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 첫 만남신앙·학문 길로 이끌어내겐 ‘관음보살’의 화신 불교정화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는 1956년의 일이다. 종로 대각사에서 대사상 강연회가 열린다는 동아일보의 광고를 보고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다. 휴전 후 수복된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다.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까뮈 등의 실존주의 철학이 일세를 풍미하며 많은 지식인들이 고뇌할 때였다. 분단의 아픔을 전쟁을 통해 뼈아프게 느낀 젊은이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기획된 강연회로서 대법선 보살이 그 주최후원자였다. 대법선 보살의 부군인 황산덕 고려대 교수는 강연회 연사 중의 한분이다. 실존철학 강의를 황산덕 선생과 안병욱 선생 두 분이 하였는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사촌 형님이자 출가의 스승인간일대사 큰 인연 맺고도그림·글 현혹돼 기회 놓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념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는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것으로의 현격한 갈래로 나누워지기 마련이다. 하루 길동무에서부터 이성간의 사랑 사업 학자 전문인 등 종국에는 영원성을 구하는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리라고 본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이순(耳順)의 중반을 넘긴 지금 까지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다 소중한 인연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만남들에는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도 잊지 못할 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하면, 지워버리려 해도 번뇌로 남는 쓸모없는 업연(業緣)이 있다. 필자의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청화 큰스님’이다. 스님은 속연으로 나와 사촌간인 종형님
불교공부 시작하게 된 계기법학자이자 뛰어난 불교학자새로운 재가불자 모델 제시 왕이나 귀족 문벌의 식객(食客)으로서 주인의 보호를 받으며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지식 계층이 있었다. 직하(稷下)란 신분이다. 유교의 문벌 전통과 학통의 전승을 수립한 유생들의 집단화의 제도였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은 전혀 개인적 차원에서였다. 장학제도의 혜택은 커녕 “뭐 그런 공부도 있어”라는 조소적인 시선을 받은 것이 나의 불교학이고 종교학이었다. 1960년대 중반 나는 황산덕 교수와 황리선 부부의 직하로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황산덕 교수는 저명한 법학교수였고 언론인이었으며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우여곡절을 겪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접한 황산덕 교수는 오히려 전형적인 종교인이었고 무엇보
50년대 말 스님과 첫 인연‘불교입문’ 등 강의하시며삶으로 가르침 전한 도인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한두 명이겠느냐마는 그 중에도 삶에 큰 의미를 주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사람은 운허 큰스님이시다. 운허 스님과의 인연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스님으로부터 불교입문을 수강했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었다. 무엇을 하는 데는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이 바르게 시작돼야 끝도 바로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불교공부의 시작은 스님께서 잡아주신 것이다. 그 후 ‘능엄경’ 강의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스님의 강의가 아닌 다른 불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는 스님께서 한국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실 때 불러주셔서 한때나
구절초 향기같던 한 스님말기 위암 홀로 투병하다병원비 부족으로 세연 끊어 청원 정토마을에서 30분 거리인 속리산 근교 산골 마을에 나와 세속나이가 비슷한 비구스님이 한분 살고 계셨다. 스님은 가을이 오면 직접 수확한 고추와 무, 배추, 송이버섯을 가지고 정토마을로 오셨다. 스님은 “차에 무언가를 가득 실은 후에야 정토마을에 오게 된다”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가을에 만나 차를 마시고 뜨락도 거닐면서 이웃이 되어갔다. 2005년 가을 스님은 억새 풀꽃을 한 아름 들고 차나 한잔 하자며 정토마을을 찾았다. 스님은 여름 내내 속이 아파 농사를 잘 짓지 못했다고 했다. 위암이었다. 너무 많이 퍼져서 수술도 못한다고 했다. 오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홀로 이 병원
경봉 스님 유발상좌로 수학어린 시절부터 불연 맺어줘일상 자체가 수행이자 법문 꽤 오랜 기간 홍익대학교에서 불교학생회 지도교수 소임을 맡아 오다 보니, 청년 불자 수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대학의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아 종교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 보인다. 대학시절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나 성찰, 열정보다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매진하는 모습이 때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불법의 씨앗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가, 살아가는 동안 또 다른 인연을 계기로 반드시 발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 맺어진 불연은 불교의 가르
방황하던 고3 사춘기 시절사고뭉치 제자를 충고보단따뜻하게 감싸주던 선생님 요즘 들녘엔 곡식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여름 장마와 뙤약볕 속에서도 견디며 이겨낸 결과이리라. 저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내 인생을 돌아본다. 누군들 쉬운 인생이 있었겠냐마는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순탄치 못한 가정환경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다. 한 때 죽을 결심으로 산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출가수행자가 되어 복을 지으며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살아오면서 고마운 사람도 많았고 미운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젊은 날 미운 사람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고 죽여 버리고 싶다는 분노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고마운 분들이기에
일타 스님 시봉한 유발상좌사소한 말 속에도 신심 가득수행자의 언행 돌아보게 돼 일찍 잠을 깼다. 지난여름 더위에 언제나 창을 열어두고 잠을 잤다. 열어두고 자던 창으로 들어온 찬바람에 잠을 깬 것이다. 가을이 왔나보다. 매일 인사보다 먼저 나누웠던 더위 이야기가 벌써 사라졌다. 참으로 무상이라는 말이 우리의 주름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늘 대화하며 산다. 말을 하고 말을 들으면서 상대의 생각과 사상을 알게 되고 삶의 가치도 말에 묻어 전해진다. 나의 말로인해 나의 모습이 각인되는데도 너무나 쉽게 말해버리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는 여러 번 다듬으면서도 정작 나의 인격이 그려지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출가행자들이 공부하는 글 중에 ‘계초심학인문’이 있다.
어머니 49재 때 상담 인연의료봉사 활동으로 이어져노인들 걱정하는 약사여래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은 벌써 10여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상심과 허탈감이 컸다. 내 주위에 커다란 버팀목이 항상 되어주시고 후원해주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조계사에서 49재를 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동안 주위의 친인척들은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사바세계를 못 벗어나 이곳 세상에 친숙한 나로서는 스님들의 독경과 천도를 위한 제사 구절구절마다 회한과 슬픔이 복받쳐 올라 한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무렵 49재를 상의하러 간 조계사에서 상담을 맡으신 원경 스님(현 충북 제천 덕주사 주지)을 처음 대면하게 됐다. 그런 연유로 원경 스님과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은 원경 스님이 서원하신 취약지구
지극한 기도와 청소가마음 닦는 길이란 사실일깨워 준 소중한 인연 불교인연은 어린 시절 집에 자주 왕래하시며 친가족처럼 지내던 노스님으로부터 출발한다.노스님은 비구니로 법명은 법해(法海)이셨다. 절 이름은 지장암(地藏庵)이었고 무척 작았다. 노스님의 성격은 호탕하고 괄괄하시면서 무척 정갈하셨다. 오히려 어지간한 비구스님보다도 더 스케일이 크고 기개가 있으셨다. 스님이 되신 이력도 참 기구하였다. 옛날 결혼 당일 초례청에서 바로 소박을 맞으시고, 이후 남편 없이 시집살이를 3년 정도 모질게 하셨다. 갖은 학대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셨고, 시집살이를 마친 후에 다시 결혼의 인연이 찾아왔으나 결혼 직전에 교통사고로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자연히 결혼은 파혼 되었고, 이후 병을 얻었다
대학원 수업받으며 인연학자로서 스스로에 엄격병마에 의연했던 연각승 댓돌 위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햇살이 조화롭던 가을날 오후라 바람도 보드라웠다. 구광루 앞마당에는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탐방객들이 왔겠거니’ 하면서 무심히 지나갈 참이었다. 누군가가 “법진 스님 아니신가” 하면서 내 이름을 먹이는 것 같았다. 살펴보아도 아는 이는 없었다. ‘‘밥상머리 정’을 나누었던 이가 탐방객으로 온 건가.’ “법진 스님 아니에요? 나예요, 정두희!”하는 게 아닌가. 정두희라면,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서강대 정두희 교수님뿐인데. 어디에도 그런 선생님은 없었다. 몸이 초췌하게 야위었고, 주름살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친절하고, 맑고,
20년전 도반으로 인연 개혁가이자 포교사로생활불교 대중화 꾀해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초대이사장 덕산 김재일 법사가 가신지 지난 달로 벌써 5년, 그 빈자리가 그토록 큰 줄 몰랐다. 당신의 불교활동과 법문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심오하여 우리가 도저히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기에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이토록 사무칠 것이다. 그러나 극락세계 구품연대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항상 곁에서 지켜주고 있음을 굳게 믿고 김 법사가 남긴 유업을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다. 김 법사는 크게 볼 때 개혁가, 포교사, 교육자, 국제활동가, 자선가, 단체지도자 등의 입장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의 삶은 이러했다. 첫째 불교개혁가로 산중 불교와 기복 불교로 불린 한국불교를 시중의 불교와 생활 속의 불교로 바꾸려 일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