슉셉 제춘(Shugsep Jetsun)은 레왈사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은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하다.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 사이에 위치해서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짐에도 이 호수를 보기 위해 많은 인도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슉셉 제춘의 어머니인 페마 돌마와 아버지 둔둡 남걀은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만나 이곳 레왈사르 마을에 정착해 살게 됐다. 1852년 페마 돌마는 여자 아기를 출산했고 이름을 로첸이라고 지었다. 둔둡 남걀은 아기가 딸인 것에 크게 실망했고, 아기가 말문을 트기도 전에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동네의 다른 여인과
틱낫한 스님과 인연을 맺은 챤콩은 틱낫한 스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점점 더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챤콩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평생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했고 틱낫한 스님은 사회 문제에 주시하는 그를 높게 평가했다. 틱낫한 스님은 절망에 빠져 있거나 작은 도움이나마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불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부처님께서 인간들에게 전해 주고자 했던 가르침들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현실 세상에서 실현하시는 방법이라고 말했다.틱낫한 스님은 챤콩
챤 콩(Chan Khong)의 일생을 묘사하자면 사회적인 또 종교적인 변화와 개혁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챤 콩은 1938년 베트남 메콩강 근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뒀다. 마음씨 착하고 인정이 많았던 부모님은 형편이 어려운 집의 어린 여자아이 한 명과 12명의 조카까지 맡아 한 집에서 키웠다.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상인이 아니라 그저 작은 땅을 소유했고 그 땅들을 이웃 농부에게 임대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뭄이나 홍수로 농작물 수확에 어려움
페마 타키는 곧 부탄 파로(Paro) 불교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불자들은 그를 ‘재미있는 스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거나 경전 공부할 때는 신중하고 근엄한 자세로 임했지만, 불자들을 지도할 때는 다소 편안한 모습으로 설명하면서 부탄 불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그는 얼마나 소유했나를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서로 시기하기보단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행복을 최우선시 하는 부탄이 지구상 존재하는 진정한 낙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교 국가임을 정부가 인정하고 국민 모두가 오래된 불교 전통을 오늘날까
엠마 슬레이드(Emma Slade)는 자기 자신이 종교인의 삶을 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르마니 정장과 신발을 신고 출근해 하루에 수십억 달러의 돈을 관리하던 그는 투자 금융 회사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홍콩에 있는 펀드 회사에 취직했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런던 본사로 발령받아 투자 금융 전문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엠마 슬레이드는 1966년 영국 남동부 켄트 위치한 위트스터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폐
손자 마르구리즈(Sonja Margulies)는 1931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루터파 기독교 신자였고, 유대인 출신 남편과 사이에 아이도 2명 낳았다. 1960년대, 대학원에서 종교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동시에 ‘트랜스퍼스널 심리학’ 학술지 제작에도 참여했다.불교 철학을 공부하면서 1968년 수행을 시작했다. 선불교 스님들의 엄격한 지도하에 본격적인 불교 철학을 공부했다. 불교의 시작과 전파 과정, 불교 국가들에서 각기 다른 왕국들을 거치며 불교가 받은 영향, 또 현재 각국의 불교 상황 등 불교에 대해 알고
세계 곳곳에 놀라울 만한 업적을 세운 여성 불교 지도자들이 있다. 비구니 제도를 활성화하는데 큰 공적을 세운 마하파라자파티 고타미, 스리랑카에 여성 스님들의 계급 제도를 창설한 산가미트라, 덕망 높았던 불교 철학 지도자 다마딘나, 중국 최고 비구니스님으로 알려진 징지안, 중국 선 불교의 전파에 앞장섰던 모샨 리아오란, 일본 최초 비구니스님인 젠신, 불교계에서 여성들의 직위를 높이려고 애쓴 콤요 등이다.종치 스님도 그렇다. 중국 선종 초조 보리달마의 수제자 종치 스님은 양 왕조의 우 황제의 딸로 태어났다. 6세기에 태어난 그녀는 19
스리랑카에서 바지라가 먼저 향한 곳은 캔디였다. 불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던 니야나티로카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독일 출신으로 유럽 전역에 불교 전파를 이끈 선구자였다.그는 스리랑카 불자들의 수행처로 유명했던 폴가스두와 섬에서 잠시 머물며 수행을 쌓고 다시 길을 떠나 비야가마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비구니로 살아가는 스리랑카 여인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고 명상하며 불교를 배웠다. 1955년 7월 보름달이 환한 날 밤 그는 마침내 나라다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1928년 10월14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하넬로르 울프라는 이름의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인생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 같이 우여곡절로 가득했다.어머니는 가정을 버리고 기독교 이단종파 출신의 목사를 만나 하넬로르 울프를 낳았다. 이단 종교의 우두머리였던 그의 친부는 신자들에게 하넬로프는 신의 직속 후손이라고 선언했다. 신자들은 그를 신의 딸로 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의 아버지는 그녀와 어머니를 버리고 종적을 감춰버렸다.순식간에 거주지와 생계를 잃은 하넬로르와 어머니는 함부르크에서 홍등가로 악명 높은
담마까야(Dhammakaya) 불교 협회는 태국 불교 전통에서 현재 가장 큰 종파다. 루앙 푸 소 칸다세로 스님에 의해 20세기 초 시작된 이 종파는 관습처럼 내려오던 태국 불교의 오래된 명상법을 개선하고 새롭게 제시된 명상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담마까야 종파는 기존 종파로부터 불교를 세속화·상업화 시킨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일반 불자들에게 명상을 강조한다는 점, 불교의 전파를 위해 사회 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점, 오랜 불교 전통에서 내려오던 필요 없는 관습들을 제거한 점들은 큰
막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스투파로 향하는 작은 골목길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비록 초라하고 작은 집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부처님과 매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했다. 그는 수도 카트만두에 위치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아기를 가졌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그를 태국 방콕으로 데려가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왔다. 1988년 10월23일, 남편 지가 콩트롤 린포체의 생일에 건강한 남자 아이를 출산했다. 아들의 이름을 ‘온화한 목소리를 지닌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잠팔 노르부’라고 지었다.부부는
엘리자베스 마티스(Elizabeth Mattis)라는 미국의 한 소녀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저개발 대상국을 돕기 위한 봉사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각자 나라 하나를 선택해 그 나라에서 하고자 하는 봉사프로그램을 구상하라는 숙제 제출 전날 꿈속에서 네팔을 거닐다 공작새 한 마리를 만났다. 잠에서 깨어난 엘리자베스는 엄마에게 자신이 곧 네팔로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선생님께 네팔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제출했다. 당시 네팔 그 어느 도시와도 결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학교는 네팔의 역사와 현황 등을 공부하며 봉사 필요성
89세가 된 쿠스마 데벤드라는 그가 건립한 아이야 케마 명상센터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96년 비구니가 된 후 쿠스마 데벤드라는 스리랑카에서만 1000여명의 비구니들을 지도해왔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스리랑카의 불심이 깊은 젊은 여성들은 비구니가 되어 평생을 불교에 헌신하기를 소망하고 있다.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비구니 제도는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교계에서 터부시 되고 있다. 스리랑카 대통령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승인됐지만 불교계 내에서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쿠스마 데벤드라는 이
쿠스마 데벤드라(Kusma Devendra)는 스리랑카 출신으로 불자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안다웨라 데바시리 스님에게서 인도 북부 바라나시 근처 사르낫에서 2년간 집중적인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 비구니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1996년 인도에서 열린 수계식에서 부처님과 함께하며 불자들을 앞장서 도울 것을 다짐했다. 수계식이 열리기 3개월 전 한국 강화도에 있는 보문사를 찾았던 그는 보문사 주지스님 지도로 삶의 행동 규범을 다루고 있는 비나야 피타카 즉, 율장을 공부했었다. 보문사에서 한국 불교를 접한 쿠스마는 한국 불교 절차들이
디파마는 얼마 후 기다리던 남자아이를 출산했지만, 아이는 세상 빛을 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두 번이나 아기를 잃은 디파마는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자신의 소중한 딸 디파에게 울고 있는 엄마 모습은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사원으로 들어가 명상을 배우고 그의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겠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하지만 남편은 허락하지 않았고 디파마는 다시 극한 우울증과 더불어 심장병과 고혈압 증세로 눕게 된다.남편은 이런 아내를 가엾이 여기며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면서도 딸을 돌보고 또 밖에 나가 엔지니어로 일
나니 바라 바루아는 1911년 3월25일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 뱅갈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치타공 지역은 다양한 인종과 여러 종교들이 섞여있는 곳이었다. 힌두교, 무슬림, 불교 신자 모두가 갈등과 분쟁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치타공 지역의 불교 신자들은 부처님이 인도에 머물렀던 시대부터 그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바루아 집안도 인도 최초 불교 가문 중 하나로 깊은 불심을 가진 가문이었다.여섯 형제 중 장녀였던 그는 불교에 입각한 교육을 강조했던 부모님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
직업을 바꾼 잠양 다그모 쿠쇼는 놀라운 재능과 능력으로 하루하루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14대 달라이라마 강연이 열리던 날, 강연을 여는 초청강사로 초대받았다. 그는 수준 높은 강연을 펼쳐 불교 교육자로서 명성이 날로 높아져 갔다. 학문적인 내용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인생 문제나 개인적 고민으로 찾아와도 그는 그들 상황에 맞는 부처님 말씀을 제시했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강연으로 바쁜 중에도 캘리포니아주 산가브리엘과 산타바바라, 애리조나주의 플래그스태프, 하와이의 코나,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
잠양 다그모라 사키아(Jamyang Dagmola Sakya)는 티베트 동부 캄(Kham) 지역에서 태어났다. 가족들 대부분이 명망 높은 의사나 지위 높은 라마승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바탕으로 질 높은 교육도 받았다. 당시 티베트에서의 교육은 스님이 되려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이뤄졌다. 일반 어린아이에게 기본교육을 제외한 체계적 불교 철학 공부 기회가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그는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사키아 마스터 중 한 명인 데즈훙 린포체 3세의 조
20세기에 들어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되며 위상도 격상됐고,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패트리시아 젠은 1970년대 인도에서 오랜 기간 공부를 마치고 어떻게 해야 불교계 내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할 수 있을 지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그녀는 먼저 불교에 입문하려는 여성이나 비구니들을 돕기로 했다. 그 당시 티베트 불교의 여성 라마승 대부분이 글을 몰라 달라이라마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먼저 시작한 일은 11명의 비구니들에게 3개월 간 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딸
미국에 있는 유명 해변 말리부 비치에서 파도를 타던 서퍼가 어떻게 모두에게 존경받는 스님이 됐을까? 캘리포니아에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하와이 호놀룰루와 일본 요코하마를 돌아다니며 서핑을 즐기다 불교에 귀의해 한평생을 바친 패트리시아 젠(Patricia Zenn) 이야기이다.패트리시아 젠은 1944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의 성은 ‘젠’이었고 친구들은 그를 선(Zen)불교 신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선불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선불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