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 하는 욕망은 무상(無常)과의 대결이라는 필패의 싸움을 해야 한다.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무상하게 변한다면, 달라붙어 있는 채 잃어버리고, 달라붙은 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상은 어떤 대상에 취착하여 달라붙어 있는 것을 의미 없게 만든다. 무상에서 허탈함을 느끼는 것(‘인생무상!’)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취착하는 마음은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주기를 욕망하게 된다. 취착을 조건으로 유가 생겨난다는 말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런
손에 잡은 것 놓지 못해결국 잡히는 원숭이처럼취착은 좋아하는 대상에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무능력한 수동적인 마음서양철학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촉(觸)이란 일종의 ‘종합’이다. 분석이 분해하고 나누어 핵심적인 요인을 찾는 것이라면, 종합은 분리된 것이나 떨어져 있는 것, 다른 것을 결합하여 ‘하나’로 묶는 것이다. 결합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이 결합이 꼭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령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귀의 ‘주인’인 내가 그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의도 이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주어 ‘나’를
좋아함·싫어함은 쾌감 따라끌어당기고 밀어내려는 힘 탐심·진심으로 이어지는 것지혜란 선판단 버림으로써비로소 가능한 올바른 분별쾌감과 불쾌감의 감수작용은 의식이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의식에 선행하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의식의 작용을 방향 짓는다. 쾌감을 주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좋은 이유를 찾으려 하게 되며, 다른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연결하려 하게 된다. 불쾌감을 주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나쁜 이유를 찾으려 하게 되며, 다른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과 연결하려 하게 된다. 물론 이는 그런 느낌을
만남의 양상이 만나는 것들을 규정한다. 만남이란 조건이 만나는 것들의 발생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눈이나 귀도 어떻게 만남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기관’이 된다. 예컨대 사람의 얼굴과 몸을 고기 덩어리로 돌려놓는 그림을 그렸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눈으로 피 냄새를 맡도록 촉발하며, 흙과 같은 질감의 두터운 물감으로 뭉개진 인질들의 얼굴을 그렸던 장 포트리에는 눈을 촉각기관으로 만들어버린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다시 그린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 눈으로 엄청난 비명소리 내지 고함소리가
귀로 듣는 소리의 실체는귀와 소리가 따로 존재하다만나서 들리는 게 아니라진동이라는 조건이 고막을울리면서 생성되는 것일뿐신체와 정신이 분화되고 6개의 감각기관이나 감각작용이 발생했다면, 이제 그 감각작용에 의해 ‘주체’가 ‘대상’을 발견하고 포착하며 그 판단의 진위를 가리는 인식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법하다. 이것이 서구에서 참과 거짓에 대해 검토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그러나 12연기에선 그와 아주 다른 경로를 따라간다. 6처를 조건으로 하여 접촉이 발생하고, 그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 작용이 발생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접촉이란
12연기에서 조건 짓고 조건 지어지며 연이어지는 12개의 개념을 보면서 또 하나 피할 수 없었던 의문은, 집착과 무지를 낳는 그 연쇄 가운데 ‘자아’ 내지 ‘아상’은 왜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가 실체를 갖지 않는 ‘자아’의 관념이 모든 무지와 집착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무지와 고통이 발생하는 개념의 연쇄 가운데 자아 내지 아상이 꼭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그게 없다는 것이다. 아상이라는 것 자체가 무지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마지막에 있는 노사의
다른 것들이 몸에 들어오면면역반응 일어나는 것처럼명색은 식의 작용 조건으로나와 외부를 구별하는 기능식이란 알기 쉽게 말하면 행동하는 어떤 것이 무언가와 만나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부정확하다. 이미 대상이 무언가를 알아보는 ‘무엇’을, 혹은 감각기관 같은 걸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식은 아직 그런 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식이고, 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식이다. 대상을 구별하는 것은 식의 내용을 분별할 때 가능하고 그걸 분별하는 기관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런 기관은 대체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좀더 구체적으
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서생명체가 생존을 위해서는 동일한 것 분류·판단해야식은 생명체가 삶을 위해불가피하게 만들어낸 의지대기도, 물도, 빛도, 온도도 무상한 변화의 흐름이고 신체의 움직임 또한 그러하다. 무한 속도로 변화한다. 무한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그것은 말 그대로 카오스이다. 이 카오스 속에서 생명체는 살아야 한다. 살려는 의지는 이 카오스를 향해 신체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조심스레 다가가야 한다. 카오스로부터 사는데 필요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카오스적 변화를 따라갈 수 있게 해줄 단서를 포착해야 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행(行)이란 무엇인가? 행이란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의지를 발동시키는가? 일단 살아있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물체들도 일종의 ‘의지’가 있다. 관성이라고 불리는 게 그것이다. 가려던 방향으로 계속 가려는 성향, 그게 관성이다. 그런 관성은 유기체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있다. 인간의 경우엔 ‘타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담배 피우던 이가 몸이 안 좋아도 계속 피우려 하는 것도,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에 대해
잠든 동안에도 몸속 세포는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처럼모든 것은 무한속도로 변해실상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무지의 발생을 해명하기 위해선 무지를 전제하지 않은 채 무명을 정의해야 한다. 무지를 전제하지 않는 무명이란 무엇인가? 무지 이전에 존재하는 무명이다. 무지보다 앞서 존재하며, 무지를 조건 짓는 무명이다. 무명이란 무지한 눈에 포착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무지 이전에 존재하는 세계고, 무지하지 않은 눈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세계다. 그렇기에 제대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다. 포착되기 이전의 세계다. 따라서 지혜 또한 작용하기 이전의 세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남”을 뜻한다. 어떤 것도 그것을 조건 짓는 것에 따라 존재하며,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또한 사라짐을. 이는 ‘중아함경’에서 말하듯, 석가모니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가 세간에 나오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주[법계] 안에 항상 있는” 것이고, 부처란 이를 깨달아 중생들에게 설하여 알려주는 이이다. 그 조건에 따라 어떤 것도 그 존재나 본성이 달라진다는 이런 가르침은, 지금은 철학이나 과학에서 약간은 다른 어법으로 다양한
식의 개념을 이처럼 분자적인 수준으로까지 밀고 내려가면 개념의 의미나 작용은 물론 위상에서 또 한 번의 근본적 변환이 발생한다. 세포의 핵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아니 핵산들의 식의 작용은 세포별로 고유한 단백질을 만든다. 그것들로 신체의 조직(tissue)과 기관들이 만들어진다. 생명체의 신체는 모두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다. 분자적인 식의 작용으로 인해 생명체의 신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체가 진화해 나가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려는 식의 결과유전자는 식이 저장된 결과물‘식’ 없는 신체는 존재 불가능“오직 식이 있을 뿐이며
식물들 또한 여러 가지 식을 갖는다는 사실은 식물의 ‘인식능력’이나 ‘판단능력’에 대해, 결국 ‘사고능력’에 대해 쉽게 부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동물적인 기원 속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란 판단하는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대상을 수용하는 눈이나 귀, 코 등의 식에 대해 적절한 반응의 방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뿐일까? 아메바나 박테리아 같은 이른바 ‘원생생물’ 또한 나름의 식을 갖고 있으며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나름의
식은 감각기관 가진 ‘나’라는주체의 인식으로 알고 있지만감각기관 개별 활동이 곧 ‘식’감각기관이 없어도 식은 존재“오직 식이 있을 뿐 대상은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하는 유식학(唯識學)이 아니어도, 불교에서 식(識)이란 말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고…”라고 하며 이어지는 12연기의 설법에서도 일찍부터 식이 등장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에 대해 말할 때도 식은 등장한다
외부에서 다가왔던 것은 지나가거나 물러서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부화된 것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남으며, 물러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마음들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기록하여 두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의 유전자가 기근을 예상하여 최대치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집적하는 능력을 가동시키고, 그런 식으로 살아남으려는 마음을 신체에 담아 지속시키듯이.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듯이. 이는 ‘마음’이란 말로 표현되는, 신체를 움직여 반응하며 작용을 하고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음식에 마음이 속한다는 말이나 TV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 행동에 의해 내가 만난 무언가에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에 작용하여 잘게 자르도록 하고 섞어서 요리를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에게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음이라고 해야 한다
불교적 사유를 요약하는 명제 중 하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마음’이란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음과 무관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마음먹기 달렸다. 그러니 마음 하나 고쳐먹으면 지금 여기가 바로 일승법계요 극락”이라는 말은, 굳이 절 근처에 가지 않아도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지만 마음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마음은 내 안에 있던 게 아닌외부 조건들과 만
모든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덜어준다는 건 얼마나 아름답고 소박한 꿈인가? 그건 모든 이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소박한, 불가능한 몽상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상은 경쟁과 적대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가까이 이웃한 이들과도 다투고 충돌하는 걸 피할 수 없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웃이라도 사랑하라고, 아니 가족이라도 좀 사랑하라고 호소해야 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인 곳이 바로 세상 아닌가! 거기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말이나, 모든 중생을 부처로 응대하고 부처로서의 우
자비도 사랑도 동정이나 연민으로 쉽게 오인된다. 그것은 남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남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는 감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 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나를 넘어선’ 사랑, 혹은 ‘윤리’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가령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 받는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들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옆에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개는 어느새 그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그것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기에,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이질적이고 나와 멀리 떨어진 사람까지 사랑하는 건 어려워낯선 것도 차별 않는 게 자비불교를 상징하는 단어를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자비’라고 말하지 않을까? 무아와 무상, 공 같은 개념들도 있지만, 이는 체득하기는 물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말인지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만한 말인 ‘자비’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비란, 친구를 뜻하는 ‘mitra’에서 파생되었으니 ‘우정’과 근친성을 갖는 ‘maitri’를 번역한 ‘자(慈)’와 연인처럼 공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karuna’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