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이란 마음 닦는 비결을 말한다. 그러면 ‘수심결’에서 제시하는, 마음 닦는 핵심된 비결은 무엇인가? 보조국사는 ‘육조단경’을 통해 정혜쌍수의 성적등지(惺寂等持)를, ‘신화엄경론’을 통해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대혜어록’을 통해 간화경절문(看話逕截門)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서 ‘수심결’은 어디에 위치할까?간화선 수행 제시한 최초 어록간화로 깨쳐 정혜로 불성 장양고려·조선 거쳐 전승 불구하고지도자 부족해 대중화 어려움‘수심결’의 핵심사상은 마음을 닦는 비결로서 간화선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수심결이 간화선보다는 정혜를
조사선과 간화선은 동일한가? 체험적인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상적 내용은 동일하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조사들의 깨달음은 서로 다르지않다. 이점은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치로 말하자면 서로 다르지 않다.조사선, 당 육조혜능 이후 시작간화선, 송 대혜종고 이후 출현대표적 차이점은 교외별전 사상역사 위에 펼쳐지는 양상일 뿐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진리는 역사나 시대가 바뀌어도 그 본질에는 변화가 없지만, 진리가 역사 속에서 문화로서 어떤 형태를 갖고 드러나게 되면 그 양상은 다양해
우리에게 간화선은 무엇인가? 간화선은 보조국사에 의해서 도입되었고, 그의 제자인 혜심국사에 의해서 널리 유행하여 고려 말에 융성하였다. 이런 간화선의 전통은 염불과 함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전승돼 왔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살아있는 중요한 수행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유식불교나 화엄불교가 교학적 사상으로만 남아있고, 현실에서는 죽어버린 것과 비교하면 간화선의 실천성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간화선에 대한 쟁점이 상존하고 있다.공안은 수없이 존재하지만언어적인 이해에만 그치고의심 불러일으키지 못하면여
“스님이 입적한 다음 해(1211년)에 그의 법을 이은 사문 혜심(慧諶, 1178~1234) 스님이 행장을 갖추어 임금에게 ‘원하옵건대 후대를 위해서 명을 내려주소서’ 아뢰었다. 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소신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신(臣)은 유학을 업으로 하지만 아직 깊게 도달하지 못한 자인데, 하물며 부처의 마음과 조사의 법을 알겠는가. 다만 임금의 명이라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조금 얻는 것을 다하여 스님의 광대한 덕을 기술할 뿐이다.”간화선 뿌리내린 혜심 스님국왕에게 국사 비 건립을 청원왕명으로 김군수가 행장 정리보조
“문도가 향을 피우고 단을 만들어 공양하길 7일간 했다. 입적한 스님의 안색은 살았을 때와 같고 수염과 머리털이 계속 자랐다. 다비 후 유골을 수습하니 유골이 모두 5색이었다. 사리가 큰 것이 30과였고, 작은 것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 하고 탑은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세였다. 평생 지으신 것은 ‘정혜결사문’‘상당록’‘법어’‘가송’ 각 1권이며, 종지를 선양한 것으로 모두 가히 볼만하다.”사람들이 의심 많고 신심 적어스승이 방편으로 설명·
“대안(大安) 2년(1210년) 2월 어머니 천도를 위한 법연을 시작한 지 수십 일이 되었다. 이때 국사는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내가 세상에 머물기가 오래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각자 노력하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3월20일에 병을 보이고 8일 만에 임종을 하니,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입적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목욕을 하시고 시자가 임종게를 청하니 조용히 대답하였다. 밤이 깊자 방장실로 들어가 묻고 답함이 처음과 같았다. 새벽이 되자, ‘오늘이 며칠인가?’ 하고 물었다. ‘3월27일입니다.’ 시자가 대답하였다. 국사는 법복을
보조국사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승안 5년(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서 입적할 때(1210년)까지 11년 동안 본격적인 정혜결사를 실천하였다. 비문은 이 시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교종세력이 활발했던 고려보조국사에 의해 선종부흥고려 희종 왕위에 오르자수선사 이름내리고 현판도“선학의 융성함은 예전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스님은 위의를 잘 거두어 소의 걸음에 범의 눈빛이었다. 대중과 함께하면서 게으름이 없었고, 힘 드는 일을 하거나 운력을 할 때도 항상 앞장을 섰다. 억보산 백운정사 적취암이나, 서석산의 규봉암, 조월암 등은
보조국사의 선사상을 언급할 때,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문 체계로 정리한다. 이것은 국사의 생애를 기술하는 비명에 근거한 견해이다. 실제로 오늘날에 남겨진 보조국사의 저술들을 보아도 3문 체계는 합당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현존하는 국사의 저술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적등지문은 ‘계초심학인문’‘권수정혜결사문’ ‘법집별행론절요병립사기’, 원돈신해문은 ‘원돈성불론’과 ‘화엄론절요’, 간화경절문은 ‘수심결’ ‘간화결의론’ 등이 속한다. 또한 3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염불
“승안 5년 경신(1200, 42세)에 국사는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11년 동안 법을 펼쳤다. 도를 이야기하고 선을 닦으며 안거하고 두타에 율에 의거하였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스님과 재가자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명예와 벼슬을 그만 두고 처자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친구들에게 권하여 함께 오기도 하고, 왕공과 사서(士庶)로서 이름을 버리고 결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수백 명 되었다.”도에 스스로를 맡기니칭찬·비방 흔들림 없어비록 뜻에 맞지 않아도어머니처럼 받아들이다국사는 지리산 상무주암이 비좁게 되자 대중과 함께 오늘날 송광사로 옮
“마침 오래 전에 알고 있던 선노(禪老) 득재(得才)의 간절한 청에 의해서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렀다. 이름을 버린 여러 고사(高士)들을 맞이하여 서로 힘써 권하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두 번째 깨달음 경험 후도거조사·상무주암서 정진분별을 버리는 참구 통해궁극적인 해탈을 이루다거조사는 경북 영천에 위치한 팔공산 동쪽에 위치한다. 선노(禪老) 득재(得才)는 전기 자료가 불분명하다. 아마도 담선법회에서 한 번 만나서 함께 결사를 하자고 했던 인물 가운데 한 승려가 아닌가 한다. 송광사로 옮겨오
“대정 25년 을사(1184)를 지나 하가산의 보문사에 머물렀다. 대장경을 읽다가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華嚴論)’을 얻어 거듭 신심을 내었다. 이치를 더욱 드러내고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 씹고 씹어서 정수를 맛보았다. 이전의 이해가 점점 밝아졌다. 이에 원돈(圓頓)의 관문(觀門)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또한 말학의 미혹함을 인도하여 그들을 위해서 박힌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했다.”‘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통현 ‘화엄론’서 다시 확인“한 티끌 속 모든 경전 있다”구절에 모든 의문이 사라져보문사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절
“25세 대정 22년 임인(1182)에 승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얼마 후 남쪽으로 유행하여 창평에 머물렀다. 어느 날 학료에서 ‘육조단경’을 보았다. ‘진여자성이 알아차림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재한다.’ 여기에 이르러 놀라 기뻐하며 미증유를 얻고서 일어나 불전을 돌면서 그것을 외우며 더욱 깊게 의미를 터득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은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속에 은거하여 간절하게 도를 구하기를 잠시라도 멈추지 않았다.”25세에 승과에 합격했지만중앙 진출않고 수행에 매진‘권
“스님의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황해도 경서(京西)의 동주(洞州)사람이다. 일찍이 자호를 목우자(牧牛子)로 하였다.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인 광우(光遇)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이었고, 어머니 조씨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이었다. 스님은 태어나서 병이 많았고 의사의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출가로써 서원을 하니 곧 병이 나았다. 나이 8세에 조계(曹溪)의 운손(雲孫)인 종휘(宗暉)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오직 도를 좇았으며 지조가 뛰어났고, 당당
보조국사의 역사적인 평가는 어떨까? 가장 널리 알려진 평가는 정혜결사(定慧結社)이다. 이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일단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르침 중심의 교종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선종으로 흐름을 바꾼 것이다.잠들었던 선풍 다시 진작어두웠던 조사의 달 밝혀고려후기 선종 부흥 계기사찰은 세속 피해 산골로신라 말에 선종이 유입되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교단은 다시 화엄종, 법상종, 천태종과 같은 교종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고려후기에 보조국사가 주도한 정혜결사는 교단의 흐름을 교종에서
보조국사의 생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김군수(金君綏)가 찬한 ‘조계산수선사 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이다. 이 비문은 스님이 입적하고 제자 혜심국사의 주도아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선나는 마음의 고요함 의미가섭 의해 마음으로 전해져불설은 아난에 의해 계승돼고려후기 중요쟁점으로 부각“선나의 근원은 가섭에게서 나왔고 달마는 그것을 중국에 전하였다. 그것을 전하는 이는 전하지 않음으로써 전하였고, 그것을 닦는 이는 닦지 않음으로써 닦았다. 잎에서 잎으로 전하여 지고 등에서 등으로
퇴굴심(退屈心)이란 어떤 목표를 향하지 않고 자신감의 결여로 뒤로 물러나 스스로 굽히는 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장부로서의 기개가 보이지 않는 비굴한 자세를 말할 때 사용한다. 보조국사는 대승의 근기가 없어 스스로 불성이 갖추어졌음을 믿지 못하고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른 가르침이란 외부에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고, 금생이 아닌 다음 생을 기약하여 염불을 닦는 경우이고, 화두참구를 하면서 사량분별로 얻고자 하거나 반대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태도를 총칭하여 사용한다.절대적 존재 상정하거나다음
필자가 처음 불교를 접한 고등학교 시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언구에서 의심을 했던 기억이 있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 그것은 곧 아래로 중생을 구함이 아니고, 반대로 아래로 중생을 구하면 곧 위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설사 뛰어난 근기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랜 업장을 생각하면점수의 방편을 버릴 수 없어진정한 수행, 돈오·점수 통합그래서 지도교사에게 이점을 질문했더니, 그게 가능하다고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되
‘수심결’에서 보조국사는 정혜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구분한다. 기준은 관찰의 힘이 강한가 열등한가, 습기의 장애가 깊은가 얕은가이다. 정혜가 이미 자성에 갖춰졌다면 새롭게 다시 익힐 이유가 없다. 이런 경우 깨달음의 돈오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번뇌가 깊다면, 그래서 관찰의 힘이 약하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점수의 길이 필요하다. 비록 자성이 그대로 정혜임을 깨달아 별도의 수행이 요청되지 않지만, 대치문(對治門)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돈오만 주장하면 적응력 문제점수만 주장하면 통
정혜를 함께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어떤 의미인가? 먼저 선정을 닦고 나중에 지혜를 개발하는가? 아니면 지혜를 개발하고서 나중에 선정을 닦게 되는가? 정혜쌍수는 선정과 지혜의 선후가 아니라, 동시에 함께 수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혜등지(定慧等持)란 용어도 사용한다.돈오는 심성에 대한 깨달음점수란 현실 문제 대처방안인간 성품 본래 청정하기에함께 이뤄지는 정혜등지여야지관, 혹은 정혜의 선후문제는 부처님 당시에도 거론된 관점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anna)의 관계에 대
자성(自性)이란 사물의 본래적인 스스로의 성품을 의미한다. 본래적인 성품이란 의미로 본성(本性)이라고도 하고 진정한 성품이란 의미에서 진성(眞性)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그것을 그것이 되게 하는 본래적 성질로서 본질(本質)이다. 예를 들면 불의 본질은 ‘태움’이다. 무엇인가를 태울 수 없으면 불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물의 본질은 ‘젖음’이다. 무엇인가를 젖게 하는 것이 없으면 물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자성, 본래적 성품 의미마음은 청정·고요하지만잡초두면 계속 자라기에끊임없는 수행이 요구돼그러면 마음의 본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