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물듦이 없는 법계이다. 생각할 수 없는 착함과 영원이다. 안락한 해탈의 몸으로서 이것이 위대한 석가모니의 법이다. (此卽無漏界 不思義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은 마지막 제30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구경위(究竟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수습위 단계에서 주객의 인식에 의한 분별과 그 결과로 나타난 제8식의 습기까지 벗어나 중생에서 성인으로 전의를 이룬 다음에 나타난다. 위에서 무루(無漏)란 물듦이 없음을 말한다. 루(漏)란 집에 비가 세다는 의미로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분별과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무루란 구경위 단계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원만하고 밝음의 상태를 말
얻는 바가 없고 사량할 수 없는 이것이 출세간의 지혜이다. 2가지의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버림으로 인하여 문득 전의를 증득한다.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 重故 便證得轉衣) 이것은 제29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수습위(修習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자량위(資量位)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고, 가행위(加行位) 단계는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고, 견도위(見道位) 단계는 인식하는 주객의 집착을 떠나서 무소득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라면, 수습위 단계는 주객의 인식에 의한 분별과 그 결과로 나타난 제8식의 습기까지 벗어
의식이 유식의 본성을 구하여 머물지 못하는 한에서인식 주객의 수면은 아직 항복하여 소멸된 것이 아니다.(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이것은 제26송이다. 여기서부터는 유식학파의 수행론을 다룬다. 유식학파는 수행과정을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견도위(見道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라는 5가지의 단계를 설하고 있다. 제26송은 그 첫 번째에 해당되는 자량위 단계를 설명한다. 자량위란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를 말한다. 유식의 본성(唯識性)을 탐구하여 그곳에 머무는 단계이지만, 아직은 인식의 주객이란 잠재적인 번뇌(隨眠)를 항복시켜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위에서 가장 중요한 이해의 요점은 ‘수면(隨眠)’이란 용어이다. 수(隨)는 ‘따르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상이 있을 때에 지혜를 얻는 바가 없다면,이때야말로 참으로 유식에 머문 것이다.왜냐면 주객의 2가지 인식을 떠난 까닭이다.(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것은 제28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견도위(見道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자량위(資量位)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이고, 가행위(加行位) 단계는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면, 견도위 단계는 인식하는 주객의 집착을 떠나서 무소득의 경지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인식에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으로서 현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여기에 머무는 단계가 견도위이다. 이것을 ‘분별이 없는
눈앞에 조그만 대상을 세워서, 유식의 본성이라고 이른다면,이것은 얻는 바가 있기 때문에, 참으로 유식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이것은 제27송이다. 이것은 유식수행의 5단계 가운데 가행위(加行位)를 설명한 게송이다. 자량위(資量位)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加行位) 단계는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견도에 의해서 유식의 본성에 머물기 바로 직전의 단계이다. 가행이란 힘을 더하여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다시 4단계로 구별된다. 첫째는 난(煖)이다. 따뜻해지다는
모든 현상들에 대한 최고의 진실한 의미는그것은 바로 참되고 한결같은 진여(眞如)이다.그것의 성품은 항상 되고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유식(唯識)의 참된 성품이다.(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것은 제25송이다. 이것은 유식학파에서 왜 유식이 참되고 진실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용수보살의 중관학파 이제설(二諦說)과 연결되어 있다.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라는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한다. 먼저 속제와 진제를 논의하여 보자. 일반적으로 속제(sa??iti)는 3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사회적인 관습을 의미한다. 관습적인 진리란 일시적이고 방편적인 진리란 의미로서, 오랜 전통에 의해서 인정되는 세상의 도리, 관념, 언설을 총칭하는 말이다
변계소집은 형상에 의해서 무자성이고,의타기성은 스스로 그러한 성품이 없고,원성실성은 앞에서 말한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집착을멀리 떠난 까닭에 무자성이다.(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이것은 제24송이다. 이것은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이 무자성인 이유를 각각 다시 밝히고 있다. 23게송은 무자성임을 선언한 것이고 여기서는 무자성(無自性)인 근거를 논한다. 먼저 변계소집이 무자성인 이유는 형상 그 자체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형상은 인식된 이미지, 표상을 말한다. 앞에서 실례를 들었듯이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한 것과 같다. 새끼줄을 뱀이라는 착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품(無自性)을 갖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한 사람은 이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곧 삼성에 의지해서 저 삼성(三性)에 성품이 없음을 세운다.그런 까닭에 부처의 비밀한 뜻은 일체의 현상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이것은 제23송이다. 이것은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이 스스로 어떤 자성이 없음을 밝히는 게송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유식학파가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공이란 연기이고 무자성(無自性)으로 이해한 것은 용수의 중관학파이다. 용수는 일체의 현상(法)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부파불교의 유부학파를 비판하면서 일체는 본래 자성이 없음을 주장한다. 일체의 현상에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는 무자성은 존재, 언어의 2가지 관점에서 논의할 수가 있다. 첫째는 존재 자체는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그런 까닭에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서로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니다.마치 항상함이 없는 법의 성품처럼, 원성실성을 보지 못하면 의타기성도 볼 수가 없다.(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이것은 제22송이다. 앞의 21송에서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바가 있다. 현실에 물들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면 그것은 원성실성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인식의 주객이 물들어서 대상을 보고 집착하면 변계소집이 된다. 그래서 마조의 홍주종에서는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했고, 『신심명』에서는 ‘대상을 간택하지 말라. 그러면 도에 들기 쉽다’고 했다.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된다. 이 자체로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 젊
다른 것에 의지하여 자성은 조건에서 발생된 분별로서 구성된다.원만한 참다운 성품은 의타기보다는 항상 분별로부터 멀리 떠나있다.(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이것은 제21송이다. 앞의 2구는 의타기성을, 뒤의 2구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변계소집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됨’을 말한다면, 의타기성은 집착을 야기 시킨 분별을 의미한다. 분별로부터 집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새끼줄을 뱀으로 분별함으로 인하여 두려움의 집착이 발생된 것이다. 여기에는 의타기성에 의한 변계소집의 발생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상황에서 무엇이 변계소집성이고 무엇이 의타기성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먼저 호법(Dharmapala)의 견해를 살펴보면, 모든
이런 저런 분별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사물을 두루 분별한다. 이렇게 분별에 의해서 집착된 것들은 스스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이것은 제20송이다. 여기서부터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등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을 다룬다. 제20송에서는 첫째의 변계소집을 말하는데 이것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됨’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는 변계소집을 ‘허망한 분별(虛妄分別)’로 정의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분별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초월적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한다. 자아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증거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아의
일체 행위의 습기로 말미암아서 2가지 관점의 습기가 갖추어지고앞의 이숙이 다하면, 다시 다른 이숙이 발생된다.(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이것은 제19송이다. 여기서 행위(業)와 습기(習氣)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란 가치와 관련된 행동을 말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반사적인 운동은 업, 행위가 아니다. 행위란 선악의 가치에 의해서 마음에 의한, 의도에서 발생된 행동을 말한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의도, 소망, 갈망 등과 연결된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동은 어떤 문화적인 배경 아래서 반복됨으로써 학습되어진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습관화된 기운’, 혹은 ‘학습된 힘’이란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 한다. 『성유식론』에서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인 효력을 가진다는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