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것은 임제였지만,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임제만은 아니었다. 부처를 만날 때마다 죽일 줄 알아야 진정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게다. 그러나 실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게 부처임을 알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게다.선사들 학인들에게 서슴없이 목 내놓아부처 죽일 자는 부처 죽일 필요 없는 자남의 머리 아닌 스스로에게 부처를 봐야이런 것이 선승이니, 그들 자신 또한 부처와 ‘조사’를 겨눈 학인의 칼에 죽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들일 것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말은, 학인들
“맑스를 만나면 맑스를 죽이고, 레닌을 만나면 레닌을 죽여라!” 권위나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전복을 시도하던 ‘혁명주의자’들조차 자신의 종조나 자신들이 믿는 지고한 가치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반대로 사실은 종조의 사유에 다른 것을 섞어 넣어 슬그머니 이탈의 선을 그리고자 할 때조차 대개는 “맑스로 돌아가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한다. 그들도 교조주의를 비판하지만, 그건 언제나 남의 교조주의에 대한 것일 뿐이다. 자신이 교조주의자일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
운문이 백추(白槌)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 바람과 파도가 없는 바다란 있을 수 없기에풍파 없길 바라는 마음 끊을 때 평온 가능고요한 산속 평정, 시장판에서 쉽게 부서져“묘희세계(妙喜世界)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버려라! 여러분, 발우를 들고 호남성에 들어가 밥을 드시오.” 묘희세계란 시방정토의 하나로 아촉불(阿?佛) 내지 부동여래가 머무는 세계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 중 하나고, 속세를 떠난 진리의 묘희를 항상 느끼며 사는 세계를 뜻할 것이다.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 버리라는 이 강렬한 말로 그는 묘희세계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물었다. 장님들이 코끼리 달리 말하지만 다 진실가짜 없기에 어느 것 진짠지 묻는 건 잘못한마디 말 진리지만 집착하면 죽은 세상“한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 경우라면 어떻습니까?”“갈가리 찢어버려라!”“화상께서는 어떻게 집어 담으시겠습니까?”“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오너라.”한 마디 말로 남김없이 말한다 함은 세상의 진리를 한 마디 말로 응축하여 표현함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는 한 마디 말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소설가 보르헤스가 수많은 책들을 뒤져 평생 찾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
불도(佛徒)들은 진리를 찾는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들 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 ‘본래면목’이라 불리는 진리를 찾는다. 본래면목에 속하는 진리를 ‘진제(眞諦)’라 하여, 속세에서 말하는 진리인 속제(俗制)와 구별한다. 전자가 제일의제(第一義諦), 즉 일차적인 진리의 세계라면 후자는 이차적인 진리의 세계다. ‘대승기신론’의 말로 바꾸면 진제란 ‘체(體)’에 속한 진리고 본성상 공한 세계에 대한 진리라면, 속제란 ‘상(相)’이 있는 것들이 서로 작용(用)하는 세계, 연기적 세계에 속한 진리다. 어느 세계든 부처가 있지만 본래면
그런데 선가에서는 ‘병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물음이 종종 등장한다. 대개는 병든 선사들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가령 덕산이 병이 들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고요함 얻으려고 소란 탓하는 게 ‘소란’아프거나 병든 몸 그대로가 부처이니부처 찾는 이라면 병듦 자체 긍정해야“병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있다.”“병들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아야! 아야!”“아야! 아야!”는 아픔을 표현하는 감탄사다. 그러니 덕산의 대답은 병들지 않는 사람 또한 병든다는 말이다. 병들지 않는 사람도 병든다는 대답이니 선승들이 흔히 사용하는 역설
병이란 세균과 그들의 생존환경인 내 몸이 만나는 지점, 혹은 내 몸과 내 생존환경인 지구가 만나는 지점에서, 양자의 부조화나 불화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고통 또한 내 삶과 그것의 ‘환경’이라 할 연기적 조건의 만남에서 불화나 부조화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병이나 고통은 양자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기호고 징후다. 내 몸에 난 병은 지금 내 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드러내주는 기호고, 내 몸의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내 몸의 능력을, 그 한계를 드러내주는 한계현상이다. 위대한 건강은 위대한 병과 함께 와병든 몸
절마다 하나씩 있는 기념품점에서 파는 손수건이나 다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글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이 있다. 이 글은 명나라 때 스님인 묘협이 쓴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 중 제17편 ‘십대애행(十大碍行)’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히 바라게 되는 마음을 뒤집어, 얻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오히려 정작 소중한 것을 얻게 됨을 보여주는 뛰어난 10개의 역설적 문장으로 요약되는 글이다. 어디서 처음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고선 잊혀지지 않는 앞부분의 문장들을 내 식으로 요약하여 종종 사용
“부모도 태어나기 전 내 자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를 묻는 육조의 질문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내 자신의 본래면목을 내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익숙해 있는 것에서 본래면목을 찾는 것이니, 언제나 아상(我相)이나 아소상(我所相)만을 재발견하게 될 뿐이다. 내가 익숙한 것에서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 자신의 본래면목을 나는 물론 부모도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묻는다. 서양인처럼 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신의 본래면목조차 신의 부모 이전에서 찾으라
고향이란 말에서 아직도 강한 그리움과 향수를 느끼는 이들은 실향민들일 것이다. 저기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이 있지만 철조망보다 무시무시한 군사분계선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이들.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외국에서 살게 된 이들. 고향 변해도 향수 품는 건 조상 체취 때문근원으로 올라가면 지구 그 자체가 고향불교에서 고향은 만법 근원 되는 그 무엇가령 1960년대 재일조선인들이 느끼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단지 일본생활에서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음각화(陰刻畵)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이들이 강제징용에 의해,
‘고향’이란, 지금도 귀향을 하게 하는 어떤 힘, 흔히 ‘그리움’이나 ‘정겨움’ 같은 것과 결부된 분위기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그래서 태어난 곳을 지칭하는 ‘본적지’라는 행정적 단어와 달리 고향은, 딱히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조차 그리움의 뉘앙스를 갖고 사용한다. 끔찍한 체증의 고통을 견디며 해야 할 ‘일’이 된 ‘귀성’ 내지 ‘귀향’조차 긍정적 어감을 갖는 것이 이 때문일 게다. 그러나 고향에서 그리움이나 정겨움을 느꼈을 사람은 거기 사는 이들이 아니라 거기를 떠난 이들이었을 터이다. 마치 어느 산골에서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
‘장자 만물이 모두 평등하다’는 장대한 존재론적 사상을 펼쳐 보여준다. 발가락 사이에 이어져 있는, 흔히 없는 살조차 군더더기로 여기지 않으며, 손가락이 갈라져 여섯 일곱이 된 것 또한 쓸데없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장자’ 전편에 걸쳐서 추한 몰골의 인물이나 곱사등이, 절름발이 등이 최고의 도를 터득한 인물로 반복하여 등장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기형이 없다각자 자기 나름의 형태만이 있을 뿐차별 초월하면 각자 기준 세상 열려이런 생각은 ‘적자생존’의 경쟁적 진화론을 쓴 것으로 알려진 다윈의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간택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 동물인 우리로서는 정말 가능할까 싶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제 자리에 선 채 태양과 물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식물과 달리 동물은 그런 능력이 없기에 먹이를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 뇌는 그렇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기 위해, 혹은 적들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면하기 위해 탄생한 기관이다. 무의식적 반응은 간택의 자연학적 과정사태 빨리 해결하지만 올바른 대처 못해문제보다 분별 의한 뒷담화가 더 치명적뇌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이동하다가 만난 상대에 대해 덤벼들어야 할지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법문을 했다.조주가 승찬의 ‘간택’ 부정했던 것은논리적인 역설 뒤엎어버리려는 의도말에 매이지 않고 실행하는 법 지도“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을 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 근근이 말하는 것이지만, 이 또한 간택이고 명백함이다. 노승은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 그대들은 이를 보호하고 아끼려느냐?”그러자 한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낀다는 말입니까?”“나도 모른다.”“스님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묻는 일 끝났으면 절
굳이 유위적 세계를 파괴한다고 하지 않아도, 유위와 무위를 동렬에서 놓고 대비하게 되면 무위는 유위와 구별되는 반대개념이 되고, 유위를 배제한 별개의 영역이 되며, 그 결과 무위는 유위의 인위적 배제를 뜻하는 또 하나의 유위가 되고 만다. 손 대신 약을 쓰는 제초제로 인한 많은 위해를 야기하니 하지 않을 이유가 있지만, 기계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경운기를 두고 굳이 소로 쟁기질을 하는 것은 ‘애써 하는 무위’로 보인다. 컴퓨터가 옆에 있는데 굳이 손으로 계산하는 것도 그렇다.동물이 사냥하는 것이 본성이라면인간이 문명 이루는 것도 또한
고상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그 순수한 어떤 것을 그렇지 못한 것과 대립시키고 따로 얻고자 한다는 점이다. 가령 쇤베르크에게 음악을 배웠고 음악에 매우 높은 식견과 섬세한 감각을 갖고 있던 아도르노는 대중음악은 물론 재즈조차 쉬운 재미나 쾌감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이라고 비판한다. 귀농을 자연적인 삶이라 말하지만 김매기는 자연의 생명 죽이는 작업전통 파괴 ‘미래주의’ 파시즘 흘러“모차르트를 재즈로 편곡할 경우 편곡자는 모차르트 곡이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어려울 경우 또는 별 이유 없이 멜로디를 다르게 바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데다 품격 있게 뻗은 가지로 격조 있는 풍모 소나무, 그리고 그 가지 위에 고고하다는 말을 표상하려는 듯 긴 다리로 높이 올라 목을 더할 수 없이 길게 뻗은 학을 그린 송학도는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 오랫동안 그려져 온 그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자개장이나 찻주전자 같은 일상용품에서도 아주 쉽게 보게 되는 그림이다. 심지어 화투장 첫머리에 그려놓은 것도 바로 이 송학이다! 동아시아 3국 모두에서 이리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학이 이른바 ‘10장생(長生)’ 중 하나여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어서 그렇다 하겠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백치와 바보에 대한 탁월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백치’를 다루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백치를 발견할 수 있다. 구르둘루라고도 불리고 오모보, 마르틴줄, 구디-우수프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오리를 보면 자신이 오리라고 믿고 오리처럼 행동하고, 개구리를 만나면 개구리, 배나무 옆에서 배나무, 물고기를 만나면 물고기가 되는 인물이다. 그를 보고 황제가 말한다. “내가 보기엔 자기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것 같군.”(‘존재하지 않는 기사
‘장자’에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백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설결(齧缺)과 문답하는 왕예(王倪)가 그렇다. 설결이 묻는다. “선생께서는 모두가 다 옳다고 동의할 무언가를 아십니까?(子知物之所同是乎)”“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소.”“그럼 선생은 선생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십니까?”“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그렇다면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입니까?”“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불변의 자아 같은 것이 없음을 안다면모른다는 대답은 그 본성에 대한 답변선사들도 백치의 ‘모른다’를 자주 구사왕예는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어리석음, 지혜에 반대되는 말이다. 누구나 어리석음을 멀리 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불교 또한 지혜를 지칭하는 ‘반야’라는 별도의 핵심적인 개념이 있으니, 지혜를 추구한다 하겠다. 지혜를 위해 사람들은 대개 이런저런 지식을 얻고 여기저기 떠다니는 정보들을 모은다.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다. 어리석은 자는 바보와 백치 두부류 있어바보란 흔치않은 행적 찬사하는 말이거나백치는 모든 것 받아들이는 ‘성인’ 가까워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일을 망치고 사태를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를 우리는 또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