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먹으매밥이 더욱 맛나고잠깨어 마시매차 맛이 새삼 달구나외떨어져문 두드리는 이 없나니기쁘구나! 빈 암자,한 감실에 부처와 있음이 飢來喫飯飯尤美睡起茶茶更甘地僻縱無人戶庵空喜有佛同龕 불교는 사후의 ‘천국’을 말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행복과 부처를 찾는다. 하루 해가 지는 이곳은 도솔천이다. 사진은 선암 스님 作.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내일 극락에 가는 것이 100% 보장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오늘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불교도가 얼마나 될까? 불교의 궁극 목표가 열반과 해탈, 깨달음, 혹은 부처가 되는 일일까?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갖고 기꺼이 자기 몸에 폭탄을 두르고 군중 속으로 뛰어든다. 다른 종교
죽고 사는 길은예 있으매 머뭇거리고나는 갑니다말도 못 이르고 가나닛고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한 가지에 나고가는 곳 모르온져 아, 아! 미타찰에서 만나리니내 도 닦아 기다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또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를 따르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보다 쉬운 언어로 그리도 깊이 있게 죽음을 노래한 시는 없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다. 월명사는 누이가 죽자 49재를 치르며 이 노래를 부른다. 첫 7일에서 일곱째 7일 동안에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 영역인 중유(中有)에서 극락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정하지 못하고 떠돌며 심판을 기다린다. 그래서
‘꽃 이름’에 갇힌 ‘실체’ 비판‘게’는 언어 떠난 수행자 상징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땅인가. 뻘밭은 모든 생명이 나고 죽는 곳이요, 연기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이다. 1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나는 또 하품을 한다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
‘줄 없는 거문고 가락’ 비유로 ‘언어 떠난 세계’ 시각적 묘사 산은 푸릇푸릇 물은 파르무레새는 재잘재잘 꽃은 함빡함빡이 모두 줄 없는 거문고 가락이러니,푸른 눈 호승(胡僧)을 슬카장 보누나. 山靑靑水綠綠鳥花簇簇盡是無絃琴上曲碧眼胡僧看不足 세계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설명. 이를 마조도일은 ‘줄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했고 부처님은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설하셨다. 고려 말의 선승 백운화상 경한(白雲和尙 景閑: 1299-1375)이 지은 선시 ‘산에 머물며(山居)’중 한 편이다. 산도 푸르고 물도 푸르다. 자연은 그 모습 그대로 있다. 한 티끌 없이 그대로의 자연은 진여 불법이다. 그 자연에 묻혀 있는 새들은 불법의 가락
시·공간의 교직으로서설 내린 암자 묘사眞俗不二 경지 표현 한여름에 들린가야산독경 소리 오늘은철 늦은 서설이 내려비로소 벙그는매화 봉오리. 눈 맞는해인사열 두 암자를오늘은 두루 한 겨울면벽한 노승의 눈매에미소가 돌아. 산사를 하얗게 덮은 눈은 모든 차별과 구분을 너머 적막의 빈틈마저 남김없이 채운다. 사진은 해인사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는 눈 덮인 해인사 풍경. 김광림 시인의 ‘산’이다. 고도로 절제된 생략이 주는 함축미와 선적인 이미지가 비단을 짜듯 공간과 시간을 아울러 교직(交織)하는 아름다움이 빼어난 시, 개화(開花)의 은유와 노승의 깨달음이 절묘하게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를 이루면서 여러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텍스트다.
소멸로 치닫는 무의미한 반복?존재하지만 머물지 않는 원리! 이 눈이 녹고나면 길은 사라지는 것일까 드러나는 것일까.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여동완 씨가 촬영한 티베트 창장공로 상의 겨울. 언제나사그를 향하여온몸으로 달렸다가는그에 이르려는 찰나,맞은편으로 내닫는다. 이제사어느 쪽에도다다르지 못함을 알련마는잠시도 머물지 않은 채쉼 없이 진동한다. 모두사태엽 풀리면절로 멈출 운명이면서극미하게 풀쳐내어멈추지 않는저 역설, 저 삶! 필자가 지은 ‘시계추’란 시다. 언제나 시계추는 목표를 향하여 온힘을 다해 달리지만 그에 이르려는 찰나 다시 반대편으로 내닫는다. 어떻게 보면, 이 무의미한 반복을 영원히 하도록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이 시계추의 속성이다. 어디
천 척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한 물결이 막 일더니 만 물결이 따라 이누나.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와 물고기 물지 않으니배에 가득 훤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千尺絲綸直下垂一波動萬波隨夜靜水寒魚不食滿船空載月明歸 운흥사본(雲興寺本)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도천(道川) 야부(冶父) 스님의 ‘금강경송(金剛經頌)’이다. 야부(冶父)스님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적(狄), 이름은 삼(三)이다.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서 도천(道川)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정인계성(淨因繼成)에게서 법통을 받아 임제(臨濟)의 6세손이 된다. 이 시에서 마지막 구를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 밝은 데 돌아오도다.”라 흔히
새에게 둥지가 이승의 집이라면 구름은 저승의 집이다. 시인은 구름 뒤로 사라지는 새를 보며 이승의 삶을 마감할 준비를 했다. 이 가을날엔,어찌 이리 늙는가구름 가는 새此秋は何で年よる雲に鳥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 1644∼1694)가 죽기 직전에 쓴 하이쿠다. 계절마다 만나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낱말로 압축한 시어인 계어(季語, 키고)는 ‘이 가을날엔’이다. 휴지(休止)를 주어 함축적인 여백을 형성하는 기레(切れ) 또한 이 부분이다. “이 가을 날엔,---(此秋は, ---)”이라 읽으며 길게 휴지를 준다. 이 여백을 채우는 것은 계어에 나타난 기호들의 환유와 은유의 조합, 겉으로 드러난 현전-텍스트와 숨어 있는 잠재-텍스트 사이의 인드라망과 같은 무한
산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산이 혹시 변한 듯 보여도 이 역시 산을 보는 내 마음이 변했음이다. 까치발을 하고 겨우 옥수수를 따던 때,모든 산들은 하늘에 닿아있었고티 없이 푸르렀다. 평동에 나가 강냉이를 튀겨 오던 때,산들은 강 따라 끝없이 달렸고듬성듬성 가시덤불을 감추고 있었다. 아들놈에게 옥수수 부치고 오던 때,산들은 길들에 발을 내준 채 오도카니 서 있었고갈수록 거뭇거뭇했다. 돌아와 까치발을 하고 옥수수를 따는 오늘,산들은 곤두박질쳐 강이 되었다가굽이를 바꿔 길로 달리다가는불쑥 솟구쳐 하늘이 된다. 정녕, ……흐르는 것은 나,산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었다. 필자의 고향인 제천 진소골-영화 ‘박하
마음은 물질이나 육체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성과 속, 과거와 현재, 물질과 이성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김수웅 회원 작 ‘백련풍경’. ‘달’등장시켜 과거-현재 역사 융합마음으로 하늘 해석한 ‘깨달은 이’ 융천사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처럼 해석을 바꾸어 혼란을 질서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 해석을 의심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면 이것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초구에서 이와 똑같은 문장구조로 “옛날에도 신기루를, 그것도 신라를 지켜주는 의미를 갖는 건달파성을 왜구의 선단으로 착각하여 온통 신라가 난리를 치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지금 길쓸별인 저 별을 흉조의 혜성으로 착
승려 낭도 융천사, 혜성 ‘길쓸별’로 표현왜군 침략 헛소문에 동요된 민심 다독여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대상이 없이 존재하는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이 지어낸 바라면, 마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음은 구체적인 현실도 바꿀 수 있는가. 마음이 땅의 질서는 물론 천상의 질서도 바꾸었던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알아보자.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대 초가을이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붉은 줄을 그리더니 신라 왕을 상징하는 심대성이란 별(전갈좌의 안티레스)을 스치고 지나갔다. 때마침 왜병이 침략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3천여 명의 낭도를 이끌고 금강산으로 산행을 떠나려던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 등 세 화랑의 무리는 당연히 산행을 파하고 만약에 있을 왜병의 침략에 대응한다. 이것만으로 못 미더워
“수로가 꽃을 따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붉은 바윗가’는 수로부인과 시종, 수로부인과 절벽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는 속스러운 세계, 즉 사법계(事法界)이다. 소를 잡고 있는 행위는 이 대립을 유지하는 행위이자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다.‘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요구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꽃을 바치고 이를 받음으로써 수로와 절벽, 수로와 노옹 사이에 존재했던 모든 대립은 사라진다. 그러니 수로와 꽃이 대립된 것이 아니라 미(美)로서는 통하며 절벽 위의 꽃을 따면 현실의 미와 성스런 세계의 미가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법계(理法界)이다.” 오대산 월정사는 신라의 모든 신앙과 사상을 평화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인 동시에 밖으로는 고구려
‘헌화가’의 ‘진달래꽃’은 ‘미’를 상징한다. 신라인이 미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헌화가는 사랑노래이기보다 화엄의 이상을 구현한 노래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조현숙 부회장의 ‘장엄’. 붉은 바위가에/잡고있는 어미소 놓으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702~737) 때 견우노옹이 수로에게 꽃을 바치며 부른 노래이다.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풀어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순정공, 강릉 태수 부임하러 서라벌을 떠나, 시종 데리고 동해변 따라 길을 청했는데, 진초록빛 바닷물에 넋을 빼고 혼을 앗기다가 시장기 느꼈는데, 좌우로는 천길 석벽 까마득,
참회하지 않는 한 죄는 계속 되풀이 된다. 철저한 성찰과 참회를 거듭하는 까닭은 그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함이다. 절 안팎이 시끄럽다. 조계종은 더 이상 승가공동체가 아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스님들에게 탁발을 하여 빌어먹을 것이요 소유할 것은 발우와 가사 세 벌이며 이 또한 다른 승려에게 넘겨주고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다. 하지만 상당수의 승려들이 수백 억 원의 돈과 수만 평의 땅을 가지고도 모자라 더 많이 얻고자 같은 승려를 해하는 일이 다반사다. 미물이라도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불살생이 계율 중에서 가장 지엄한 계율이거늘, 공중파 방송에 나와 상대방 승려의 목을 따겠다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한다. 한 티끌의 욕망마저 버리고 버려
한가한 여름의 정적을 깨는 매미 소리. 하지만 정적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소란한 매미소리 속으로 스며들 뿐이다. 출장 일로 엿새만에 집에 오니 서재 창밖으로 불이 붙었다. 가을의 절정에 서서 무상감에 함뿍 젖었다가 지난 여름을 추억하니 매미소리가 들린다. 매미는 정녕 사라지고 없는데 귓가엔 매미소리가 더욱 시끄럽다. 한적(閑寂)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아미 소리(閑か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 일본 최고의 하이쿠 시인인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 1644∼1694)가 동북지방의 입석사(立石寺)에서 지었다는 하이쿠다. 계절마다 만나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낱말로 압축한 시어인 계어는 ‘매미’로 매미 울음소리 들리는 한적한 산사가 배경 이미지 내지 맥락을 형
모든 것이 변하여 공하지만 공을 깨닫는 그 순간, 변하는 원리만은 공하지 않음을 안다. 제법 가을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침에 책상에 자리를 잡을라치면 소매 속으로 깃드는 기운이 차서 소름이 돋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관악은 반년이나 동색이던 초록이 부끄러웠던지 곧 고운 때깔로 새로운 채비를 할 태세다. 며칠만 지나면 저 산도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리라. 장님에게 단풍의 고운 색들을 어떻게 알려줄까. 그에게 아주 고운 빨강 빛으로 물든 단풍잎을 한 다발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는 그 빛을 알지 못한다. 다시 붉은 빛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붉은 깃발과 붉은 피와 붉은 사과를 손에 쥐어준다 하더라도 그는 깃발의 보드라움과 피의 끈적끈적함, 사과의 향긋한 향내만 느낄 뿐이다.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달이 밝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생각일 뿐이다. 추석이 훌쩍 지났다.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으니 벌써 달이 그립다. 한민족은 집단무의식적으로 달을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님의 얼굴이 달이고 달이 님인 사람에게, 더구나 그 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달은 더욱 그리움의 표상이다. 달을 소재
경주 남산 삼화령 연좌대. 직경 2m에 이르는 이 연좌대 위에는 커다란 미륵불상이 있었고 신라 경덕왕 24년인 765년 3월 3일 충담사는 여기서 다공양을 한 후 서라벌 시내로 향하다 반월성 귀정문 앞에서 경덕왕에게 불려가 안민가를 부르게 된다. 임금은 아비여/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여/백성은 어린 아이라 할 때/백성이 사랑을 알리라//탄식하는 뭇 창생/이를 먹여 다스릴러라/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 태평하리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대에 백성들의 삶은 곤고하였다. 가뭄, 지진, 태풍, 혜성, 메뚜기 떼 출현 등 신라 역사상 가장 천재지변이 심한 시대였다. 이에도 불구하
단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구성하는 세포는 헤아릴 수 없는 생멸의 변화를 갖는다. 그 속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오래 전 뒷산 관악 기슭 약수터에 갔다. 시간이 좀 허락하는 날이면, 약수터 옆 숲 속에 꽤 넓직한 바위가 있어 그에 올라 선정을 하다 가곤하였다. 그날도 여유가 있어 바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얼핏 바람결에 모락모락 인분 냄새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냄새나는 곳을 향하니 풀 사이로 인분 앙금이 보였다. 누구인가 약수터에 왔다가 급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머리를 돌렸다. 가만히 보니 인분에 뿌리가 닿아있는 민들레와 질경이가 다른 풀보다 키도 크고 때깔도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이 있어 지은 시다. 똥처럼 살 일이
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지중한 인연은 험난한 삶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의지처가 되어 준다. 연기론은 시간에 관련된 인과관계에서 공간, 대상과 대상 사이의 인과론으로 영역을 넓힌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 조건이 된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은 저것의 조건이 되고 저것 또한 이것의 조건이 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이 없으며 원인이 없는 결과 또한 없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아주 짧은 시, ‘섬’ 전문이다. 짧지만 음미할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