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 여정의 마지막 밤, 그동안 뒤죽박죽 싸들고 다니던 짐 가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서 가방 속에 쑤셔 넣었던 옷가지며 참고용 자료와 책, 여정 내내 한 몸처럼 껴안고 다녔던 카메라 등등. 별로 크지도 않은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짐꾸러미들이 침대 위로 한 가득이다. 그 가운데 두통약, 복통약, 감기약, 해열제 등등 온갖 ‘비상약’들이 완비돼 있는 꾸러미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라다크행을 준비하면서 ‘혹시나’하는 마음에 온갖 약들을 구해 한 보따리 챙겨 놓고는 ‘철저한 준비성’에 스스로를 대견해 했었다. 하지만 그 약들은 여정 내내 꾸깃꾸깃 꾸겨진 채 가방 속에 처박혀 있었다. 고산병 예방약 몇 알과 비
▲레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 사원 자미아. 사원은 레팔레스를 가로막고 있지만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는 시내 어디서나 쉽게 보인다. 낯선 땅 라다크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도시나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레를 기준으로 어디어디 쯤”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라다크 지역의 모든 주요 도로가 레를 기준으로 뻗어나가고 있으니 레는 명실상부한 라다크 여행의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특히 육로를 이용해 라다크로 들어온 이들은 레에 들어서는 순간 미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낯설고 고독한 미지의 땅에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듯 한 안도감 말이다. 남쪽 마날리를 거치는 길이나 서쪽 스리나가르에
▲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 9층 높이의 이 오래된 성은 건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넘어 라다크로 들어오던 날, 눈 아래 펼쳐진 첩첩의 설산을 보며 마음속에서는 두 생각이 갈등을 하고 있었다. ‘조금 어렵더라도 육로를 이용해 오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휙 지나버리고서야 어찌 히말라야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비행기로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저 험한 산길,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설산을 구비구비 갔었다면 레에 도착하기도 전에 질려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쪽 생각에도 온전히 손을 들어줄 수 없어 이랬다, 저랬다하고
▲200년 된 켐벨씨의 옛집 거실. 화덕을 중심으로 앉은뱅이 탁자가 놓여있는 모습은 새로 지은 집의 거실과 다를 바 없다.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라다크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두 가지 말은 “줄레”라는 인사와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초대의 말이다. 곰파에서 만난 스님도, 길에서 만난 어르신도, 마을 입구에서 마주친 아이들도, 심지어는 공사장 한 구석에 임시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일꾼들도 눈만 마주치면 ‘줄레’하고 인사를 건네며 스스럼없이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처음엔 그냥 인사치레려니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네는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처럼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라다키들의 친절도 그냥 인
▲ 1825년 건립된 스톡팔레스는 10여년 후 왕국을 잃고 셰이팔레스를 떠난 라다크왕조의 마지막 궁전이 되었다. 80여개의 방을 갖고 있는 이 궁전은 비교적 잘 보존, 관리되고 있지만 웅장한 규모에 비해 쓸쓸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셰이팔레스가 라다크왕조 전성기의 산물이라면 지금 찾아가는 스톡팔레스는 저물어가는 왕조의 마지막 피난처다. 1825년 세워진 이 여름궁전은 10여년 후 나라를 잃고 셰이팔레스에서 쫓겨난 왕실가족들의 은신처이자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러니 왕실의 궁전으로 영화를 누린 시기보다는 한때 왕족이었던 이들이 살고 있는 ‘여염집’으로 더 오래 사용된 셈이다. 외침에 흔들리는 왕국의 황혼기를 예감했는지
▲셰이팔레스 오르는 길엔 진언이 새겨진 바위 마니석이 즐비하다. 셰이팔레스 주변에는 수백개의 초르덴이 흩어져 있다. “눈이여, 내 눈이여, 조금만 있거라. 인도에 적응하기엔 너무 이르다.” 1970년대 인도를 순례한 석지현 스님은 현란하고 혼란한, 너무도 이질적인 인도의 풍경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라다크의 하늘 아래서 문득 이 문장이 떠오른 것은 사실, 경계심 때문이다. 유독 하늘이 푸른 날이다. 사진기의 노출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바늘 끝 같은 조리개를 뚫고 들어오는 빛을 감당할 수 없을 만치 빛나는 날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찬란함에 경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약아빠진 눈동자는 벌써 꾀를 낸다. 이
▲라다크에서 가장 유명한 곰파인 헤미스곰파. 내부의 넓은 광장에서는 매년 6~7월 사이 쎄추라 불리는 축제가 열린다. 그때가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과 라다키들이 몰려들어 곰파 안은 발딛을 틈이 없어진다. 라다크의 무수히 많은 곰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을 고르라면 첫 손에 꼽히는 곳이 헤미스곰파다. ‘곰파 중의 곰파’라 불리는 헤미스는 라다크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곰파다. 덕분에 가장 유명하고 그 유명세만큼이나 화려하며 부유한 곰파이기도 하다. 레에서 가까우면서도 이렇게 유명한 헤미스곰파 방문을 지금껏 미뤄 둔 것도 사실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곰파를 일찌감치 보고나면 그 뒤에 만나게 될 곰파들이 시시
▲틱세곰파의 법당에는 높이 14m의 미륵부처님이 조성돼 있다. 아침예불을 마친 한 스님이 부처님 전에 청정수를 공양 올리고 있다. 아침예불이 끝나자 곰파 안 스님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동자스님들은 예불하는 동안 스님들에게 차공양을 올리는데 사용했던 주전자를 챙겨들고 종종 걸음을 친다. 물론 걷는 동안 또래의 스님들과 장난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스님들은 양동이나 주전자에 맑은 물을 한 가득 담아들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간다. 그 중 한 스님을 따라가 본다. 미륵부처님 미소가 법당에 가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 법당에 들어서자 환한 미소를 머금은 금빛 부처님의 커다란 상호가 법당 안을 가득
▲틱세곰파는 라다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곰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붉은색과 황금색, 그리고 흰색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틱세곰파는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과도 흡사해 ‘작은 포탈라’로 불리기도 한다. 어스름하게 여명이 밝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방이 환해진다. 고작 5시30분인데 하늘은 이미 대낮 같다. 해발 3500미터의 희박한 공기는 이른 아침의 여린 햇살도 품지 못한 채 아낌없이 허공으로 흩뿌린다. 날카로운 햇살이 청명한 하늘에 거침없다. 며칠 만에 만나는 선명한 아침이다. 레에서 남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름다운 겔룩파의 곰파 틱세, 그곳에서 열리는 아침예불에 동참하기 위해 새벽부터 길을 서두른다. 날씨도
▲디스킷곰파에서 내려다 보는 누브라계곡의 풍경. 새로 조성된 거대한 미륵불좌상의 선명한 원색이 무채색의 계곡에서 꽃처럼 빛나고 있다. 아무리 고산에 적응이 됐다고는 하지만 디스킷곰파 내부를 계속 오르내리니 당할 재간이 없다. 숨소리가 마치 악을 쓰는 듯 들린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운지 지나가는 스님들이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천천히 숨을 쉬라”고 조언 해주는 스님도 있고, 힘들게 길어온 물을 마셔보라며 권하는 스님도 있다. 하지만 애를 쓴 보람이 있다. 곰파의 지붕에 올라 내려다보는 누브라계곡의 전망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려함, 그 자체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고작해야 타르초와 룽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디스킷곰파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 이 곰파는 마을 사람들이 흙과 돌을 지고 수 없이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지은 사원이다. 간밤엔 누브라계곡의 북쪽 마을 디스킷에 여정을 풀었다. 디스킷은 누브라계곡에서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한 마지막 마을 훈데르의 바로 아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소박한 시골 마을이지만 누브라 지역 행정의 중심지이다. 인도 최북단 라다크를 통틀어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사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이름을 따서 그대로 디스킷곰파라 부른다. 오늘의 목적지다. 하지만 출발 예정 시간보다도 훨씬 이른, 새벽녘에 눈을 떴다. 소란스런 바깥 때문이다. 아직 해도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삼텐링곰파는 혈기 왕성한 청년처럼 싱그러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한 곰파 내부는 라다크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육지서만 살던 사람들이 배를 타면 배 멀미를 하고, 배를 오래 탄 사람들이 육지에 내리면 땅 멀미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고갯길의 땅 라다크에 제법 익숙해지니 평지를 달리는 기분은 차라리 지루하다. 이건 평지 멀미라고 해야 하나. 간혹 비포장도로가 나오기도 하지만 누브라계곡의 도로들은 라다크의 다른 지역과 달리 평지에서 평지로 이어진다. 몸이 편해지니 부지런한 손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지만 게으른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맘껏 즐기며 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