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보살두(石造菩薩頭). 높이 3.7㎝의 소형 보살두로 고려시대 유물이다. 삼불보관에 입술 일부와 화불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는 희귀한 고려시대 유구와 유물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조사지구 전역에서 수습된 대지국사명문비편을 비롯한 고려시대 유물 약 500여점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은제칠보문투각장식, 청동제 합(盒)과 수저 등을 비롯한 금속유물, 금니 목가구편 등 목제유물, 분청사기, 청자, 도기 등의 도ㆍ자기류 및 어골문(魚骨文)계열과 초화문(草花文)계열의 평기와, 막새, 치미 등의 기와류로 분류된다. 이 중 주요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불
A지구 발굴 전 전경. 대지국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의 상부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유구는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토사로 매몰되어 있었다. 삼천사지 탑비구역 유적의 발굴조사는 A, B의 2개 지구로 구분하여 실시되었다. 해발고도 342.4m에 위치하는 A지구에서는 대지국사탑비, 대지국사탑비의 귀부와 리수, 부도 지대석과 하대석, 탑비전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A지구에서 서남향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해발고도 302.6m에 해당하는 B지구에서는 법당지(法堂址)로 보이는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발굴 이전 상황을 살펴보면, 탑비구역(A지구)의 경우 대지국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의 상부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유구는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 이전에도 대지국사 명문 비편을 수습하여 소개한 자료는 몇 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선조(宣祖)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 1637~1693)가 편찬한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실명 여왕필(失名 麗王筆)’이라 표기한 삼천사비의 비양명(碑陽銘)편 3개와 ‘실명 삼천사 비음(失名 三川寺 碑陰)’이라 표기한 비음명(碑陰銘) 단편 2개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청나라 학자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도 비양(碑陽) 파편 8개, 음기(陰記) 파편 8개가 필사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권(
서울역사박물관 김 우 림 관장 특별기고 지난 11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명문비편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극히 간략한 언급만 남아있을 뿐 이에 관한 문헌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삼천사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삼천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이 상세히 소개한다. 편집자 삼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