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반쇼인은 일본 3대 원당의 하나로, 덕혜옹주가 시집 간 쓰시마도주 집안의 도찰이다. 본당의 빛바랜 아치형 지붕이 초여름의 햇살 아래 고졸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작은 시내를 건너 삼나무 숲 쪽으로 난 긴 계단을 따라 묘지로 들어서자 음습한 기운이 가득해, 이곳이 사자(死者)의 땅임을 절로 알게 한다. 묘지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빽빽한 삼나무 숲 음기에 초여름의 싱그러움마저 묻혀버린 이곳은 쓰시마 도주 집안의 원찰 반쇼인이다. 반쇼인은 일본 3대 원당 중의 하나다. 쓰시마라는 협소하고 외떨어진 공간인 덕에 32대에 걸친 소우(宗) 집안의 존속이 가능했고, 이렇게 유서 깊은 원찰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소우 집안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가 시집온
백제 비구니 스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스젠시는 면암 최익현이 단식 끝에 숨을 거둔 후 그의 유해가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여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쓰시마 앞바다, 푸른 수면 위로 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산호 빛 물보라가 부서져 내린다. 혼슈의 맨 끝인 후쿠오카 항에서 쓰시마까지는 뱃길로 147km 거리. 이 바닷길은 한반도와 이어져 있고, 이제 나의 긴 순례여정도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젯밤 혼슈를 떠나는 기념으로 마신 아사히 맥주 탓일까, 쓰시마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통증이 강해지고 있다. 쓰시마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이즈하라 항 인근에 위치한 스젠지(修善寺)라는 작은 사찰이다. 1960년대 시골마을을 연상시키는 좁고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가자 스
1869년 신불분리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 카스가다이샤는 고후쿠지가 관리하는 신사였다. 신불분리정책 이후 신사의 모든 불보살과 스님들은 신사 밖으로 쫓겨났고, 신사는 가미(神)의 전용공간이 되었다. 1868년, 나라 일대에서 활동하는 신관들이 카스가 신사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카스가 신사를 관리하던 승려들을 몰아내고 신사 안에 모셔진 불상과 불경, 불구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던졌다. 한 더미로 모아진 경전 위로 불이 당겨지고, 순식간에 불보살 상(像)들은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1000여 년 간 카스가 신사를 관리해온 고후쿠지 승려들도, 카스가에 남고 싶다면 승려를 포기하고 신관이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다 끝내 신사 밖으로 쫓겨났다.이렇게 카스가 신사는 신관들의 차지가 되었고 고후쿠지는 폐쇄되었다. 고
시공업체의 부도로 일시 중단됐던 승가원 자비복지타운 건립 불사가 4월 30일 재개됐다.사회복지법인 승가원(이사장 종범 스님)은 5월 3일 “건설업체의 부도로 4월 초 공사가 일시 중단됐던 승가원 자비복지타운 건립이 시공연대보증회사인 CH건설과의 계약을 통해 30일부터 본격 재개됐다”고 밝혔다. 승가원 자비복지타운은 현재 외부공사가 모두 마무리된 상태로 기계설비와 전기통신 등 내부설비 공사만을 남겨두고 있다. 승가원은 CH건설이 4월 30일 공사를 재개함에 따라 6월 20일 이전 자비복지타운의 내부설비를 비롯한 진입로, 마감공사 등을 모두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200여 소쩍새마을 장애인들은 이르면 7월 초부터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된다. 2004년 교계 최대 장애인 생활시설 소쩍새마을의 이
만푸쿠지 대법왕전 전경. 만푸쿠지에는 불상 하나, 나무 난간의 문양 하나까지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는 중국 양식으로 장엄돼 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영화 ‘홍등’에 등장하는 치파오를 입은 여인이 이층 문루에서 둥근 아치문을 열고 내려다볼 것만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 줄곧 펼쳐지고 있다. 소나무가 드리워진 높다란 솟을대문을 지나 중국등이 총총 달린 경내에 들어서자 우리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기는 이는 그 유명한 포대화상이다. 두툼한 배를 내밀고 씩 웃는 포대화상과 중국식 아치문, 그리고 처마가 길게 휘어진 이층 목조건물이 들어선 정원은 마치 내가 중국의 한 궁궐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곳은 바로 우지의 ‘차이나타운’ 만푸쿠지(萬福寺)로, 일본 속에 명나라
사이다이지 경내의 작은 연못위로 이름모를 꽃이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어디선가 하이쿠 작가 바쇼가 나타나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를 읊조릴 것만 같다.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히려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 꽃같이 서러워라 -한하운의 ‘생명의 노래’ 중에서 사이다이지 연못에 드리운 연둣빛 버들가지를 바라보며 한하운 시인의 ‘생명의 노래’를 읊조린다. 어디선가 닌쇼 스님이 이 노래를 듣고 있을 것만 같다. 700여 년 전 당신이 가슴으로 불렀던 ‘생명의 노래’를 듣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나의 목소리를…. 중세 일본에서는 문둥병(한센병) 환자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하긴 중세 서양에
사이다이지 금당으로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고 있다. 금당 앞에는 원래 동탑이 위치해 있었는데, 고후투지나 호류지의 오중탑과 비슷한 형태의 목조탑이었다고 전해진다. 제법 찬 새벽바람이 옷섶을 헤집고 밀려들어온다. 벙어리장갑에 목도리를 칭칭 휘감은 완전무장의 자세로 사이다이지(西大寺)에 들어섰다. 그런데 저런! 별안간 짧은 반바지에 타이즈를 신은 꼬맹이들 수십 명이 병아리 떼처럼 몰려오고 있다. 영락없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 등장하는 ‘메이’들이다. ‘요이, 스타또!’ 선생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의 구령이 떨어지자 병아리 떼들은 일제히 ‘와~’ 함성을 지르며 사찰 경내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일본에서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겨울에도 옷을 가볍게 입힌다는
지난해 완공된 야쿠시지 대강당. 일본의 고도(古都) 나라를 찾을 때마다 수백 년 전의 낯설고 오래된 거리 속에서 헤맨다는 느낌이 든다. 인구 14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라지만 옛 아스카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이곳은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마을의 모습에 가깝다. 나라의 옛 지명은 비조(飛鳥), 혹은 명일향(明日香)으로, 둘 다 ‘아스카’로 발음된다. 날아가는 새, 즉 날새(飛鳥)는 바로 ‘내일(明日)’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현이라는 이어령 장관의 설명을 빌자면 바로 ‘내일의 고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1400여 년 전의 ‘내일의 고을’이 지금은 ‘아득한 고향 마을’로 다가오고 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일 따름이다. 나라에는 호류지, 고후쿠지, 야쿠시지, 도다이지, 도쇼다이지 등 1000년의 전통을 자
뵤도인 봉황당의 그림자가 검고 푸른 연못위에 드리워져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이곳은 일본 10엔짜리 동전의 모델이기도 하다. 교토 동남쪽에 위치한 차(茶)의 도시 우지(宇治)에 들어서노라니 어느덧 해는 저물어 도시 전체에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꼽히는 뵤도인(平等院) 봉황당(鳳凰堂)을 제대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뵤도인 경내로 들어서니 봉황당의 모습이 시나브로 희미해져가고 있다. 다행히 연못의 수면은 잘 닦인 청동거울처럼 검은 빛을 더해 외려 1000년 된 건물의 정경을 선명한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봉황이 우아하게 날개를 펼친 듯, 검푸른 연못에 고즈넉이 자태를 드리운 봉황당은 마치 아미타
고후쿠지 동금당과 오층탑. 헤이안 시대 말기 후지와라 집안이 건립한 사찰 고후쿠지는 법상종을 대표하는 관사(官寺)로 기능해왔다. 삼경(三更)쯤 지났을까. 고후쿠지(興福寺)를 둘러싼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젖어있었다. 법당의 부처님도, 원숭이연못(猿澤池)도 모두 깊은 잠에 빠진 그 시간, 고후쿠지 경내에 단 하나의 방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곳은 고후쿠지를 대표하는 학승 조케이가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은 그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지만, 고뇌하는 표정 위로 수천가지의 단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12세기) 염불만이 정토에 이르는 유일한 수행법이라는 호넨의 주장이 열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고후쿠지의 젊은 사미들은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그 이야기를 쑥덕였고, 장로들은
고후쿠지 국보관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아수라상. 고뇌에 찬 듯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번뇌가 느껴진다. 고후쿠지(興福寺) 동금당(東金堂)에 들어서자, 특이한 조상(彫像) 하나가 눈길을 끈다. 부처님과 문수보살 사이에서 ‘인상을 찌푸린’ 영감님 한 분이 앉아 있다.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그는 다름 아닌 유마거사다. 재가불자인 유마거사가 법당에 모셔진 것도 그렇거니와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찌푸린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곳에 유마거사를 모신 것은 고후쿠지가 후지와라 가문의 원찰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깊어 보인다. 고후쿠지는 헤이안시대 말기 140여 년간 천황의 섭정을 담당했던 후지와라 집안이 건립한 사찰이다. 당시 고후쿠지에서는 매년 10월이 되면 7일간 유마회가 열렸다. 유마
히에이잔 사이토오 지역에 위치한 법화당과 상행당은 각각 ‘나무묘법연화경’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염불수행을 하던 곳이다. 법화당 전경을 찍기 위해 구릉 위로 올라서자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위로 작은 새발자국들이 어지러이 박혀있다. 그 흔적을 보니 너댓마리 산새가 한참동안 그곳에서 먹이를 찾아 노닐었던 것 같다. 사이토오(西塔)에 위치한 법화당과 상행당은 작은 다리로 연결돼 있어 앞에서 보면 한건물인데 옆에서 보면 두 건물이 된다. 이 건물은 히에이잔의 수행자들이 ‘나무묘법연화경’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법화와 아미타불의 삼매를 얻기 위해 수행하던 건물이다. 이곳 법화당과 뒤편의 흑곡은 히에이잔 속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히에이잔의 세속화를 피해 모여든 스님들의 작은 은둔처였다고
료겐 스님은 천황의 명을 받아 이곳 시키코오도오(四季講堂)에서 매 계절마다 법화경을 설했다. 이곳은 스님의 별칭인 원삼대사당(元三大師堂)이라고도 불린다. 끝없이 내리는 새하얀 눈꽃들로/우리 걷던 이 거리가 어느새 변한 것도 모르는 채/환한 빛으로 물들어 가요. 일본의 겨울은 참으로 묘연(妙然)하다. 겨울과 봄의 풍경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설산 속에서 새순이 움트고 겨울바람이 가장 매서운 시기에 봄의 태동은 이미 동토(凍土) 위로 드러난다. 눈 속에 드러난 꽃망울을 보고 있노라니 나카시마미카의 ‘눈의 꽃(雪の華)’이 떠오른다. 잠시 감상에 젖어 그 노래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예외 없이 히에이잔에도 ‘눈의 꽃’은 대지위로 뜨거운 생명력을 터트리고 있다. 요카쿠 지역에
엔닌 스님은 당에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인 848년 히에이잔에 요카와츄우도오를 개창하고 밀교적 성격이 강한 천태교학을 설파했다. 일본 히에이잔의 스님 엔닌(圓仁, 794∼864)은 838년 6월 13일 중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15세에 히에이잔에 입산해 사이초 스님의 제자가 된지 30년, 스승이 입적하고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기였다. 스승의 뒤를 이어 히에이잔 학당을 지켜왔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이초의 천태교학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미완성인 채 남아있었고, 중국의 최신 이론은 더 이상 수입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소망은 중국 천태산으로 가서 직접 고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일본의 천태교학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인연은 쉽게
히에이잔 콘본츄우도오(根本中堂) 전경. 이 건물은 사이초 스님이 히에이잔에 입산한 후 가장 먼저 세운 법당이다. 스님 당시에는 이치죠오시킨(一乘止觀院)으로 불리웠지만 이후 콘본츄우도오로 개칭되었다. 1월의 히에이잔(比叡山)은 설국(雪國)이다. 달포 넘게 쌓인 눈은 히에이잔 구비마다에 또 다른 구릉을 이룬 채 그 진면목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몇 시간째 헤매고 있건만 이 산 어디에도 엔랴쿠지(延曆寺)란 이름의 절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긴 세월 속에서 건물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것일까. 아니면 절마저 눈에 묻혀버린 것일까. 굽이굽이 눈길을 헤쳐 엔랴쿠지의 시작점인 토오토오(東塔) 지역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천리를 비추고 한구석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의 보배(照千一隅此則國寶)’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쇼다이지 금당 서쪽에 있는 계단(戒壇)은 간진 화상이 전한 삼사칠증(三師七證)에 근거하여 승려의 수계가 행해진 장소다. 현재의 계단은 1978년 복원된 것이다. 그의 눈은 굳게 닫혀 있다. 가부좌를 튼 단아한 몸매, 손가락 끝으로 이어진 일원상, 빛바랜 홍조가사 사이로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어느 누구도 그의 눈빛을 본 적이 없다. 748년 일본으로 건너오는 바다에서 맞은 거센 풍랑으로 시력을 잃은 이후 그의 눈은 1300년 간 저렇게 닫혀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잃은 대신 수천 수만 일본인들의 눈을 밝혔다. 무명에 갇혀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에 광명의 빛을 전해준 것이다. 그는 불자들에게 있어 삶의 나침반이자, 수행자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인 계
야쓰하시(八橋) 다리와 류텐(流店) 정자. 정자 한 가운데를 물길이 지나며 내부에는 아름다운 돌들이 배치돼 있다. ‘분명 지겐도 불당 앞에 다실이 있다는데….’ 한 손에는 카메라를, 다른 한 손에는 안내문을 들고 이곳저곳 뛰어다녀도 다실을 찾을 수가 없다. 지겐도 불당 앞을 서너 차례 돌다가 문득 허름한 초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다도의 진미는 초암에 있다’고 역설한 센 리큐(千利休, 1522~1591)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저 원두막이 다실일까.’ 건물 앞으로 다가서자 ‘고주산쓰기 불당 다실(五十三次腰掛茶室)’이라는 팻말이 선명하게 보인다. 며칠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 다실을 비롯해 중세 귀족들의 화려한 다실에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여행자에게 이 건물은 평범하다 못해
1700년에 완성된 오카야마 고라쿠엔. 멀리 오카야마성을 품에 안은 고라쿠엔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소우주로 불린다. 학이 뜨고 난 자리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물결의 흐름은 넓게 퍼지면서 서서히 약해지고 연 이파리 속살로 스며들어 마침표를 찍는다. 사와노이케 연못과 부드럽고 느슨한 구릉은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듯 하다. 이제 부드러운 모래톱 위 초승달처럼 다듬어진 이랑을 지나, 대나무 숲으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리라. 저 돌다리를 건너면 중세 일본인들이 갈망했던 바로 그곳, 선림(禪林)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 내 근심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정신세계 표현한 작은 우주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하나로 알려진 오카야마(岡山) 고라쿠엔(後樂園)에 도착했다. 이
단풍에 휩싸인 도코지 대웅보전. 어린 시절 가슴 깊숙이 자리잡은 고독은 인간을 내면적으로 성숙시키기도, 때로는 감정 결핍 상태의 미완성물로 만들기도 한다. 그 상실감은 이후 그의 선택에 의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킨다. 그럼에도 한번 패인 감정의 골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1571). 전국시대 제일의 모략가이자 주고쿠의 패자로 불리는 그의 삶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수식어는 ‘고독’이다. 1558년 8월 그가 큰아들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는 왜 모토나리가 고독과 상처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야 했는지 짤막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로지 형 모키모토(興元) 한 사람을
검은 그림자 속으로 모리 집안의 가묘가 보인다. 비석 아래 500기의 석등은 이 집안의 가신들이 주군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바친 것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시 북쪽에 위치한 도코지(東光寺)는 그림자가 무척 아름다운 사찰이다. 절에 들어서는 순간 일주문 그림자 속으로 도코지 단풍길이 환하게 비춰지고, 낙엽 덮인 오솔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짙은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우수에 찬’ 대웅보전이 드러난다. 다시 대웅전을 지나 뒤편 언덕을 오르면 또다시 검은 계단의 그림자 속으로 모리 집안의 가묘가 등장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빛 속에 드러난 사물을 더욱 또렷이 보이게 한다. 때론 그 어둠의 그림자가 빛보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치 삶의 애환이 드리워진 얼굴 속에서 더 깊은 인간미가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