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5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한 학생은 어느덧 팔순이 넘은 원로학자가 됐다. 1970년대 신경정신과 임상심리실장·춘천간호대학 교수를 거쳐 1980년대 이름조차 낯설었던 ‘선(禪) 심리학’을 공부하고자 일본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광준(84) 동서심리연구소장은 매일 오전 9시 백팩을 둘러매고 연구실로 출근한다. 오후 6시까지 책 읽고 글 쓴다. 반세기 넘도록 이어진 일상이다. 1975년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선과 상담에 관한 비교연구’를 시작으로 불교학 연구에 천착해 ‘한국적 치료심리학(행림·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장인 이창재 교수는 2013년 비구니스님들의 수행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를 제작한 감독이다. 일반인들에게 일 년에 단 두 번만 문이 열리는 비구니 수행도량 ‘백흥암’에서 펼쳐진 스님들의 치열한 정진담은 진한 감동과 함께 묵직한 울림을 전한 수작으로 꼽힌다. 천상 불자일 것 같은 이창재 교수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굳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긴 소매가 펄럭인다. 한 손에서 시작된 춤사위가 서서히 몸 전체로 흘러내린다. 유연하면서도 힘차게, 공간을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그의 몸짓은 노래하는 파도처럼 우아하게 변화한다. 하늘거리는 흰 천과 장삼 속에는 이철진(57·수성) 구슬주머니 대표의 부처님을 찬탄하는 마음이 소복이 쌓여있다. 승무·살풀이춤·태평무 등 중요무형문화재이자 불교예술의 정수인 승무를 구사하는 유일한 남성 춤꾼 이철진 대표. “춤을 배우지 않았다면 출가해 깊은 산속 바위 밑에서 참선에 빠진 도인이 됐을 것”이라는 그의 삶에는 부처님과 함께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인간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창구 전북불교대학장에게 이 질문은 오래된 숙제와도 같았다. 질문은 아주 어린 시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시작됐다. 친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재혼했다.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흔든 사건이 벌어진 건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저녁, 새어머니가 문득 방으로 찾아와 말했다. 오늘 삶을 마무리 할 거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툼이 잦긴 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 뜻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과
세찬 눈바람이 종일 문을 두드리던 지난해 12월. 점심을 앞두고 난로 곁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던 어르신들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 없이 여고생 4인조가 등장한 것이다. 한껏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쇼핑백을 주섬주섬 내려놓는 앳된 모습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어르신들, 여기 학생들이 깜짝 선물을 가져왔어요. 세상에나 놀라지 마셔요. 직접 합장주를 엮어왔답니다. 자그마치 1000개에요. 몇 달 전부터 어르신들 건강 생각하면서 준비했다고 합니다. 따뜻하게 맞아주세요.”사회복지사의 소개에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20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을 108배로 시작하는 주근호(77, 일법) 불자. 2024년 1월 1일도 평소와 다름없이 향을 사르고 절을 올렸다. 마지막 108배를 마치고 일어서자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가슴은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절 수행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자 150만배 회향의 순간이었다.“숫자에 연연하지 않지만, 그날만큼은 잊을 수 없죠. 절수행을 하면서 나를 찾아온 신비한 일들이 이날도 똑같이 일어났으니까요. 잘 아는 스님에게 물어보니 업장이 소멸된 거라고 기도한 보람이 있다고 하셨죠. ‘아, 내가
“스님 불 들어가요. 어서 나오세요.” 유독 추운 날이었다. 12월3일 경기도 화성 용주사에서 엄수된 자승 스님의 다비식. “거화(炬火)!”라는 선창이 들리자 지푸라기 뭉치를 든 스님들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가사·장삼으로 둘러싸인 장작더미가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현장을 찾은 장세철 ㈜고려건설 회장(제9교구본사 동화사 신도회장·62)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그 순간 작은 불씨 하나가 그의 겉옷에 달라 붙었다. 불씨가 점점 커지자 옆사람이 깜짝 놀랐다. “저기요! 불, 불!”하고 소리를 지르며 장갑 낀 손으로 그의 팔을 툭툭 쳤
대웅전 앞에 마련된 무대. 공연이 시작되면 음악과 함께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그런 상월비보이단의 모습을 관객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응답하듯 땅을 짚고 솟구치는 단원들의 팔뚝에는 힘줄이 돋아나고 발은 허공을 차고 오른다. 도량에서 펼쳐지는 상월비보이단 무대는 색다른 광경을 연출하며 대중들의 흥미를 끌어낸다. 스님들도 몸을 들썩이며 기립박수를 보내곤 한다.“사람들은 절이 정적이고 엄숙해 다가가기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절은 수행공간이자 문화공간입니다.
올망졸망 국화꽃 만개한 군포 정각사 분원 광명사 도량. “땡그랑 땡그랑” 간들바람을 탄 풍경소리와 함께 세 아이가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처님께 합장 인사한 아이들은 자연스레 좌복을 하나씩 집더니 그대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무릎과 이마를 쉬지 않고 마루에 내려놨다. 이마엔 금세 땀이 송골송골. 지켜보는 지도법사 여옥 스님의 얼굴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절하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해요. 법회에 올 때만 절하지 않고 각자 집에서 매일같이 실천하고 있답니다. 네이버 밴드를 활용하
길고 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좋은 시설에 좋은 학교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그 모든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갈수록 커졌고, 시련은 디자이너 지망생 심효빈(혜경)을 나락으로 밀어냈다.만화, 잡지 보는게 좋았고, 포토샵 툴을 다루는 게 재미있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환경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시각디자이너라는 꿈을 잠시 접고 현실과 타협해야만 했다. 빨리 취업이 가능한 특성화고 조리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적성에 맞지
‘관세음보살님! 이 아이를 온전히 주신다면 제가 불법을 정말 열심히 전하겠습니다.’위급한 상황이었다. 태아의 머리가 산도에 끼인 채 오도가도 못하는 채로 30분이 넘어갔다. 흡입기로 아이를 빼려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보호자들에게는 산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응급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분만실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로 흘러갔다.“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의료기술도 지금처럼 발전된 상황이 아니다 보니 분만 중 안 좋은 결과가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죠. 이 아이를 꼭 살리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천수경’을 외우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만물이 기지개를 펴는 새벽 5시. 이명규(73) 주식회사 포스테크(POS-TECH) 대표는 ‘금강경’을 일독한 뒤 30분가량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염한다. “매일 출근하기 전에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발원합니다. 또 제가 운영하는 회사 직원들이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길 바라지요.” 이 대표는 1만일 염송 서원을 세운 염불행자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염불하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중생이 극락에 나길 발원하고 있다. “염불은 죽기 전까지 해야 할 공부”라는 이 대표는 “제가 일궈낸 회사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