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상강례 시간에 강주 스님께서 “참회를 하고 그 참회를 대중이 받아 들였으면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재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후에 설령 그와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세속에서처럼 거기에 이전 일을 결부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우리 절 집에는 안 맞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이고 우리가 그 모두를 보듬고 함께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며 이전 강원 생활 중에 대중 생활을 위해서 ‘스님은 더 이상 우리 대중과 어울려 살기 힘드니 떠나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했던 것이며, 현재의 대중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걸망을 맸던 일들이 부끄러웠다. 지금 그 때 일들을 반추해보면 표면엔 대중을 내세우고 더 크고 바른 삶을
요즘 종단 교육원에서 종단 미래는 물론 한국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교육 개혁이 시급하다고 여러 안을 내놓고 있다. 그 안의 내용들이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설령 바람직하다 해도 현실에서는 요원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이 바로 서려면 그 중 가장 중요한 축인 교육자가 우선 제대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종단 풍토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지금 교육 개혁을 벼르는 교육원에서조차 현직 강사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무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원 소임자들의 이번 처사는 일반 행정 소임자들과 별반 다름이 없다. 선종 집안이다 보니 그럴 수 있다 싶기도 하지만 강사는 수행을 하지 않는 글쟁이로 취급당하기 일쑤이다. 오랜만에 만난 어떤 도반은 선방에
천자각 문을 나서자면 서있는 꽃사과 나무에서 막 터지려는 꽃봉오리가 마치 아기볼처럼 발그스레한 것이 앙증맞게 이쁘다. 그리고 자기의 화사한 멋을 짧게만 뽐내다가 꽃비가 되어 날리는 벚꽃은 천녀의 장엄인 듯 멋들어진다. 봄날의 자연이 제각각의 멋으로 하나가 되어가듯 우리 절 집안도 개개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하나를 이루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오히려 이런 훌륭한 전통이 후퇴하고 있다. 종단 기본교육이 비구계를 전제로 제도화되면서 안정은 가져왔지만 초참 수행자의 기상은 많이 사라지고 폭 넓은 배움이 줄어들었다. 내가 강원에 있을 때만해도 한자리에서 강원을 마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러는 『서장』을 보다 발심해서 바로 걸망을 메고 선방으로 직행하는 학인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큰방 구성원도 현재처럼
얼마 전 모시던 스님의 재에 몇 분 스님이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내게는 낯설었지만 다른 스님의 말로는 대자암 무문관에서도 몇 철을 나는 등 열심히 정진한 분이라 했다. 그런데 대뜸 그 스님이 당신은 이번에 분한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종단에 귀속시킬 재산도 없지만 더 이상 종단에 기댈 것도 없어서 그저 비승비속으로 여생을 농사짓고 혼자 수행하며 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분이기도 했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는 않았다. 이처럼 종단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스님이 더러 있음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문제의 근원이 종단 정체성의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 현 종단이 간화선
출가 수행자라 하지만 곡절 많은 세상을 품고 살아가면서 수행자로서의 향기를 잃지 않고 한결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일견 그리 사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일인데 무슨 쉽고 어려움을 따져 말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현실에서는 쉽지만은 않기에 살아갈수록 그런 삶을 살아내시는 분들이 더욱 존경스럽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모습을 일전에 입적하신 법정 큰스님께서 보여주셨다. 송광사에 방부를 들였을 때 아쉽게도 스님은 한 달 여전에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셨다. 연세가 많아질수록 외로움 때문에라도 대부분 대중처소에 들어와 노년을 회향하는 법인데 스님은 반대로 글에서의 말씀처럼 외로움을 벗하러 오두막살이를 택하셨다. 처음 불일암에 올라갔을 적 다가온 느낌은 스님의 글에서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가는 법이고 그 때가 되면 기운이나 날씨가 거기에 맞추어져야 모든 만물이 편안하다. 그런데 요즘은 인위적으로 그 순환을 틀어버리는 탓인지 시절도 일정치가 않고 오락가락 하는 듯하다. 며칠 전 우연히 세계적으로 손꼽힌다는 유명한 스페인 건축가 한 분이 방에 들렀다. 부산에 어린이대공원 설계문제로 왔다가 통도사를 방문해 동행하신 분들에게 스님을 만나고 싶다고 청을 넣어 오셨다고 한다. 약 3주전에 아버님을 여의어 마음이 텅 비어 나간 듯 하다고 했다. 그 분에게 죽음이란 누에가 고치에서 벗어나 나비와 되어 날아가는 것과 같고 당신의 아버님은 어디선가 당신과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고 있을 터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우리 사찰 건축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
통도사에는 정초에 보궁 7일기도를 올리고 난 후 3일 신중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강원에선 강주스님을 비롯한 대중 모두가 대중방에서 3일 동안 한철 회향기도를 올린다. 올해도 그 넓은 설법전을 꽉 채운 신도님들 가슴속엔 하나같이 이 기도를 통해 불보살님과 성중님들의 가피를 입어 올 한해 온 가족이 무탈하고 뜻하는 바 일들이 원만히 이루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정초엔 이처럼 거의 모든 절에서 한해의 무장무애를 기원하는 신중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소박한 종교의 모습일 것이기에 굳이 뭐라고 할 것이 아니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가끔 열렬하게 기도하는 분을 보면 ‘저 분 때문에 부처님이 참 힘들겠다. 저렇듯 부처님에게 자신의 모든 짐을 떠넘기니. 모든 중생이 저렇듯
작년과 재작년 이맘쯤에는 영각 앞에 서있는 매화가 꽃 방울을 터트리고 약간의 눈이 내려 설중매를 볼 수 있었다. 이는 한겨울에도 눈이 드문 이곳인지라 정말 보기 힘든 귀한 장면이었지만 2년을 연달아 보았기에 올해도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어제 오늘 저리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맘을 접어야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런데 기실 매화보다도 더 그리운 것은 하얀 눈이다. 서울 등 윗녘 사시는 분들이야 지난겨울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고생하신 탓에 눈이란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내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어릴 적 겨울에 늘 눈 속에서 놀던 추억이 있는 사람에게 눈 없는 겨울은 낯이 설다. 특히 설이란 말이 눈과 통하는지 설하면 떠오르는 영상은 눈이 내려 온통 하얀 들판 사이 구름마길로 색색의 한복을 입고 세배 다니는
이곳저곳에 자기가 도인임을 드러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도를 깨달았다는 사람, 예전에 큰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는 사람, 인도 등의 명상센터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사람 등등 어찌 그리 깨달은 사람이 많은지 신기할 정도이다. 옛 선사들께서 일념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라고 하셨지만 구경에 깨달음은 놓아두더라도 확철한 믿음과 이해를 증득한다는 것만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언뜻 무릎을 탁 치며 ‘아하! 바로 이런 도리였구나!’하며 알아차림이 있을 수도 있고, 남다른 경계를 경험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주변 언저리를 경험한 것일 뿐이다. 대부분 물고기 눈알을 가지고 보배구슬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도(大道)를 완성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유명 기도처로 참배객이 많거나 관광객이 많은 관람료 사찰을 제외한 일반 사찰 대부분의 가장 큰 수입원은 아마도 재를 모시는 것이 것이다.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고, 법회 때에 걷는 회비는 사실 그 법회를 유지하기도 벅차다. 그렇다고 타종교처럼 별도의 기부금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마다 서로 재를 유치하려고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노골화되어 절과 재를 유치하는 사람이 약정을 맺고 신도들을 모아가는 경우도 풍문에 들린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산 중 깊은 절이 얼마나 궁핍했으면 그럴까 싶기도 하면서 이것이 사자충이 되어 우리 불교를 침식시키지 않을까 크게 우려되었다. 그런데 전 한국불교 전법의 표본이 되어야 할 곳에서 당연한듯 그와 같
본디 자리에는 가고 오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중생살이에서는 경인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 머리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자기 마음에 희망이란 기름을 들이붓곤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의 얼굴에서 밝은 희망의 미소가 아닌 체념어린 굳은 표정을 본다. 지난 해 경상수지 누적 흑자가 11월 기준 4백억 달러를 넘어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하고 도로에는 외제차가 많아 운전하기 부담스러울 정도이지만 국민 대다수인 중소시민의 살림은 해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어려워지는 탓이라 여겨진다. 그런 탓에 많은 이들이 꿈을 잃고 그저 하루하루를 모면하듯 꾸려가는 모양새다.왜 우리는 지금 이런 슬픈 자화상을 바라보게 된 것일까.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는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이룰 수
올해도 장들밭에서 가꾼 약 만오천 포기의 배추를 강원과 율원 학인 등 대중스님들이 꼬박 3일 동안 울력을 통해 배추를 절이는 일부터 시작해 오늘 보살님들과 함께 버무려 저장하는 일까지 해서 마무리 했다. 하지만 일이 학인 스님들에게만 미루어진 듯해서 미안한감이 많다. 물론 복 짓는 일이고 대중으로 해야 될 일기에 당연한 울력이긴 했지만 많은 울력이 학인 스님에게만 모이는 경향이 없지 않나 싶어서다. 그것도 공부고 수행이니 신심을 내서 하라고 하면서 왜 어른 스님들은 동참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선 학인들에게 어찌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런 일은 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만의 몫이라 한다면 승가의 가풍이 아닌 듯하다.송광사 강원 시절의 김장 울력이 생각난다. 송광사의 김장도 대중이 많기에 양이
어릴 적엔 동무들과 대화중에 ‘매우’ ‘아주’라는 말 대신에 ‘겁나게 ~하다.’는 표현을 많이 썼었다. 한창 커가는 어린 아이 눈에는 주변의 많은 일들이 새롭고 대단해 보였기에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을 벗어난 경우 즉 일상보다 많이 벗어났다 싶을 때 이런 표현을 흔히 사용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이런 표현은 마음이 크고 넓어져가는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라면서 세상에 익숙해질수록 주변 일들을 그저 그런 상례로 받아들이게 되어 이런 표현이 적어지고 어른 되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잊고 있던 표현이 몇 해 전부터 주위에서 들려오더니 요즘은 뉴스를 대할 때면 내 입에서도 맴돌기 시작했다. ‘겁나게 밀어붙이네’‘겁나게 서두르네’‘겁나게 편가르네’‘겁나게 휘두르
우리 산천은 사시사철 어느 모습이나 부처님 몸인 국토신(國土身) 아님이 없지만 온 마음을 토해낸 듯한 가을 산야의 모습은 더욱 그러함을 새기게 한다. 이렇듯 장엄한 가을 산야에서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면 그 뿐, 더 이상 무슨 언설이 필요할까 싶다. 그래서 통도사에서는 해마다 한 해를 정성스레 갈무리하고 새해와 모두를 향해 회향하고자 화엄산림법회를 갖는다. 선재동자가 물러섬 없는 구도행을 통해 53선지식을 만나 법을 구하듯 53분의 법사를 통해 모든 존재들이 불성의 현현으로 각각이면서도 한 둥우리로 어우러지는 절대적 존재임을 일깨우는 화엄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런 뜻 깊은 법회인 탓에 해마다 원근 각지에서 참 많은 불자님들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도 하고 나 자신도 다시금 신심을 더하기도 하지만 더러
예전 시골에선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마련해 쌓아놓은 것이 큰일이었다. 지금은 숲들이 다 우거지고 나무를 때는 집도 드물기에 나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산에 나무도 적었을 뿐더러 시골에선 거의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기에 힘든 일이었다. 근 십여 리까지 가서 해 와야 했고, 간혹 면의 삼림계원에게 들키면 크게 혼이 나기도 하면서 겨우살이로 땔감을 준비해야 했기에 연탄 때는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 절 집에서조차 이런 일은 옛일로 묻혔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동안거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이젠 산중에서도 거의 석유나 전기보일러, 가스를 사용하기에 나뭇짐 멜 일이 없다. 그저 더러 선방에 장작을 때는 곳이 있고 통도사 같은 경우처럼
언젠가 단풍을 보면서 중물들이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단풍이 고운 빛을 띠는 것은 새로이 빛깔을 만들어 내서가 아니라 잎에서 푸른 색소가 감소하기 때문인 것처럼 중물 들이는 것 또한 이와 같겠구나 싶었다. 십칠팔년 전, 계를 받고 그저 젊은 혈기로 포교하러 나서겠다고 하자 은사 스님께서 만류하시면서 포교가 시급하긴 하지만 대중 생활을 통해 장판 때를 묻히며 중물을 들이고 해도 늦지 않다 하시며 큰절에 있는 강원으로 보내실 때는 중물 들인다는 것을 새롭게 무엇을 배워 채워 가는 것만으로 알았었다. 그래서 하판일 때는 계행을 잘 지키고 사미율의와 초심에 나오는 말씀 그리고 어른 스님들과 강원 상판 스님들이 일러주는 말씀에 따라 여러 가지 습의를 익히고 그에 따라 몸가짐 하는 것만을 중물 들이는 것으로 알았
한 동안 비 소식이 없어 청류동 계곡이 바짝 잦아드는 것을 보며 비를 고대했는데 모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려 반가운 날이다. 그리고 가뭄에 비 같은 스님을 만나고 온 날이라 더욱 기쁜 날이었다. 송광사 강원에 처음 입방한 날, 바로 윗반인 스님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은 신선하고 차분하고 다듬어졌으면서도 생각도 몸도 틀져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었다. 어쩌다 일 년에 한 두번 기약 없이 만나보면 스님은 늘 그렇게 길을 가는 모습으로 안주하려는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보여 주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스님도 내년이면 쉰 고개에 들어서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다. 그런 스님을 만나고 온 날은 연꽃에 향을 맡은 듯 기분이 좋고 한 동안의 양식을 얻은 듯하다.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란 말을 늘 되새긴다 하여도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서 짙은 빛깔과 풍성한 잎새를 자랑하던 낙엽목(落葉木)들이 서서히 본지풍광을 드러내고 있다. 한 여름 자신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주고 햇빛을 받아들여 자신을 성장시키며 가려주었던 한 몸이었건만 본래 자리로 돌려보냄은 하나 둘 모든 것을 떨어내고 적나라한 맨 몸이 되어야만 다가오는 혹한을 극복해 낼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혹한을 견뎌내기 위해 이런 아픔을 감내하듯이 우리도 이제 그런 이별을 해야 한다. 겨울을 앞 둔 나무에게 삶의 지혜를 배워야 점점 다가오는 어려움을 버텨낼 수 있다. 실속은 없이 허풍스럽고 그럴듯한 폼새와 말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 유명상표로 휘감는 것, 학력이나 이력만으로 자신을 커버하려는 것 등의 허울은 찬바람을 칼날 삼아 베어내고 스스로 속임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꽃이 진 자리마다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가을이 오면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친구여너와 나의 사이에도말보다는 소리 없이강이 흐르네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서서히 해야겠구나잎이 질 때마다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나무여, 바람이여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하늘은 높아 가고기도는 깊어 가네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 노래’라는 시다. 시처럼 가을은 그리움을 담아낸다. 그래서인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나오며 올려다 본 하늘의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별에, 나
국가 고위직에 임명되기 전 열리는 인사청문회를 보다보면 거의 매번 착잡함을 느끼게 된다. 그 분들에게 주로 이슈가 되는 일들을 보면 당시에 사회적 통념으론 ‘뭐 그럴 수도 있지’하며 그리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그 만큼 우리 사회가 형식에 있어서는 많이 투명해졌고 인정은 예민하고 각박해 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일에 있어 과정의 중요함과 인과(因果)의 역연함도 새삼 느껴본다. 지난날 우리 사회는 가난이라는 문제 해결에 지나치게 급급하다보니 기본적인 일을 생략하거나 무시하고 때에 따라선 큰 잘못도 더 큰 목표를 내세워 묻어두기 일쑤였다. 그것이 결국은 외환과 카드대란 그리고 중소기업의 몰락과 빈부의 심각한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면서 우리도 과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