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32상으로 성인 판단 시도손 보고 문장력 판단하는 격병에 얼굴 뒤틀린 호킹 박사인류 최고 과학자 평가받아사람들은 특이한 신체적 특징으로 사람을 평가하려 한다. 유가(儒家)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다. 일단 풍채를 보고 말 글 판단력을 본다. 옛사람들은 아직 유전자의 존재를 몰라서 육체적 특징이 정신적 능력과 무관함을 몰랐다. 파란 눈은 신비해 보이지만 그게 다이다. 더 잘 보는 것도 아니고 더 성능이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갈색의 몽고인 눈이 훨씬 낫다. 시
실무유중생 여래도자.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착아인중생수자. 부처님은 ‘보살이 자신이 무여열반으로 이끈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혹시 부처님은 예외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이끈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 여래가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여래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도로 인도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상을, 인도당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
마음 없는 식물은 고통 없어고통 있어야 자비도 생겨나번뇌와 해탈이 결국은 하나들어간 게 있어야 나올 게 있다부차수보리 시법평등무유고하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법은 누구나 얻을 수 있으므로 평등하다. 세상의 지위고하와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다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무상정등각의 ‘등’각이다. 모든 부처는 깨달은 법이 평등하다. 무아연기(無我緣起)를 깨달았다.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소언선법자 즉비선법시명선법.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등 일체선법(善法)을 닦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 시법평등 무유고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아이가 되고 어른 되듯이끝없는 변화만 존재할 뿐변화 없는 그 무엇은 없다 얻을 바 법이 없다. 무아연기(無我緣起)이기 때문이다.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았지만, 모든 게 무아(無我)이므로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다. 그러므로 얻은 것도 없고 얻은 자도 없다. 연기법에 의하면, 일체는 제 인연이 연기(緣起)하여 생긴 현상이고, 이 현상은 제 인연이 바뀌면 본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는 모여 DNA가 되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마음은 계속 흐르는 연기체중간만 떼어내 잡을 수 없어세상 모든 물이 연결돼 있듯마음 또한 모든 것과 이어져마음은 연기체(緣起體)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연속체이다. 마음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타인과 타생명과 환경과 끝없이 상호작용하며 바뀌는 존재이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딱 잘라서 ‘이게 내 마음이다’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많은 부분이 타인으로부터 온다. 이미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부. 여시세존 여래유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동물, 단안시서 쌍안시 진화사람, 육안서 심안으로 발전지력의 눈을 내부로 돌리면법의 눈 되고 부처의 눈 돼인간은 특이한 존재이다. 모든 감각의 70프로가 시각이다. 엄청난 양이다. 거의 모든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온다. 시각의 중요성은 32상에도 나타난다. 부처님의 눈은 맑고 속눈썹도 길다. 바로 보려면 수정체가 맑고 먼지를 막아주는 속눈썹이 길어야 하기 때문이다.시각에는 단안시(單眼視)와 쌍안시
여래자즉제법여의(如來者卽諸法如意). 여래는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니다. 제법에 자유로울 뿐이다.고해 서핑하며 천개 눈으로행복의 보드 타는 법 가르쳐세상 어떤 아수라 속에서도결코 마음의 평정 잃지 않아 세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시절인연에 따라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오래전에 연등불전에 공양을 올리던 청년이,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채로, 오늘 석가모니불로 환생한 게 아니다. 인연에 의한 동일한 흐름을 타고 있을 수는 있으나, 그 흐름이 외부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의 흐름은 하나의 강처럼 수많은 지
‘인연으로 생긴 법을나는 공이라고 한다가명이라고도 부른다중도이기도 하다’- 용수 ‘중론’팔불중도는 놀라운 관찰 결과개인과 집단도 팔불중도 관계끝없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 사회의 문화와 개인의 마음의 관계도, 집단지능과 개인지능의 관계도 팔불중도(八不中道)이다. 에드워드 윌슨을 빌려와, 팔불중도를 개미와 군집의 관계를 이용해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동물과 곤충세계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옛날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 팔불중도 관계에 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두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모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자기가 불토를 장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씨앗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무가 갑자기 온 것은 아냐결코 같지도 다르지도 않아 가는 현상이 있을 뿐 가는 자는 없다. 감(go)은 연속선상에 있으나 불변의 주체는 없다. 그러므로 중생을 구하거나 불토를 장엄하는 자는 없다. 그런 현상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주어와 목적어로 이루어진다. 주어와 목적어가 없으면 언어가 무너진다. 무아연기는 주어와 목적어가 사라진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주어와 목적어로 이루어진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 변하기 전의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지니고 다니며 독송할 때, 만약, 그걸 이유로 사람들에게 하찮고 천하게 취급당하면, 이로 인하여 지난날의 죄업이 즉시 소멸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아승지겁 전에 연등불 앞에서 8만4000만억 나유타 명의 부처님들에게 공양을 올릴 때, 전혀 실수가 없이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올렸다. 하지만 이 공덕은 앞으로 올 말세에 이 경전을 지니고 독송하는 사람의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백분의 일도 천만억분의 일도 아니고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설
인간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육체적 고통은 몸으로부터 오고, 정신적 고통은 마음으로부터 온다. 육체적 고통은 육체적 이상(부상·질병·기형·피로·기능장애)으로부터 오고, 정신적 고통은 정신적 이상인 감정장애(권태·탐욕·분노·증오·시기·질투)와 인식장애(환상·망상·섬망·우둔·미련·어리석음·정신분열·기억상실·기능장애)로부터 온다. 마음의 고통은 모두 여의었으나 육체적 고통을 여의지 못하였으면 유여열반이고, 육체적 고통까지 모두 여의면 무여열반이다. 육체를 가진 한, 한서(寒暑)·기아·질병·신경계손상·신경계이상
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이 같은 분야를 다루는지 아니면 다른 분야를 다루는지’에 대해서 논쟁한다. 생물학자 굴드(Stephen J. Gould)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은 서로 겹치지 않는 다른 분야를 다루지만(NOMA nonoverlapping magisteria), 즉 종교는 정신세계와 사후세계를 다루고 과학은 물질세계와 현실세계를 다루지만, 도킨스에 의하면 같은 분야도 다룬다. 그 이유는 종교가, 과학의 영역인, 생명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종교경전에는 이런 내용이 명확하게 나타나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창세기와
‘약심유주 즉위비주-만약 머문다면 사실은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젊음이 늙음으로, 고움이 미움으로, 건강이 질병으로 변한다. 부귀가 빈천으로 명예가 치욕으로 변한다. 희·락·애(喜樂愛)가 노·애·오(怒哀惡)로 변한다. 기쁨·즐거움·사랑이 성남·슬픔·미움으로 변한다. 나뭇잎이, 흐르는 강물 위에 내려앉으면 사실상 앉은 게 아니다. 강물 따라 끝없이 흘러가므로 앉아도 앉은 게 아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그러해서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시공에서 시간을 공간을 붙잡고 잠시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때가 언젠지 아무도 모르는 아주 먼 옛날에, 가리왕이 사냥을 나갔다. 따라간 궁녀들이 눈에 보이지 않자 찾아 나선 왕은, 그들이 동굴 속의 선인과 함께 있는 걸 보고 분노하며, 선인의 온몸을 칼로 갈가리 잘랐다. 그런데 선인은 증오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선인이 전생의 부처님이다. 욕됨을 잘 참아 인욕선인이다. 속된 말로 참기달인이다. 하지만 불자들이 곤경을 당할 때 흔히 스스로 위로하듯이, 전생의 업이기 때문에, 즉 마땅히 받아야 할 일이기에 증오가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다. (금강경은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다. 인천교(人天敎)
불고수보리 여시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사람은 누구나 정체성에 의지‘자기’ 없다는 건 엄청난 공포금강경 듣고도 두려움 없으면범 모르는 하룻강아지 불과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이 맞고 또 맞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도,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이다.공포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다. 팔정 희로애락애오욕구(喜怒哀樂愛惡慾懼) 중 하나이다. 생명체의 최고의 목적은 생존이다. 그래서 생존에 위협을 당하면 공포를 느낀다. 맹수·원수·기아·지진·홍수·자연
이때 수보리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이해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그러더니 부처님께 말했다. 희유한 일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심오한 경전을 설하였사오나, 제가 지혜의 눈을 얻은 이래로 지금까지 이런 경전은 얻어 들은 적이 없사옵니다.시공이 변하고 의식 변하면그에 걸맞는 새 깨달음 필요‘금강경’ 중 가장 감동적인 구절이다. 어느 종교경전에도 이처럼 순결한 장면이 이처럼 순결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평소에 자기 깜냥으로 지혜의 눈을 얻었노라고 자부했건만, 그래서 더 이상 나의 지성을 자극할 말은 없을 것이라고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무어라고 부르고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라 부르고 받들어 지니어라.’마음 맑으면 몸으로 드러나행복한 마음 미소로 나오듯32상은 부처님 마음의 현현이름은 경전의 얼굴이다. 이름을 잘 지어야 대의가 잘 드러난다. 이름은 침묵이 아니지만, 진리를 드러냄에 있어서, 단 한 마디만 하므로 침묵에 가깝다. 하지만 우레와 같은 한마디이다. 시경명위금강반야바라밀(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 모든 걸 잘라내는 금강석처럼, 반야바라밀의
‘또 수보리야. 이 경전이나 사구게를 설하는 곳에는 모든 사람들과 천인들과 아수라들이 모두 탑묘(塔墓)처럼 공양을 할 것이다. 하물며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이랴. 이런 사람은 으뜸가는 드문 공덕을 지었음을 알라.’설산동자가 자신 던진 것처럼몸을 바쳐야 얻어지는 게 진리진리 설해지는 곳에 불탑 있어법(法)을 듣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부처님은 설산동자 시절에 한 구절 법을 듣기 위해 몸을 바쳤다. 어느 날 야차가 중얼거렸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우연히 그 말을 엿들은 동자가 다음 구절이 궁금해졌다. 날이 갈수록 참을 수 없어
‘수보리야, 너에게 진실로 묻노니, 만약에 선남자 선녀인이 갠지스 강 모래 수만큼의 우주를 가득 채운 보석으로 보시하면 그 복이 크다고 생각하느냐?’‘금강경’은 물질세계에서 영적세계로 점프케 하고35억년 정체성 때려부셔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질적 세계에 살던 사람에게 정신적 세계의 열림은 거듭남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세계이다. 기독교 복음서에서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거나, 육체를 지닌 채로 승천하거나, 군사를 일으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재건하거나, 천군(天軍)을 거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수보리언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조금이라도 상이 있으면결코 중생 구할 수 없어법에 머문다고 할지라도집착이기에 괴로움 불러 사람들은 몸이 큰 것만 치지 마음이 큰 것은 간과한다. 아이들은 몸이 더 크면 다른 아이를 이기지만, 커감에 따라 이기려면 꾀가 즉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충분히 성장하면 외적 마음인 사회적 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사회적 제도 속에서, 사회적 제도를 통해 획득한 힘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중 최고봉이 왕 등 권력자이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