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내에서 약 36km 떨어진 동해 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大王, 재위 661?681)의 바다무덤[海中陵]으로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약 20m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다. 인공으로 사방에 수로를 만들어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수중 못을 만들고, 그 안에 길이 3.6m, 너비 2.9m, 두께 0.9m 크기의 화강암을 놓았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라는 대왕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 장례법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이런 형태의 능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김성호의 ‘문무대왕릉 일출’은 어둠을 뚫고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 동해바다를 그린 것이다. 어딘가에 오늘도 후
석굴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서있는 11면 관음보살을 그렸다. 영원한 우주의 한 가운데에 계신다. 하단의 왼쪽 구석에 작은 제비꽃을 그렸다. 관음보살께 바치는 꽃이다. 인간의 가난을 구제하고 고통스러운 이들을 위안해 주시는 관음보살께 드리는 우리 산하와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해 온 들꽃이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들꽃 몇 송이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삶도 부처님 앞에서는 그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제비꽃 몇송이는 보살께서 보살펴 주시는 작고 힘없는 모든 생명(자연과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가 노트에서
조선시대 학자 매월당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오르자 세상과 등지고 30세 초반에 수년 동안 용장골에 은거했다.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도 이곳에서 썼다. 용장골 정상에는 경주남산 최고봉인 고위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고 용장골 아래 내남 들판이 구름아래 펼쳐진다. 산 정상에 세운 용장사터 삼층석탑은 비록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지만 남산에서 가장 장엄한 탑이다. 석가탑과 같이 2중 기단 형식을 갖췄으나 상층기단만 있고 하층기단은 없다. 자연바위 위에 바로 상층기단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탑은 산 전체가 하층기단인 셈이기에 “세상에서 제일 큰 탑”이기도 하다. 탑으로 올라가는 길가엔 석불좌상과 몇 미터 떨어진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마애불’이 있다. 조병연은 황토물을 들인
재료, 한지에 석채. 반월성에서 계림을 지나 대릉원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맞은편에 우아하고 온순한 첨성대가 서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632~647)때에 조영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대이다. 화강석으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 곡선으로 쌓아올려 그 위에 방형의 장대석을 두 겹으로 우물정자와 같이 얹어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하고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 년의 날수와 같고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 맨 위의 정자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경주 남산은 40여개의 골짜기에 120여 곳의 절터와 100여구의 석불, 그리고 70여기의 탑이 산재되어있는 무궁무진한 노천 박물관이다. 그중 아름다운 송림이 숲을 이루고 있는 삼릉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세속의 먼지가 땀으로 다 배출 될 즈음 상선암 근처에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거의 정상에 있는 석가여래 좌상은 자연 바위를 잘 살려 조각되어 이 상을 조각한 사람의 정성이 느껴진다. 산 위에 고요히 앉은 채 천년 이상 세속을 바라보고 있었을 그 모습에 누구라도 일순 숙연해지고 만다. 남산은 아름다운 산이라기보다 신앙의 대상이었다. 바위가 많아 아직도 산의 입구부터 선각, 부조, 조각상들이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남아있다. 이승미 (북촌미술관 부관장) 「법보신문」은 9월 전시