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사 손바느질 전수자치열한 수행으로 가사 조성단양 영통사서 마지막 불사“바늘만 쥐면 흐린 눈 밝아져”평생 흐트러짐 없는 삶 귀감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늘이 붉은색 가사 조각을 관통했다. 하얀색 명주실이 천 속으로 휘감겨 사라진다. 바늘을 쥔 고령의 노보살 김복녀(방편행, 1929~2012)씨의 눈이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0.5mm 바늘땀 하나가 붉은 가사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바늘땀이 너무 드러나서도, 너무 많이 숨어도 안 된다. 한 번에 세 땀씩 새겨 넣는 상침(上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크기와 간격을
가난에 내몰린 기생의 삶시인 백석의 연인 되기도 전쟁 후 요정 대원각 운영 법정 스님 ‘무소유’에 감화천억원대 부지 사찰로 시주 ▲1997년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합장한 길상화 보살(맨 왼쪽)과 법정 스님. 사진제공 맑고향기롭게. 가난은 갑작스레 닥친 악재였다. 열 여섯, 아직 어린 소녀에겐 가난한 행복보다 조금 불행하더라도 풍족한 삶이 차라리 나았다. 부유한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안은 건재했다. 1932년 무렵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재산을 모조리 날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의 가족은 미처 손도 쓰지 못한 채 끔찍한 가난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가난은 서글픈 현실
상도선원 전신 백운암 창건어음사기 주동자 장영자에불법 전파하며 수양딸 삼아 1930년 초 선학원서 발심장학회·불사에 재산 희사조계종정 서옹 스님도 찬사 ▲장대보화 보살이 희사한 옛 백운암 대웅전에서 서옹 스님이 법문하는 모습. 1982년 봄,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라 칭해지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유례없는 희대의 사기사건이자 권력형 금융사기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시작은 단순한 외환관리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어음을 악용한 막대한 사기행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
공주 첫 고아원 풍덕원 설립갑사 팔상전 거주하며 자비행고아·노약자 70여명 보듬어 어린 시절 궁궐서 불교 귀의구제 활동 근간은 깊은 불심 불상·불경 조성에도 원력 ▲공주 갑사 팔상전에 위치한 공주지역 최초의 고아원 계룡 풍덕원의 모습. 한복을 입은 복덕월 보살(원 안)과 그녀가 보살피던 고아와 노약자들이 모여 앉았다. 공주 원효사 혜월 스님 제공 예로부터 사찰은 때때로 종교와 복지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부처님 법음을 듣고 신심을 다지는 종교적 귀의처인 동시에, 고아들을 양육하는 아동보호시설이자 나이 든 신도들이 삶을 회향하는 요양원이기도 했다. 사회복지라는 용어와 개념이 법
박정희 전대통령의 영부인 양지회 설립해 보살행 펼쳐매일 수십건 도움 요청 받아 깊은 불심이 자비행 원천도선사 청담 스님께 수계“남 위한 삶 살겠다” 발원 ▲1973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 참석자들과 기념촬영. 국가기록원 제공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 날카로운 한발의 총성이 광복 29년 기념식이 열리던 국립극장 강당을 강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연설 중이었다. 단발마 총성에 경호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재벌가 쌍용기업 안주인전통 문화에 남다른 원력 깊은 불심으로 불사 도맡아 송광사·일지암 등 복원 주도한평생 무주상 보시에 매진 ▲명원 김미희 보살의 생전 모습.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집은 마치 부처님 품과 같았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이가 누구든 따스히 보듬었다. 부엌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찌개가 끓었고 밥솥엔 밥이 가득했다. 누구든지 따뜻한 밥 한끼 먹고 쉬어가라는 깊은 배려였다. 그래서 신문로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문로 안주인을 찾아가라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계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부터 동네 구두닦이와 청소부
총독부의원서 간호사 근무 3·1운동 계기로 변화 맞아 간우회 조직해 독립투사로 결혼 후엔 남편 활동 지원극심한 생활고에 고통받다해방 앞두고 외로운 죽음 ▲1920년 단재 신채호 선생과의 결혼 사진(왼쪽).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박자혜 여사와 그녀가 운영했던 산파소 모습(오른쪽). 독립기념관 제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치욕을 딛고 역사 속 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우고자 했던 단재 신채호의 선생의 일갈이다. 그는 민족계몽에 앞장섰던 역사학자이자 철학가,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다. 일본의 농간에 흔들리던 역사를 철저히 고증해 한민족의 자주성을 증명해 냈
‘금강경’ 설법 듣고 불교 귀의국제극장 사장 역임한 재력가효봉 스님 따르며 불사 매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이라. 마음이 머무는 곳에 애착과 번민이 생기고 고통이 싹튼다. 우리의 마음은 허공의 구름과 같아 머무는 바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니, 한낱 마음에 끄달려 집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자유로이 놓아버려라. 그 순간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스님의 일갈에 일순 눈앞이 번쩍했다. 몽둥이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민의 해답, 그 첫 번째 열쇠를 비로소 움켜쥔 기분이었다. 생애 처음 경험한 전율에 몸이 떨렸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시름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대명사 일본 유학시절 인권에 눈떠 남녀 평등·여성 해방 주창 이혼 후 사회적 냉대에 봉착행려병자로 비참한 죽음 맞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948년 12월10일 저녁 8시30분. 신원불명의 한 여성이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았다. 곁을 지키며 애도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거리를 떠돌다 한달전 입소했다. 그 당시 이미 중풍에 영양실조, 기타 등등의 합병증이 겹쳐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죽음은 간략한 내용으로 관보에 게재됐으나, 정작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름과 주소, 연락처 등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정보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서 개종해 불교 운동 1920년대 여성불교 구심점조직 꾸려 대사회 참여 유도 기복불교 극복 노력 일환으로 수행 모임 ‘부인선우회’ 결성교리교육 등 신행문화 개선도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연의 시작은 한통의 편지였다. 얼굴도 모르는 한 남성이 불현듯 보내온 편지는 순진한 여학생 우봉운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편지를 보낸 상대방은 기독교계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수려한 필체에 화통한 글귀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편지를 본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답장을 재촉했다. 사회운동을 하는데다 신종교인 기독교를 믿는다면 사고방식도 훨씬 깨어있을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무엇보다 1900년대 초, 일제치하의 한
전국 유일 여성 줄타기광대출중한 끼와 미모로 유명세남사당패 우두머리 추대도 청룡사 근거지로 전국 유랑조선 왕실, 정3품 벼슬 하사불교와의 인연 평생 이어져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일순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소란스레 장내를 들썩이던 징과 꽹과리 소리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신명에 들떠 어깨춤 추던 이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찬물 끼얹은 듯 고요해진 장내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허공을 가로지른 동아줄 하나에 가닿았다. 까마득한 높이의 허공에 팽팽히 당겨진 줄은 살랑대며 지나는 미풍에도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객석은 그 미세한 흔들림에도 숨을 죽였다. 줄의 양쪽 기둥에는 술과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보모봉은사 기도 인연으로 입궁엄비의 도움으로 재산 모아 퇴궐 후엔 나눔·회향에 매진 청암사 등 사찰불사도 이끌어마지막 재산 희사해 학교 설립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930년 3월, 한 노부인의 이야기가 주요 신문지면을 일제히 장식했다. 평생 모은 재산 전부를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희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보시 금액만 무려 30만2100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액수다. 1922년 100평 규모의 청년회관 설립에 1만원이 소요됐으니, 30만2100원의 가치를 환산하면 3000평 규모의 건물 설립비용에 준하는 셈이다. 유례없는 통 큰 보시로 전국을 들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