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들을 위해 『육조단경』강좌를 펼친 고우 스님은 1937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61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관응 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강원 공부에 매진하던 스님은 이후 참선에 뜻을 두어 향곡 선사가 주석하던 묘관음사에서 첫 안거를 난 이래 평생 선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스님은 68년 경 도반들과 함께 구산선문의 하나이자 결사도량으로 유명한 문경 봉암사에서 선원을 재건하여 선승 중심의 원융살림 전통을 세워, 오늘날 조계종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스님은 근대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향곡, 성철, 서옹, 서암 선사를 두루 참문하고, 선풍 진작에 뜻을 세워 선승들의 모임인 선
집착하고 미혹한 사람일수록 복잡경계에 끄달리고 지배 받으면 중생끄달리지 않으면 도인 25. 불행(佛行)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네가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해가지고 너의 성품을 미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 어느 곳이 일불승인가 너를 위해 설하리라. 이불승을 구하면 구하는 자체가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법상에 집착할 수 있고, 법이 있다고 보고 집착할 수 있으니까 이불승을 구하는 자체가 너의 성품을 미하게 하는 것이니 구하지 말아라 하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되, 모든 부처 세존이 오직 일대사 인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 하니. 이 법을 어떻게 이해하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네가 나의 설함을 들어라. 경에 모든 부처님이 말하길 일대사 인연 때문에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중국 선종사찰순례단이 조계 남화선사 조전에 봉안된 육조 혜능 스님의 진신상 앞에서 예를 올리고 있다. 참선 역시 방편일 뿐 목적은 깨달음이라법상을 여의면 일상생활이 道 24. 돈수(頓修) 이것이 곧 계·정·혜라고 이름하니 제가 이와 같이 지어서 설하거니와 스님의 생각은 알지 못하니 화상의 보는 바는 어떠합니까.신수 스님은 그렇게 계·정·혜를 보는데 혜능 스님이 보는 견해는 어떠냐고 묻는 것입니다. 혜능스님이 답해 말하되, 이것을 설하는 것은 가히 생각이나 뜻으로 헤아릴 수 없으나 혜능이 보는 바는 또 다르다.계·정·혜라든가 신수 스님이 쓰는 법은 정말 불가사의해서 말로는 할 수 없으나 혜능이 보는 것은 너의
육조 스님의 행화도량 조계 남화선사 대웅보전에 모인 사부대중이 저녁 예불을 올리고 있다. 23. 행화(行化) (단경을)이어받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설하나,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하지 못한다.당시에도 돈오돈수·돈오점수가 있었는데 여기서의 돈교법은 몰록 깨달아서 몰록 닦는다고 가르치는 법입니다. 돈오돈수·돈오점수를 놓고 지금도 이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법으로써 서로 토론하고 부족한 쪽에서는 그걸 배우고 지혜가 수승한 쪽에서는 부족한 분들을 연민과 자비로 대해 그분들의 견해를 끌어 올려주는 관계가 되어야 정상인데,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면서 시비로 법을 논한다면 그 자체가 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비하는
혜능 스님이 대범사에서 법문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37년간 법을 폄으로써 육조 스님의 행화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조계 남화선사. 22. 수행(修行) 도를 찾더라도 도는 보지 못하니, 마침내 도리어 스스로 고뇌함이로다.춥다고 해서 더운 곳을 찾아다니고, 시끄럽다고 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런 사람은 평생 고뇌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만약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바른 것을 행함이 곧 도다.바른 것이 뭡니까. 양변을 여읜 것이 바른 것입니다.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양변을 여의는 것으로 보고, 양변을 여읜 것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양변을 여읜 그 자리가 본질 자리이며 공이라는 자리고 실체가 없는 자리입니다. 바른 것이라고 하니까 비뚤어진 것과
22. 수행(修行) 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 도량인 조계 남화선사 대중 스님들이 예불 시간에 맞춰 대웅보전으로 향하고 있다. 절에 있어서 닦지 아니하면 서방에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 만약 수행하면 동방에 있는 사람이 선한 것을 닦는 것과 같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방정토에서 닦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선한 것도 ‘선하다-악하다’를 초월해서 선한 것을 말합니다. 다만 원컨대 재가에서 청정을 닦으면 곧 서방이니라. 포탈라궁까지 갈 필요가 없이 집안에서 청정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청정한 것은 ‘나다-너다’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군이 묻
21. 서방(西方) 육조 혜능 스님의 탄생지이자 열반지인 국은사에는 스님의 발원으로 지은 대탑이 있다. 지금도 스님의 법향을 따라 국은사를 찾는 향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처는 자성이 짓는 것이니 몸 밖을 향해 구하지 말아라. 자성이 미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고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다. 우리가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다 자성이 짓는 것이지, 밖에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이지 그것이 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본질자리, 즉 자성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자성자리만 보면 부처라
육조 혜능 스님이 법을 펼쳤던 조계 남화선사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웅보전 앞에는 향객들이 마음을 모아 사른향내음과 연기가 늘 함께 하고 있다. 21. 서방(西方) 마음에 다만 깨끗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서방에 가는 것이 멀지 아니함이요, 마음에 깨끗하지 아니한 마음을 일으키면 염불해서 정토에 가 나려 하더라도 이루기가 어렵나니라.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것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아닙니다.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켜 염불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나려고 해도 그건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 정견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견이 안선 사람은 염불을 천년
21. 서방(西方) 육조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 도량인 광동성 광저우 광효사. 중국 최초의 보리수 나무 뒤쪽에 의발탑이 있다.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묻되, 제자가 보니 승과 도속이 항상 아미타불을 염해서 서방에 나기를 원하니 청컨대 화상은 설해 주소서. 저곳에 날 수 있습니까. 바라옵건대 의심을 파해주소서. 위사군이 평소 불자들을 보니 스님이나 도교 믿는 분들이나 신도님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염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아미타불을 염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도 염불을 하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바라는 불자님들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시고 우리가 거기에 가서
19. 멸죄(滅罪) 조계종 중앙신도회 중국선종사찰순례단이 혜능 스님의 출생지인 국은사로 들어서고 있다.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달으면 삿된 것은 제해지고 바른 것을 행함에 죄가 없다. 삿된 것은 ‘있다’‘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복을 닦으면 죄 지음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삿된 것을 없애고 옳은 것만 자꾸 행하면 행해가는 자체가 수행이고 복을 짓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행하는 거기에는 죄가 없습니다. 업(業)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있다’‘없다’로 생각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업입니다. 그러면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것을 아는 그날부터는 어떤 행위를 짓던지 그것은 업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19. 멸죄(滅罪) 혜능 스님 생가 터에 세워진 국은사 육조기념당. 육조상 뒷편에 육조단경을 설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죄를 멸한다. 죄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하는데 사실은 죄가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내가 있다고 착각해서 집착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죄도 함께 없어집니다. 선사스님들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을 없다고 알면 괴로움도 같이 없어집니다. 선지식아 후대에 나의 법을 얻는 자는 항상 내 법신이 너의 좌우에 여의지 아니함을 볼 것이니라. 육조 스님이 나의 법신이라고 했는데 이 법은 보편된 법신입니다.
18. 돈오(頓悟) 조계 남화선사 조전 뒷편에는 혜능 스님이 주장자로 찍어 물길을 낸 탁석천이 있다. 순례단이 탁석천으로 들어가는 패방을 나서고 있다. 만약 스스로 깨달은 자는 밖으로 선지식을 가자하지 않음이니, 밖으로 선지식을 구해서 해탈하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스스로 깨달은 자는 밖에 있는 선지식에게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자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선지식은 다만 내 안의 선지식을 보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 분이지, 전적으로 그분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오랫동안 알았던 스님이 큰스님이 되면 ‘우리 스님’ 하면서 특별하게 그러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선지식을 알면 곧
조계 남화선사 조전에 봉안돼 있는 육조 혜능 스님의 진신상. 중국불자들은 물론 한국불자들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17. 견성(見性) 일체의 경서 및 문자와 대소 이승과 십이부경이 다 사람으로 인해서 있음이니, 지혜의 성품을 인하는 연고로 능히 건립함이니라.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나는 한 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달을 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禪)입니다. 선은 철저히 달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만이 오직 진리이고 법입니다. 그리고 혹시 손가락 이야기를 하면서 수행해서 달을 보라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 두지 않고 곧 손가락을 부정하고 달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정견 갖추면 ‘금강경’한 권 가진 것과 같다 16. 근기(根機) 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도량인 조계 남화선사 조전. 조전 내부에 육조 스님의 진신상이 봉안돼 있다. 선지식아 만약 매우 깊은 법계에 들어가서 반야삼매에 들고자 하는 자는 반야바라밀행을 닦을 지니, 다만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을 가지면 곧 성품을 보아서 반야삼매에 들어감이니라. 오온이 개공이고, ‘나다-너다’‘좋다-나쁘다’가 없는 상태를 반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가지는 것이 반야바라밀행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견을 갖추면 『금강경』 한 권을 가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활자로 된 종이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고 공임을 아는 것을 말하는
15. 반야(般若) 고우 스님이 육조 스님의 삭발 수계도량 광저우 광효사를 참배하고 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불교 공부를 한다고 떠들면서 외도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할 뿐, 겉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공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교 공부를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적적성성으로 행하고 생활을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때에 망상이 있으면이 망상도 ‘있다-없다’로 분별하는 것을 모두 망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망상은 참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 생각을 행하는 것이 ‘내가 실체가 없고 공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참되게 있다고 이름함이니라.앞에서 적적성성을 말했는데, 있는 것도
15. 반야(般若) 고우 스님이 중국 황매현 오조사를 방문, 혜능 스님이 수행했던 방앗간을 돌아보고 5조 홍인 스님의 진신상이 봉안된 조전을 참배하고 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기고,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겨 버립니다. ‘나다’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부터 반야도 끊기고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자기 마음부터 괴롭고 자기가 자기를 학대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무아(無我)임을 알아야 하고 어째서 무아인가 하는 것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아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뱐야가 생긴다.이것은 ‘나’라는 것이 연기(緣起) 현
가치관 바꿔야 행복듣고보는 모든게 지혜 어리석음 때문에 돈 낭비1년 수조원에 이를 것 고우 스님이 중국선종사찰 순례에 나선 불자들과 함께 광주 광효사 육조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있다. 14. 성품이 빔(性空)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않으며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대승(大乘)이다. 이 모든 만법이 성품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하나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성(自性)이라 하지만 크게 보면 법성(法性)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책 속에 자성이 있어요
봉사-기도-염불에정견 갖추면 금상첨화 아무 생각 없으면‘空’ 아닌 ‘무기공’ 13. 三歸 (삼귀의) 고우 스님이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 도량인 중국 광주 광효사에서 비문을 보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늘 말씀드리지만,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을 갖추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 반발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나는 『육조단경』, 『서장』, 『선요』를 보면서 확신하고 말하는 겁니다. 근래 큰스님들은 당신이 능력도 있고 도를 통한 분들이니까 정견을 갖추라는 말을 안 했지만, 지금은 선지식이 가고 없는 세상에 우리는 바른 믿음으로 정견을 갖추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선을 하든지, 봉사, 염불, 기도 등 이왕에 하던 거 그냥 하면서
밖에 있는 부처님 믿고자기를 중생이라 학대 자기의 부처님을 찾아서본래 모습대로 당당해야 13. 三歸 삼귀의 황매현 오조선사에는 육조 혜능대사가 방아를 찧으며 수행하던 곳이 있다. 고우 스님이 방앗간 앞 화랑 벽면에 그려진 혜능 스님의 수행 일화를 보고 있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正)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아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역시 ‘있다-없다’를 초월한 것이 바른 자리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애착이 생깁니다. 남편에 대한 애착, 아내에 대한 애착 그러면 그 애착이 상대편으로 하여금 굉장히 피로하게 합니다. 그 피로가 누적이 되면 싸움으로 갑니다. 그래서 나중에 도장
12. 참회 (懺悔) 육조 혜능 스님이 30여 년간 법을 펼쳤던 중국 광동성 소관시 남화선사 입구에 선 고우 스님.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라. 여기 부처님도 밖에 있는 부처님으로 보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부처님으로 봐야지요. 내 안에 있는 부처님한테 귀의하여 스승으로 삼아라. 여기 삿되고 미혹한 외도는 뭐냐? ‘있다-없다’에 빠져 있으면 외도입니다. 우리도 ‘있다-없다’ 착각에 빠지면 외도입니다. 외도라고 해서 뿔이 나고 괴상하게 생긴 게 아니거든요. ‘있다-없다’에 빠진 사람들은 전부 뭔가 밖으로 구합니다. 양변에 ‘있다-없다’ 빠진 사람들은 모든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