 봉안해 탑돌이 예배 의례 불가능 미리 예고한 불상의 도입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전 편에서 말굽형 탑당굴 차이탸에 있던 스투파를 승원굴 독방에 모시게 되면서 석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즉 거주 승원굴이 탑당 예배굴화 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승원굴로 스투파가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예 처음부터 네모반듯한 방에 스투파를 모신 전혀 다른 계열의 탑당굴이 엄연히 존재해 왔음을 알았다. 지금까지 죽 탑당굴 뒤가 둥근 긴 말굽형 평면을 보아왔다. 속에 모신 둥근 스투파 탑돌이 예배를 위해 스투
석굴 중앙에 스투파점차 수행처와 근접독방 하나에 조성도전실 갖춘 사당 변모 인도 석굴 사원은 암벽에다가 일렬로 판 거주 승원굴 여럿과 스투파를 모신 예배 탑당굴 하나로 구성된다. 즉 승원굴은 탑당굴과 완전 별도로 분리되어 있었다. 마하승기율(摩訶僧祗律) 33권 가람 조성에서도 탑 예배처 불지(佛地)와 스님 거주처 승지(僧地)는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잘 나온다. 자, 그런데 탑당굴에 있던 예배용 스투파가 승원굴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걸 잘 보려면 중부 서인도 힌두 성지 나식으로 가면 된다. 유명한 아잔타 엘로라 석굴의 초입 도시 아우랑가바드에서 뭄바이 행 밤열차를 타고 고생 좀 했다. 좌석표를 살 수 없어 일반표를 끊고는 무작정 침대칸
재가자 회중 늘어나탑당굴 규모도 커져석굴 닮은 성당 건축천정·회랑 유사해 ▲ 1. 탑당굴 전실 베란다에서 앞마당의 발달. 인도 석굴 탑당굴은 완성된다. 그 특징은 장방형 종축의 말굽형 평면이고, 제일 깊은 속에 스투파를 모시며, 기둥들이 스투파를 감싸면서 양 벽쪽으로 기둥이 죽 늘어서 회랑을 형성한다. 원래의 원형 탑돌이 의례가 홀 쪽으로 연장되어 기둥을 따라 진입에서부터 퇴장까지의 선회 행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운데 주 출입구와 좌우 한 개씩 총 세 개의 입구가 있다. 주인공들은 홀 중심 스투파 앞 예배를 위하여 정 가운데로 출입했을 것이고, 행렬 탑돌이 예배를 위해서는 태양회전방향인 왼쪽 개구부로 들어가서 스투파를 돈 후
인도 중부 작은 도시에 스투파 감싼 기둥 원형툴자레나 석굴 존재해 인도 탑당굴은 가장 안에 스투파를 모신 긴 말굽형 평면으로 정착되었다. 그에 더해 스투파를 감싸면서 동시에 홀 양쪽에 빽빽이 기둥들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기둥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여기서 잠깐, ‘차이탸(chaitya)’를 전에는 탑원굴이라 했는데 왜 이제는 탑당굴로 쓰는지 의아해 할 것 같다. 무심코 선행 일본인 번역을 이어받아 ‘탑원굴(塔院窟)’로 했으나 이후 ‘탑당굴(塔堂窟)’로 정정한다. 부처님 상을 모신 집은 불당(佛堂)이고, 탑을 모신 집은 ‘탑당(塔堂)’이다. 한자 ‘院(원)’은 ‘담으로 둘러싸인 안마당집’이다. 거주처 ‘비하라’는 사방 둘러싼 독방들의 가운데 안마당 집이므로 ‘승원굴(僧院窟)
세계 최초 석굴은 원형불란 앞의 예배=탑돌이악기 연주와 절·공양도좁은 입구 점차 넓어져 무색의 종교, 불교의 최초 본격 숭배물은 탑 곧 스투파였다. 우리는 절의 전각을 금당, 법당, 불당으로 서로 섞어 부른다. 원 뜻을 보면, 가장 많이 쓰이는 ‘법당(法堂)’은 진리의 말씀 달마를 설법하는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 모신 집은 ‘불당(佛堂)’이라 불러야 맞다. 오래 전에는 불상에 금칠했으므로 아니면 태국처럼 절집 자체에 금칠했으므로 ‘금당(金堂)’이라 불렀다. 현재 절의 전각 안에 모신 불상 앞에서 설법을 들으니 법당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른 말은 아니다. 인도에서 스투파를 모신 집을 ‘차이탸’라고 하고 번역하면 ‘탑당(塔堂)’이 된다. 굴을 팠으면 ‘탑당굴(塔堂窟)
불성 깨우는 기도 탑돌이탑 주위 난간이 수호역할한국불교는 의미 잊은 듯 ▲1. 산치 스투파의 아래 지면, 가운데 상층, 꼭대기의 3줄 난간. 지난 호 예고한 탑원굴 발전 과정을 보기위해서는 우선 인도 불탑 스투파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를 알아야겠고, 따라서 예배에 중요한 구조물 난간을 보아야겠다. 여태껏 본대로 둥그런 인도 스투파는 석가모니 유골, 즉 알을 속에 묻은 큰 바깥 항아리로서 ‘알’, 필자 작명 ‘불란(佛卵)’이라고 했다. 기존 불교 오욕의 명칭, 엎어놓은 밥그릇, 복발(覆鉢)이 결코 아니다. 탑파(塔婆)로 한자 음역된 스투파(stupa)는, 인도 싱할리어 ‘다고바(dagoba)’로 스리랑카를 비롯해
인도서 가장 큰 예배 석굴중앙 제일끝 스투파 조성적나라한 조각도 새겨져 ▲1. 카를리 석굴 유적에 붙여 지은 힌두 사원. 예배 행렬. 카를리 석굴은 지난번 본 바자 석굴의 마을 건너편 산 중턱에 있다. 오토릭샤에서 내려 계단을 한참 땀 흘리며 올라갔다. 석굴들이 속세와 떨어지려고 전부 산 중턱에 있다. 우리 석굴암도 지금은 승용차로 코앞까지 가지만 40여년전 고교 수학여행 때 불국사에서부터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먼발치 석굴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마치 돗데기 시장처럼 난리 법석이다. 무슨 일인가 다가 가보니 카를리 석굴 코앞에 가건물식
뭄바이~뿌네 길목 위치마을서 탁발 가능 거리우람한 굴 규모에 감격조성 때 조각 고스란히 바자 석굴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비교적 규모가 제법 큰 본격적 석굴이다. 바자 석굴은 급성장하는 인도 최대 도시, 영국 식민시대 이름 봄베이, 독립 후 원 이름을 되찾은 뭄바이 항에서 동쪽 대도시 뿌네로 가는 길에 있다. 인도 유일의 명실상부 고속도로, 마치 우리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같은데 다만 높은 재를 만나서 스키 대회전 같이 빙빙 돌아가는 것이 마치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과 비슷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서둘렀으나 출발지를 몰라서 시 외곽 시외버스 정류장→빅토리아 기차역→다시 중앙역→다시 외곽 버스정류장으로 대도시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왔다갔다 헤매다가 겨우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거주굴은 한평 남짓홀로 수행하는 공간 우리 절의 원조는 인도 석굴사원이다. 석가모니 제자 출가자, 즉 상가들이 함께 모여 수행하며 우기의 비를 피해 또 혹서기의 무더위를 피해 영구 시설인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산치 같은 평지 사원은 스투파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 사방에 집단 거주처를 만들었지만, 바위 절벽에 죽 판 석굴은 일렬로 배열될 수밖에 없다. 중간쯤에 스투파 모신 예배굴, 즉 차이탸 굴을 하나 파고 좌우로 거주굴 즉, 비하라들을 여러 개 줄줄이 팠다. 이번에는 우선 거주굴부터 보자. 비하라 굴 하나는 여러 개의 독방들로 구성된다. 작은 굴은 5~6 방, 큰 굴은 30여 방들로 구성된다. 독방 하나 크기는 딱 한 평 남짓이다. 우리 정부에서 수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건물 면적 단위에 평을 못
석굴의 나라 인도에는 총 1200개 석굴이 있다. 그 중 4분의 3이 불교석굴이다. 한 곳에 적으면 10여개, 최대로 도시 외곽에 2백여개의 석굴이 집단으로 모여 있기도 하다. 아소카왕 시대에는 육사외도로 부르는 아지비카교 굴도 있었으나 일부 자인교 굴과 바라문 즉 힌두 굴이 그 나머지다. 석굴을 판다는 것은 말이 쉽지 수행자들이 당시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이 단지 작은 끌과 망치로 암벽을 긁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의 공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 중국과 연관성 없어 인도 대륙 중부 광활한 고원에 주로 분포하는 석굴은 학계에서 기후 상 몇 달간의 우기를 피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필자가 실제 다녀보니 40도를 넘는 무더위에도 굴속에 일단 들어가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었고, 가
인도는 석굴의 나라다. 물론 석굴사원 중심에는 지금까지의 인도 탑 스투파가 모셔진다. 자, 이제부터 불교 석굴사원 탐방 대장정 여행을 떠나보자. 행선지는 우선 인도 남부 불교 유적지다. 넓은 땅덩어리에서 불교 전파 영역상 남부라고 하지만 인도 지도를 보면 중부의 남쪽 끝에 불과하다. 나가르주나콘다, 아마르바티 유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도 최초의 불교석굴, 그리고 우리 석굴암의 원조 군투팔리 석굴을 보기 위해서다. 안내 20년차도 군투팔리 몰라 ▲1.군투팔리 여행 경로. 2007년 4월3일 새벽 6시45분 델리 중앙역 출발 하이더라바드 행 특급열차에 올랐다. 아침 기상 종에 맞춰놨지만 몇 차례 자다 깨다 밤잠을 완전 설쳤다.
우리가 절을 부르는 몇 개의 이름이 있다. 절을 ‘가람(伽藍)’이라고 한다. 그 유래는 승단 거주처 범어 ‘sangha-arama’의 한자 음역, ‘승가람마(僧伽藍摩)’에서 온 가운데 두 글자라고 잘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베다 시대 후기 브라흐만 즉 범(梵), 대 우주의 절대자 신에 대한 허례 제사보다 근본을 추구하고 체험을 중시하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접어들었다. 불교 잉태 배경이 된 시대정신이었다. 그 시기에, 출가한 자유사상가 사문(sramana, 沙門) 들이 많이 나타나 집단을 이루어 ‘상가(sangha)’라는 생활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불교가 인도에서 지배적 종교가 되면서 ‘상가’는 불교 공동체를 특별히 지칭하게 되었다. ‘아라마(arama)’는 ‘정원이 있는 즐거운 집’, 곧 두 단어를 합친 ‘상가
우리 탑 꼭대기를 ‘상륜부’라 부른다. 학술용어는 물론 전국 탑 문화재 안내판에 어김없이 그리 씌어있다. 바퀴 모양이라는 뜻이다. 유명한 불국사 석가탑 3층 위 꼭대기 상륜부는 오랜 세월 지나 파괴되어 신라의 모양을 전혀 알 수 없던 것을 1973년 복원 공사를 하며 남원 실상사 탑을 모방해 집어넣은, 지금도 횡행하는 엉터리 문화재 복원이다(그림1). 복사 원전으로서 실상사 탑 꼭대기를 보자. 인도 스투파의 축소된 모양이 석탑 위에 올라간다(그림2). 아래로부터 사각상자 ‘노반(露盤)’, 공 모양 ‘불란(佛卵, 오류명칭 복발)’, 꽃모양 ‘앙화(仰花)’와 그 위에 문제의 원반 바퀴 ‘보륜(寶輪)’ 네 개와 ‘보개(寶蓋)’, 그 위의 불꽃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